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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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應鳴 |
영어공식명칭 | Kim Eungmyeong |
이칭/별칭 | 이원(而遠),취죽당(翠竹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감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93년 - 김응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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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8년 - 김응명 생원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김응명 자인현 복현 상소 |
몰년 시기/일시 | 1647년 - 김응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00년 - 김응명 상덕사 제향 |
출생지 | 김응명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울옥리 |
묘소|단소 | 김응명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신관리 |
사당|배향지 | 김응명 배향지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 관직|경력 | 생원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학자.
[개설]
김응명(金應鳴)[1593~1647]은 경상도 자인현(慈仁縣) 출신의 학자로 1618년(광해군 1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문집으로 『취죽당일고(翠竹堂逸稿)』가 전한다.
[가계]
김응명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취죽당(翠竹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호(金琥), 할아버지는 김규년(金奎年), 아버지는 송재(松齋) 김우련(金遇鍊)[1552~1632], 어머니는 감찰(監察)을 지낸 김윤수(金允洙)의 딸 서산 유씨(瑞山俞氏)이다. 부인은 이정(李定)의 딸 완산 이씨(完山李氏)이고, 재취(再娶) 부인은 박후룡(朴後龍)의 딸 경주 박씨(慶州朴氏)이다.
[활동 사항]
김응명은 8세 때 백부인 송정(松亭) 김우용(金遇容)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608년(선조 41)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1552~1630]이 영남의 인재를 시험하기 위해 밀양 영남루(嶺南樓)에서 백일장(白日場)을 열었는데, 김응명이 장원(壯元)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613년(광해군 5) 2월 아버지 김우련의 명에 따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에게 학문을 익혔다. 이는 정유재란 시기 김우련이 정경세와 서로 만나, 뜻이 잘 맞았기에 아들을 보내 배우게 한 것이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를 찾아가 공부의 뜻을 여쭙고 문인이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치러진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이후 벼슬에는 뜻이 없어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서 은거하면서 독서에만 힘썼다. 1633년(인조 11) 자인현 복현(復縣)을 위해 방희국(方熙國)을 소두(疏頭)로 하여 고을 사람 300여 명이 함께 소(復)를 올렸다. 이때는 자인현의 복현이 관철되지 않았지만 김응명 등의 노력으로 4년 후인 1637년(인조 14) 자인현 복현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김응명의 유고로 2권 1책의 『취죽당일고』가 전한다.
[묘소]
김응명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신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6년(숙종 22) 자인현 사림들이 복현에 공이 있는 김응명과 이광후(李光後)·이창후(李昌後) 형제를 제향하기 위하여, 지금의 삼성산 아래에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향현사는 1700년 상덕사(尙德祠)로 완성되었지만,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27년 사림의 공론으로 세 사람을 다시 기리기 위하여 남천서당(南川書堂)을 건립하였다. 남천서당은 이후 남천서원(南川書院)[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1길 39]으로 확장되었으며, 현재는 김응명만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