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1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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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藝術 |
영어공식명칭 | Culture and Ar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순욱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이루어지는 문학, 연극, 미술, 음악, 무용 등을 비롯한 인간의 미적 행위와 작품, 관련 제도 및 단체.
[개설]
밀양 문화 예술계의 성장은 1950년 9월 결성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밀양지부와 밀양문화원, 밀양문화구락부의 활동에서 비롯한다. 특히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단체가 밀양문화구락부이다. 밀양문화구락부는 1956년 5월 밀양 읍내에 소재한 각급 학교 예능 담당 교사들의 주도로 결성된 교육 예술 활동 단체이다.
1957년 11월 열린 제1회 ‘밀양종합문화제’ 역시 밀양문화구락부가 주도하였다. 밀양종합문화제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밀양문화구락부가 발전적 해체를 도모하면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밀양지부는 확대와 개편의 수순을 밟는다. 1961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해체되고 이듬해인 196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가 출범함에 따라 밀양의 문화 예술계 역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산하 단체들로 개편되었다. 이후 밀양의 문화예술(文化藝術) 역량은 밀양아리랑대축제로 결집되었다.
[밀양의 문학]
해방 이전 밀양에서는 실질적인 문학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밀양 출신의 박석정과 표문태 등이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밀양에서의 활동은 미비하였다. 문학은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인 매체를 기반으로 성립한다고 할 때, 신문 및 잡지 매체의 등장은 핵심적이라고 할 것이다.
1946년 4월 밀양에서 창간호를 낸 잡지 『등불』과 1947년 6월 창간호를 낸 화악동인회의 동인지 『화악(華岳)』은 밀양 지역 사회에서 동인회가 설립되고 매체가 탄생하는 국면을 드러낸다. 광복기 매체의 발간은 한국 전쟁기 제7육군병원 정훈과에서 간행한 군 기관지인 『철심』, 1953년 향토문화의 창달을 목표로 발행된 잡지인 『문림(文林)』과 『향토문화(鄕土文化)』를 거쳐 류종관의 주도로 1954년 7월 창간된 아랑동호인회의 동인지 『아랑』으로 이어졌다.
또한, 1954년 밀양 지역 고등학생들의 주도로 간행된 학생 문예 동인지 『개화』, 1957년 밀양군 대학생회에서 발행한 『향』 등의 매체가 탄생한 것은 1950년대 밀양 문학 사회가 학생들을 중심으로 괄목할 성장을 이루었음을 보여 준다.
밀양에서 나온 본격적인 문학 동인지는 1959년 발행된 『석화(石花)』라고 할 수 있다. 1964년 제4호를 끝으로 『석화』는 종간되었으나 류종관, 예종숙, 박재호, 이운성 등을 비롯한 걸출한 지역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 1950년대에 나타났던 높은 문학적 열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밀양 문학 사회의 오랜 공백기를 타개한 것은 1980년 5월 발족한 밀양청년문학회와 밀양청년문학회의 동인지 『백원(白苑)』의 간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988년 5월 이재금 시인과 밀양의 젊은 교사들이 규합하여 밀양문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밀양문학』의 발행을 시작하였다.
한편, 2001년 류종관을 중심으로 새롭게 출범한 한국문인협회 밀양지부[밀양문인협회]는 기관지 『밀양문협지』를 창간함으로써 광복기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밀양의 매체 발간 전통과 문학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밀양의 연극]
해방 이후 밀양의 연극은 1945년 성탄절을 기념하며 기독교 청년들의 주도로 공연된 「아! 무정」[윤백남 작, 안영 연출]으로부터 비롯한다. 이후 밀양에서는 김열을 중심으로 극단 ‘대동예술사’가 창설되어 「상해야화」[안영 작, 김열 연출]와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등 왕성한 활동이 일었다.
초기 밀양의 연극 활동은 1960년대 초반까지 적극적으로 지속되었는데 당시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인물들을 살펴보면 극작을 맡았던 안영, 강하영, 김열, 연출을 맡았던 박창숙, 강마상, 강승희, 강한석, 미술을 맡았던 민병표, 이상국, 조희수를 비롯하여 황룡우, 김석, 정숙자, 구원갑, 최희일, 백경묘, 강광석, 강석준, 박대근, 진애란 등이 있었다.
이후 밀양 연극은 1967년 젊은 연극인들이 결집하여 창단한 ‘극단 메들리’로 이어지는데, 창립 당시 이름을 올린 이는 손경문, 박근원, 박진갑, 최차복, 김흥묵, 유나경, 손무상, 이두옥, 안현일, 윤성수, 박말분 등이었다. 본래 극단 메들리는 연극, 음악, 미술, 문학을 비롯한 전방위적 예술 단체를 표방하며 출범하였으나, 점차 연극에 방점이 놓이며 극단으로 성격이 변모하였다.
극단 메들리는 창단 이후 지역 사회를 대표하는 극단으로 기능하며 1967년 「내가 반역자냐」, 1968년 「아리랑」, 「원고지」, 「탄갱부」 등을 시작으로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이수일과 심순애」, 「사람의 아들」, 「새야 새야 파랑새야」, 「토끼와 포수」, 「독배」, 「위기의 여자」, 「신의 아그네스」 등 수많은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밀양의 미술]
1950년대 이전 밀양 지역 사회에서 주요한 활동을 보였던 미술인이나 단체를 찾기는 어렵다. 1950년대 이후 밀양 미술계에 이름을 올렸던 대표적인 인물인 민병표, 박기재, 조희수 등은 당시 밀양 지역 학교에 재직하던 미술 교사들이다. 밀양의 초기 화단은 미술 교사들의 소규모 활동과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서클 운영을 통하여 생겨났다. 이후 박춘재, 박영생, 이상국, 오진국, 최원택 등이 화단에 이름을 알렸으나 밀양에서의 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7년 밀양문화구락부 산하 미술 분과 위원회가 발족함으로써 밀양 화단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밀양문화제[현 밀양아리랑대축제] 미술 실기 대회를 맡아 운영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활동이다. 민병표, 진흥수, 박규철, 이상습, 박윤표, 김영문, 이규성, 이영원 등이 이 시기 활약하였다.
196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설립과 함께 밀양미술협회가 창립되었으며 초대 지부장은 윤종철이 맡았다. 이후 1974년 밀양미술협회가 한국미술협회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음으로써 보다 체계적인 조직으로 도약하여 나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초대 지부장 윤종철을 시작으로 문철수, 박홍범, 손기현, 박노태, 박장길, 손삼희, 이성영, 손주균, 최근수, 유재현, 박영석, 옥창흥, 김세화가 밀양미술협회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사업으로는 밀양아리랑대축제 전국 학생 미술 실기 대회와 밀양 문화의 달[매년 10월] 미술 실기 대회의 조직 및 운영, 밀양아리랑대축제 미술 협회 회원전 개최 등이 있다.
[밀양의 음악]
밀양의 음악사를 살펴보면, 1956년 밀양 지역의 음악인 30인이 규합하여 조직한 ‘미리벌 음악회’가 가장 앞머리에 놓인다. 이문길, 신용철, 이언도, 권영철, 김종수, 윤희철 등을 필두로 발족한 미리벌 음악회는 향토 음악의 중흥과 융성을 목표로 하였다. 1957년 미리벌 음악회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산하 음악 협회로 편입된다. 당시 초대 지부장에 이문길이 이름을 올렸다.
1957년 5월 윤희철과 권영철의 지휘로 ‘밀양연합관악단’이 연주회를 가졌으며, 1958년에는 신용철이 지휘를 맡은 ‘밀양연합합창단’의 연주회와 밀양음악협회 주관의 음악 감상회가 열리는 등 밀양 지역 사회 음악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밀양음악협회는 1986년 9월 한국음악협회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아 한국음악협회 밀양지부로 출범하였고 밀양아리랑대축제 음악 경연 대회 운영과 함께 다양한 연주회를 개최하며 지역 사회 향토 음악의 발전에 힘쓰고 있다.
[밀양의 무용]
밀양의 대표적인 전래 무용으로는 교방(敎坊)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온 ‘운심’의 밀양 검무와 교방 굿거리가 있다. 조선 후기 밀양에서 활동한 기녀 운심에게서 탄생한 밀양 검무는 밀양 예기 권번을 통하여 전하여졌으며, 1988년 밀양백중놀이 예능 보유자인 박동영이 『밀양지』에 기록된 자료를 보고 무용가 김은희에게 권유하여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김은희의 이검무(二劍舞)는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의 「검무기(劍舞記)」[1769]에 표현된 모습을 바탕으로 복원되었다. 복원된 이검무는 1992년 국립국악원에서 개최한 제139회 무형 문화재 정기 공연인 ‘김은희의 춤’에서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2005년부터 열린 ‘밀양 검무 정기 공연’을 통하여 전승되고 있다.
한편, 밀양의 무용은 1968년 밀양국악협회의 발족과 맥을 같이 한다. 밀양국악협회의 조직과 함께 김은희, 강명화, 장윤정, 이정희, 양명자 등이 무용 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1972년에는 김은희에 의하여 밀양국악협회 산하의 ‘무용 연구소’가 설립되었으나 이내 밀양국악협회로부터 독립하여 ‘김은희무용학원’을 개원하였다. 이후 밀양 무용계는 무용인들의 지역 사회 이탈이 잦아짐에 따라 오랜 기간 체계적 조직을 갖추지 못하였다.
한국무용협회 밀양지부가 들어선 것은 2001년 4월이며, 이는 1990년 이후부터 밀양에서 무용계를 이끌어 오던 김금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한국무용협회 밀양지부를 중심으로 밀양 전통 가무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