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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931
한자 佛敎
영어공식명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선기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삼국 시대 및 통일 신라 시대의 남양주 불교]

삼국 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의 남양주 불교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을 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삼국 시대에는 주로 백제의 영토에 속하여 있어 백제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양주 지역 다수의 사찰 창건 기록에는 6~9세기 무렵 신라와의 관련성을 강조한다. 특히 흥국사(興國寺)봉영사(奉永寺)가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불암사(佛巖寺)가 824년(신라 헌덕왕 16) 지증국사(智證國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찾기는 어렵다.

[고려 시대의 남양주 불교]

고려 시대 양주목(楊州牧)은 주요 행정구역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는 각 행정구역마다 중심 사원을 마련하였는데, 이를 비보사사(裨補寺社)라고 부른다. 따라서 고려 시대 양주목에도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다수의 비보사사가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남양주 사찰의 창건 기록에 따르면 견성암(見聖庵)은 고려의 개국공신 조맹(趙孟)의 후손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봉선사(奉先寺)는 969년(광종 20)에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당시 양주목에 총 22개의 사(寺)와 암(庵)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 시기에는 많은 사찰들이 융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의 남양주 불교]

조선 시대 남양주의 불교는 당대의 불교 정책 및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봉선사는 1469년(예종 1) 정희왕후(貞熹王后)세조의 능침사로 중창하면서 사세(寺勢)가 확장되었다. 연산군 대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관장하던 사찰인 흥천사(興天寺)와 흥덕사(興德寺)가 소실된 이후 명종 대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하여 선종과 교종을 다시 세우면서 봉선사는 교종을 관장하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봉선사는 조선 전기 불교 정책을 운영하는 데에 중심 사찰로 기능하였다.

흥국사, 봉영사, 내원암(內院庵)은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흥국사는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 사찰로 마련되었다. 1568년(선조 1) 선조가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지으면서 ‘흥덕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봉영사는 1755년(영조 31)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묘가 순강원(順康園)으로 승격되면서 원당이 되었다. 이때 사찰의 이름을 ‘봉영사’라 부르게 되었다.

내원암은 아들의 탄생을 바라던 정조의 염원이 이루어진 곳으로 내원암에서 기도를 드려 1790년(정조 14) 순조를 얻었다고 전한다. 이후 정조의 명으로 1794년(정조 18) 내원암에 칠성각(七星閣)을, 1796년(정조 20)에는 사성전(四聖殿)을 건설하였다. 또한 순조 대인 1825년(순조 25)과 1831년(순조 31)에도 왕실의 내탕금으로 내원암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조선 시대 남양주의 불교는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확인되는 경기도의 총 사찰 수는 212개로 군현(郡縣)당 평균 5.4개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양주에는 20개 이상의 사찰이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어 조선 전기 다른 군현의 사찰 수를 크게 웃도는 많은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도 양주에는 다른 군현의 평균을 웃도는는 10개의 사찰이 존립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남양주는 조선 시대 불교의 주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근현대의 남양주 불교]

근대기 남양주 불교의 핵심 사찰은 봉선사라고 할 수 있다. 봉선사는 1902년(광무 6) 원흥사(元興寺)를 대법산(大法山)으로 하고 전국 16개 사찰을 중법산(中法山)으로 개편할 때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였던 1911년 「사찰령(寺刹令)」의 시행으로 전국의 사찰이 30본산(本山)으로 지정될 때 경기 북부의 사찰을 관장하는 본사(本寺)가 되었다.

근대기 봉선사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월초(月初) 거연(巨淵)을 꼽을 수 있다. 월초 거연은 「사찰령」 이래 봉선사의 주지를 5대까지 역임하면서 봉선사의 중흥을 이끈 인물이다. 또한 월초 거연은 19세기 말 남한산성의 총섭(總攝)을 역임하였고, 불교계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였으며, 최초의 불교 연구 기관인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월초 거연은 근대 불교계를 이끈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로 접어든 이후 남양주의 불교는 6·25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남양주 지역 일대가 전장이 됨에 따라 다수의 사찰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대의 뜻 있는 여러 승려들이 사찰의 중창을 거듭하여 지금까지 남양주의 불교를 이어올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묘적사(妙寂寺)는 1971년 승려 자신(慈信)에 의하여 대웅전과 요사가 중건되었고, 보광사(普光寺)는 학산(鶴山) 영순(永順)이 중창하였으며, 봉선사는 1959년부터 1977넌까지 화엄(華嚴), 운경(雲鏡), 능허(凌虛), 운허(耘虛), 월운(月雲) 등에 의하여 여러 전각이 중건되었다.

그밖에 봉영사는 1968년 혜경(慧鏡)이 중창하였으며, 보광사는 1959년 만허(滿虛)가 칠성각을 중건하는 등 여러 고승들의 노력으로 사찰이 유지될 수 있었다.

남양주시의 대표적인 사찰로 견성암, 보광사, 봉인사, 묘적사, 내원암, 흥국사, 불암사, 천보사, 봉선사, 봉영사, 수종사 등이 있다. 특히, 봉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로 ‘능엄학림(楞嚴學林)’을 운영하며 불교 강학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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