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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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朱勒寺廢塔 |
영어의미역 | Destroyed Pagoda of Jureuksa Temple |
이칭/별칭 | 주륵사지 폐탑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산 123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희돈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4년 9월 29일 - 주륵사폐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5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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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주륵사폐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성격 | 석탑 |
양식 | 삼층석탑 혹은 오층석탑 |
건립시기/연도 | 통일신라 |
재질 | 석재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산 123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에 있는 통일신라 때의 폐탑.
[개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주륵사는 냉산 서쪽에 있으니, 고려 안진이 찬한 승혜각비명이 있다(朱勒寺 在冷山西 有高麗安震所撰 僧慧覺碑銘)”고 기록되어 있다. 『일선지(一善誌)』에는 “주륵사는 백마산 아래 있으며, 고려 안진이 찬한 승혜각비명이 있다.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지을 때, 기와를 철훼하여 폐허가 되어 지금은 유지만 있다(朱勒寺 在白馬山下 有高麗安震所撰 僧慧覺碑銘 府使 李吉培 構南館時 徹毁村瓦 回廢 今有遺址)”라고 하였다.
주륵사의 폐사 관련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선산부 「궁실조(宮室條)」남관(南館) 부분에 “무신년에 부사 이길배(李吉培) 공이 비로소 정사에 임하자 백성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송사를 듣고 판단을 내림에 과감하였으므로 1년이 못 되어 온갖 폐단이 모두 새로워졌다. 학문과 덕행이 훌륭한 마을 노인들, 전 부사인 김치(金峙) 공과 전 현감 신희충(申希忠) 군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문서를 부(府)와 감사에게 올려 폐사(廢寺)의 재목과 기와로 새로 짓기를 청원하였고, 감사 홍여방(洪汝方) 공이 임금께 아뢰어 그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놀고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남아도는 재물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징발하지도 그들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서, 기유년 10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경술년 2월에 준공하였는데, 지어놓은 건물이나 방들이 크고 넓고 짜임새가 있다(戊申年 府使李公吉培 始政勤於字牧 果於聽斷 曾未周歲 百廢俱新 於是鄕之耆宿前府使金公峙前縣監申君希忠 率州人申狀于府于監司 願撤廢寺朱勒之材之瓦以新之 監司洪公汝方上秦蒙允 於是募遊手 羨財 無徵命無奪時 己酉十月肇役 至庚戌二月訖工 凡作楹廳堂房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륵사폐탑은 여러 문적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나 주륵사는 현재 폐사지이며, 다만 파괴된 석탑재(石塔材)와 초석(礎石)만이 산재할 뿐이다.
[건립경위]
주륵사는 본래 큰 사찰이었으나, 조선 전기에 폐사에 가까워져 1492년(성종 23)에 부사 이길배(李吉培)가 남관(南館)을 수리할 때 주륵사의 목재와 기와를 사용할 것을 상소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사운(寺運)이 남았던 것 같지만, 그 후에 곧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도개면에서 낙동강 동안에 개설된 국도 25호선을 따라 남동진하다가 궁기교를 지나면 넓게 펼쳐진 ‘번답들’이 펼쳐져 있고, 들판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개설된 농로를 따라가면 도개1리 ‘아랫마’, ‘윗마’가 차례로 나온다. 이들 마을을 거쳐 계속 동쪽으로 가면 도개2리 송천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이 불교 초전지로 전해지며, 마을 중앙에 ‘전 모례가정(傳毛禮家井)’이 유존하고 있다.
송천마을을 지나면 다곡1리 우실마을이 이웃하고 있다. 우실마을을 지나 다곡1리 다항마을 가기 전 북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계곡을 끼고 400여m 올라가면 산중에 넓은 밭이 있고, 밭 옆 능선 자락을 감싸 안고 폐사지가 유존하는데, 이곳이 주륵사지다. 입구는 냉산(冷山)과 청화산 사이의 협곡이며 청화산 서남방 계곡 중복(中腹)에 위치한다.
[형태]
부재의 분실이 많고 매몰된 것이 많아 석탑의 전체 규모를 알 수 없으나,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석탑 지붕돌[옥개석]을 통해서 추정은 가능하다. 지붕돌은 지붕 받침이 5단에 괴임 2단이 모각(模刻)된 양식이고, 낙수면의 경사와 전각(轉角)의 반전이 완만하게 되어 있어 큰 규모의 지붕임에도 경쾌감을 준다.
크기는 추녀 너비의 경우 제1지붕돌이 236㎝, 제2지붕돌이 204㎝, 제3지붕돌이 175㎝이며, 5단 받침의 최하 너비도 제1지붕돌이 144㎝, 제2지붕돌이 124㎝, 제3지붕돌이 107㎝로서 매우 큰 탑에 속한다. 또 하층 기단은 너비 358㎝이고, 상층 기단 면석(面石)의 높이는 117㎝이며,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모각(模刻)되어 있다.
[금석문]
석상들 중 1석에는 측면에 ‘학생선산김공휘배인(學生善山金公諱裵人) 파평윤씨지묘경생(坡平尹氏之墓庚生)’라는 2행 횡서 음기가 있다.
[현황]
석탑편과 건축 기단석편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이 탑신을 깨 상석을 만들었고, 직사각형의 석상(石床)을 10여 기 치석(治石)해 놓았다고 한다. 사역 내에는 선산김씨 문중 묘소 5기가 있으며 각 묘전(墓前)에 석상이 배치되었는데, 이들도 석질이나 위치로 보아서 주륵사지 탑재와 기단석을 사용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남아 있는 지붕돌의 크기로 보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못지않은 대규모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탑에 관한 약간의 기록이 있는데, 삼층석탑 또는 오층석탑이었다 한다. 모든 양식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이고 조성 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수작(秀作)으로 평가된다. 주변 정밀 조사를 통해 망실되고 매몰된 석탑재를 발굴하여 석탑 복원과 함께 주륵사지 전체 사역과 창건 연대 확인할 필요가 있다.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