항목 ID | GC02800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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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南雲 |
영어음역 | Baek Namun |
이칭/별칭 | 동암(東巖)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반암마을 601[반암안길 33-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고창 출신의 역사학자·경제학자·정치가.
[개설]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호는 동암(東巖)이다. 1894년 2월 11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반암마을 601번지[반암안길 33-9]에서 백낙규(白樂奎)[1866~1935]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국의 원시·고대·중세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한국 경제사학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백남운의 제자들이 지어 준 집이 현재 반암리 반암마을에 폐허로 남아 있으며, 오른쪽 옆에는 아버지 백낙규의 무덤이 있다.
[활동사항]
백남운은 어린 시절 아버지 백낙규가 운영하는 사숙(私塾)[서당]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11년 4월 18세의 나이로 전라남도 함평 출신의 기남섭(奇南燮)[1891~1950]과 혼인하였다. 1915년 3월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공립보통학교에서 2년 동안 교편생활을 했으며, 1918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고등상업학교와 도쿄상과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이론을 수용하였다.
1925년 4월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 교수로 부임하였다. 1938년 「치안유지법」을 위반하여 1940년 7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41년에는 대화숙(大和塾)에서 일제의 전시 통제 경제를 지지하는 강연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조선학술원을 창립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미군정청에 의해 경성대학 법문학부 경제학교수로 선임되었다. 이 시기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강연을 했다. 1946년 2월 조선독립동맹경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조선민족의 진로」를 『서울신문』에 연재하였고, 5월에는 민족문화연구소를 창립하고 소장이 되었다. 곧이어 『독립신보』 창간에 참여해 고문 겸 논설위원장이 되었으며, 7월에는 독립동맹경성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9월에는 좌우 합작과 3당 합당 문제를 둘러싸고 박헌영(朴憲永)과 대립했다. 또한 11월에는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된 뒤 사회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의 합당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12월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47년 4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5월에는 「조선 민족의 진로 재론」을 『독립신보』에 발표했다. 같은 달 근로인민당 결성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8월에는 미군정이 ‘8·15기념대회’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좌익에 대해 대규모 탄압과 검거를 했을 때 검거되었다.
1948년 4월 무렵 월북한 뒤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서 ‘남조선의 현 정치 정세’를 보고하였다. 같은 해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단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에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데 이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교육상이 되었다.
1952년 과학원 원장, 1956년 민주과학자협회 초대 위원장, 1961년 3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겸 상무위원, 1962년 맑스레닌주의방송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1974년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이 되었다. 1979년 6월 사망하여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백남운은 일제 강점기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있으면서 정치적 실천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학계에서만 활동한 전형적인 학자였다. 그러다가 해방 후 조선신민당 남한 책임자로 정치 활동에 참여한 이후에는 사회주의 주류가 아니라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비주류에 속하면서 이른바 ‘중도좌파(中道左派)’ 입장을 대표하였다. 학문 분야에서는 한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개척자로서의 백남운의 위상은 대개가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백남운이 사회주의 계열의 지식인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가장 깊이 있는 지적 수준을 보여 주었고, 또한 가장 방대한 학문적 성과를 생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저술 및 작품]
1933년 『조선사회경제사』를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