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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592
한자 東山里東山堂山祭
이칭/별칭 당산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집필자 한미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50년 - 동산리 동산 당산제 중단
재개 시기/일시 1980년 - 동산리 동산 당산제 재개
성격 민간 신앙|마을 신앙|마을 제사
의례 시기/일시 음력 1월 15일
신당/신체 당산나무|조탑|당산 할머니|성황신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동산 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동산리 동산 당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 자시(子時)에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 할머니와 성황신께 마을 사람들의 무병과 풍년을 빌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이를 그냥 ‘당산제’라고도 한다. 동산리 동산 당산제는 본래 총 세 군데의 당산에서 제를 모셨지만, 일제 강점기에 마을 입구에 있었던 당산나무가 베어지고 난 뒤부터 현재와 같이 두 곳에서만 제를 모시고 있다.

당산제를 모실 때는 조탑[성황지신(城隍之神)] 앞에서 풍물[굿물]을 치면서 시작하여 마을 가운데 있는 당산나무[당산 할머니]로 성황신을 모셔 들여와 한꺼번에 제사를 지낸다. 동산리 동산 당산제복흥면 일대에서 가장 성대하게 지내기에, 제의 당일이 되면 군수나 면장 등이 와서 제관으로 참여하는 등 아직도 활발히 제를 모시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동산리 동산 당산제의 역사는 문헌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민들은 마을의 역사와 같이 할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믿고 있다. 동산 마을의 성촌 역사는 2013년을 기준으로 약 600여 년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명칭은 ‘구시울 마을’이었으며, 이후 ‘구술 마을’로, 일제 강점기에는 ‘조동’으로 불렸다. 현재 동산리 동산 당산제의 축문에는 마을 명칭을 ‘구술 마을’로 표기해 놓았는데, 이는 당산제를 모시는 것 자체가 옛것을 지킨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일부러 과거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동산리 동산 당산제도 한때 단절되었는데, 6·25 전쟁 직후와 새마을 운동 당시에 미신 타파의 분위기로 인하여 잠시 중단되었다. 당산제를 모시지 않던 동안 마을에 교통사고가 자주 나는 등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자, 1980년대에 마을 회의를 통하여 당산제를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마을 제사를 다시 모시자 교통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마을 노인들도 아픈 사람이 적어졌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동산 마을의 제당은 2013년 현재 두 군데이다. 마을 입구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조탑과 마을 한가운데 있는 당산나무가 그것이다. 조탑의 신격(神格)은 ‘성황신’이며 당산나무의 신격은 ‘당산 할머니’이다. 하지만 본래 동산 마을의 제당은 세 군데였다고 한다. 즉 마을 입구에 당산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마을 입구 왼쪽 논 가운데에 있는 조탑과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당산나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배를 만든다고 하여 일본인들이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성황지신]를 베어 버려 소멸되고, 그 뒤로 조탑이 ‘성황지신’을 대신하게 되었다.

‘당산 할머니’인 당산나무의 수종은 느티나무로 수령은 2013년 기준 610년 정도로 추정되며, 현재 전라북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6·25 전쟁 당시 마을이 소개되던 때에 당산나무도 함께 불탔는데, 이때 원래 나무 둘레의 삼분의 이 정도가 타버려서 그 부분은 현재 시멘트로 메워져 있는 상태다.

[절차]

1. 제관 선정, 제비(祭費), 제물, 금줄과 황토

당산제 일주일 전에 마을 회의를 통해 제물을 장만할 화주와, 제사를 진행할 제관과 축관을 선정한다. 화주와 제관 모두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을 뽑는데, 요즘은 마을에 초상날 일도 별로 없고, 다들 노인네들만 있는 터라 애기 낳을 일도 없어서 누가 화주나 제관이 되어도 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그해 삼재가 들었다거나 운세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특히 화주는 매번 흐르는 물에 몸을 씻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기를 꺼려해서 몇 년 전부터는 한 집에서 계속 화주를 맡아서 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산제의 전체적인 주관은 초헌관인 이장이 한다. 이장은 나이가 어리더라도 동네의 어른이라는 의미에서 초헌관은 반드시 이장이 맡는다고 한다. 아헌관은 개발위원장이나 면장, 군수 등 그때의 상황에 따라 바뀐다.

제비는 과거에는 식구 하나에 얼마씩 할당한 인구전(人口錢)이었지만, 현재는 헌금 형식으로 받고 있다. 설날에는 ‘희사전’이라고 해서 외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당산제 때 사용하라고 얼마간의 돈을 희사하기도 한다. 또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당산제를 위해서 약간의 돈을 내놓기도 한다.

당산제에 쓰일 제주(祭酒)는 화주 집에서 음력 정월 열흘날 담근다. 이때 화주 부부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담근다. 음력 1월 14일 술독 안에 용수를 꽂아서 받아낸 맑은 청주를 당산제의 제주로 사용하고, 그 아래에 가라앉은 술은 마을 회관에서 식사를 할 때 사용한다. 제사상에 올라갈 떡은 화주 집에서 장만하는데, 팥을 넣지 않은 백설기로 시루떡을 해서 시루 째 상 위에 올린다.

제주를 제외한 기타 당산제를 위한 제물 준비는 1월 13일 장을 봐 두었다가, 대보름날 아침 일찍 장만한다. 장에서 제물을 장만할 때에는 생선은 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간이 된 것으로 구입하며, 가능하면 모든 품목의 값을 깎거나 흥정을 해서는 안 된다. 제물을 장만할 때 과거에는 마을 우물이 따로 있었지만, 상수도가 설치된 뒤에는 화주 집에서 장만한다.

당산제 이삼일 전에 당산나무와 조탑 주위, 화주 집 앞과 그 길목에 황토를 뿌리는데, 이를 금토라고 한다. 금토와 마찬가지의 위치에 치는 줄을 금줄이라고 한다. 화주 집 대문 앞에는 제 모시기 5일 전에 제주를 담그면서부터 쳐 놓으며, 제당 주변에는 당산제 이삼일 전에 금토를 뿌리면서 같이 친다.

2. 제의 진행

동산리 동산 당산제는 본래 정월 열나흗날 밤 12시에 모셨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들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정월 대보름날 아침 10시부터 모신다. 먼저 마을 회관에서 노인 회원들이 치는 ‘굿물[풍물]소리’로 제의의 시작을 알리고, 곧바로 마을 입구에 있는 조탑으로 가서 굿물을 치며 이곳의 신격인 ‘성황지신’을 마을 가운데 있는 당산나무[당산 할머니]로 모셔 온다. 이때 당산나무에는 한자로 ‘당산지신(堂山之神)’과 ‘성황지신’이라고 쓴 지방이 붙여져 있다.

이후 굿물을 치며 당산나무 앞에 제상을 차린다. 상 위에 올라가는 제물은 사과, 배, 대추, 삼탕[홍합, 새우, 명태], 석쇠에 구워서 올린 생선[조기, 전어, 병치], 돼지머리, 세 가지 나물[도라지, 콩나물, 고사리], 유과, 찐 홍어, 백설기 떡, 메 2그릇, 국 2그릇[미역국]이다. 당산나무에서는 유교식 제차에 따라 제를 모시는데 ‘강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 첨작→ 헌다→ 유식→ 사신→ 음복’ 등의 순서이다. 제를 모시는 동안에는 굿물을 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제관과 화주 그리고 주변의 동네 사람들이 모두 제사 음식으로 조금씩 음복을 하며, 헌식(獻食)은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음식을 조금씩 뜯어서 한지 위에 올려놓고 제상 바로 위에다 묻었으나, 개미나 벌레가 너무 많이 끓어서 현재는 묻지 않는다. 당산나무에서의 제가 끝나면 한바탕 굿물을 친 후 당산제를 마친다.

[축문]

동산리 동산 당산제의 축문은 해마다 새로 쓰는데, 마을에서 대대로 사용해 오던 원래의 한문 축문을 한글로 바꿔 써서 제사 때 사용한다. 이는 알아보기 쉽게 할 뿐만 아니라 본래 축문 내용과는 좀 다르게 현실 세태를 반영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과거에 사용하던 한문 축문과 제사 때 당산나무에 붙여 놓는 ‘당산지신’ ‘성황지신’ 등의 지방은 노인회 총무 이철상[남, 1936년 생]이 맡아서 쓰고 있다. 2005년 당산제 때 읽었던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을유년 정월 갑자삭 십오일 무인 유학 김형기 감소고우. 천년의 옛터를 지켜온 우리 구술 마을을 굽어 살피시는 당산 신령님께 해마다 대보름날을 택하여 온 마을 사람들의 정성을 모아 제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지엄하신 신령의 높으신 보살핌으로 우리 구술 마을 모든 사람의 삼개 칠난을 물리치시고 백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늘은 맑고 땅은 기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집집마다 자손들이 번창하게 하옵시고 이웃과 이웃이 상부상조하여 번영된 터전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귀엄하신 당산 신령님이시여 부족한 정성과 모자란 제수로 마련하였으나 허물을 탓하시지 마시고 국태민안과 남북통일을 이룩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축원하나이다. 상향.”

[부대 행사]

당산제를 마치고 난 뒤 당산나무 앞에서 한바탕 굿물을 치고 나면 모든 제의가 끝난다. 이후 곧바로 화주 집으로 가서 ‘보름 굿[지신밟기]’을 쳐 준 다음 마을 회관으로 들어온다. 보름 굿은 정월 대보름부터 이월 초하룻날까지만 친다. 보름 굿은 굿을 쳐주기를 원하는 집에서만 치며, 그 집에서는 술이나 음식을 내놓는다. 이때 걷어진 쌀이나 돈은 모아서 동네 노인회 기금으로 쓴다. 동산 마을의 굿은 예전부터 인근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소리였다고 하지만,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이 ‘굿물’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고, 굿을 칠 수 있는 노인들도 몇 분 되지 않아서 제대로 가락을 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당산제는 보름 굿까지 모두 치고 난 오후 12시가 되면 공식적으로 끝이 난다. 이후 제사가 끝났음을 마을 회관에서 이장이 사이렌을 울려 동네에 알린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마을 회관으로 모여 점심을 함께 먹는다.

[현황]

동산리 동산 당산제는 과거부터 매우 성대하게 모셔져 왔으며, 2015년 현재 군수와 면장이 당산제 제관으로 참여하는 등 활발히 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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