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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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昌後 |
영어공식명칭 | Lee Changhu |
이칭/별칭 | 비승(丕承),죽헌(竹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76년 - 이창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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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이창후 임진왜란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이창후 선무원종공신 녹훈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이창후 자인현 복현 청원 |
몰년 시기/일시 | 1648년 - 이창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00년 - 이창후 향현사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927년 - 남천서당 건립 |
출생지 | 이창후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상대리[옛 경상도 경주부 자인현 대처동] |
묘소 | 이창후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가선대부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의병.
[개설]
이창후(李昌後)[1576~1648]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자인현(慈仁縣) 복현(復縣)을 주도하였다.
[가계]
이창후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비승(丕承), 호는 죽헌(竹軒)이다. 아버지는 증 참판(參判) 이몽천(李夢天), 어머니는 교수(敎授)를 지낸 전춘(田春)의 딸 곤양 전씨(昆陽田氏), 할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이기(李璣), 증조부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이자상(李自商)이며, 부인은 권응형(權應衡)의 딸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첨정(僉正)을 지낸 최현립(崔現立)의 딸 영천 최씨(永川崔氏)이다.
[활동 사항]
이창후는 1576년(선조 9) 당시 경상도 경주부의 속현(屬縣)이었던 자인현 대처동(大處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상대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해 1588년(선조 21)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형 이광후(李光後)와 함께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종군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했으며, 정유재란 때는 형 이광후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하였다.
광해군이 재임 중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자 이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여 한양으로 떠났으나, 중간에 병이 생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33년(인조 11) 김응명(金應鳴)·이광후를 비롯해 고을 사람 300여 인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 정부에 자인현 복현을 청원하였다. 당시 자인현은 속현으로서 주읍(主邑)인 경주부에 많은 침탈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인 사족들이 복현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듬해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종일 통곡했다고 한다. 1637년(인조 15) 비로소 자인현이 복현되고 새롭게 관청이 만들어졌다. 이때 이창후는 많은 재물을 내어 일을 도왔고, 고을의 각종 규범을 제정하였다.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묘소]
이창후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대당산(大堂山) 아래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창후는 1605년(선조 38) 군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696년(숙종 22) 자인현 사림들은 복현에 공이 있는 이창후와 김응명·이광후를 제향하기 위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삼성산 아래에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향현사는 1700년(숙종 26) 완성되었지만,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27년 사림의 공론으로 세 사람을 다시 기리기 위하여 남천서당(南川書堂)을 건립하였다. 남천서당은 이후 남천서원(南川書院)[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1길 39]으로 승격되었으나, 현재는 김응명만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