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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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城山 |
이칭/별칭 | 영니산(盈尼山),금학산(金鶴山),천진산(天辰山),가마산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산운리|탑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상일 |
해당 지역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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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산 |
높이 | 531m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산운리, 탑리리에 걸쳐 있는 산.
[명칭 유래]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와 『대동여지도』[1432년] 그리고 「1872년 지방지도」에는 금성산을 영니산(盈尼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32년] 의성현 산천조에는 금학산[현재 금성산]과 금성산[현재 비봉산]은 모두 현 남쪽 25리에 있으며, 비봉산은 현 서남쪽 3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비봉산 외에 비봉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또 하나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비봉산은 현재의 명덕리절골의 남쪽과 도경리 북쪽 백장령 근처에 있는 산이다. 본래 금학산으로 불리던 산의 이름을 금성산으로 하면서 금성산으로 불리던 산의 이름을 백장령 근처의 산과 같은 비봉산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한편 금성산은 남쪽의 금성면 산운리와 서쪽의 탑리리를 감싸고 우뚝 솟아 있어 산의 모양이 마치 가마[轎]처럼 생겼다 하여 가마산, 또는 천진산(天辰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성산은 삼한 시대 진한의 성읍 국가인 조문국이 산성을 쌓은 후 산성이 쇳덩어리 같이 견고하다는 뜻으로 쇠울산성이라 명명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쇠울을 한문으로 ‘금성(金城)’으로 표기하면서 현재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 환경]
금성산은 높이가 53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화산으로 현재 사화산이다. 태백산맥 남쪽의 일부이며, 비봉산과 산지의 능선이 환상(環相)으로 연결되어 있다.
금성산을 구성하고 있는 기반암은 중생대 백악기 유천화산암층군인 산성 화산암이며, 산성 화산암을 둘러싸고 염기성 화산암이 분포하고 있다. 백악기 하양층군의 춘산층과 부정합으로 분포하는 산성 화산암은 유문암, 유문 석영 안산암, 동성분의 응회암과 수성 퇴적암이 협재되어 있으며, 염기성 화산암은 현무암 및 현무암질 사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봉산과 금성산을 이루고 있는 환상의 산지와 산지의 내부는 화산암을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외부는 백악기 하양층군의 춘산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춘산층과 화산암은 부정합 관계를 보인다. 춘산층은 셰일 및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저에는 구산동 응회암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두 층이 부정합으로 만나는 지점에서는 기반암이 노출되어 암석 단애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단애를 따라 기암괴석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금성산 주변에는 소쩍새가 서식하고 있다. 식생은 소나무 군락이 주를 이룬다.
[현황]
금성산 서쪽 사면에 해당되는 탑리리에는 국보 제77호인 의성 탑리리 오층 석탑이 있으며, 인근의 초전리에는 문익점 선생 면작 기념비와 조문국의 경덕왕릉이 있다. 또한 금성산에는 조문국 시대에 쌓았다는 금성산성[조문성]이 있다. 현재는 산성의 흔적이 낮은 돌담의 형태로 남아 있고 신라의 조문국 침략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물론 전설일 뿐 사실인지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조문국의 최후 결전을 치를 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었다고 하며, 이 부녀자들이 앞치마에 돌을 날라서 던지고, 굴리며 끝까지 항쟁했다고 한다.
금성산에는 길이 2,730m, 높이 4m의 금성산성을 배경으로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산행하기에 좋다. 금성산성을 따라 산행을 하다 보면 흔들 바위, 조문 전망암, 아들 바위, 딸 바위, 동굴, 솟대 바위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금성산과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높이 671m의 비봉산을 지날 수 있어 의성의 명산을 두루 방문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금성산과 비봉산 자락에는 신라 시대 의상이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와 산운 마을을 함께 둘러볼 수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정상 부근에 분지가 있는데, 이 분지가 최고의 명당자리라 한다. 이 명당자리에 묘를 쓰면 3년 이내에 큰 부자가 되지만, 인근 30리 안에는 석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수정사의 샘물이 마른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전설 때문에 이곳에 묘를 쓰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으며, 날이 가물게 되면 주변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묘를 파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해방 이후까지도 이와 같은 일들이 되풀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