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사회변동과 남양주의 기독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016
한자 近現代 社會變動- 南楊州- 基督敎
영어공식명칭 Modern and Contemporary Social Changes and Christianity in Namyangju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진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6년 - 근현대 사회변동과 남양주의 기독교 도농교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 근현대 사회변동과 남양주의 기독교 용진교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 근현대 사회변동과 남양주의 기독교 월산교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 근현대 사회변동과 남양주의 기독교 광능천교회 설립

[정의]

한국 근현대 사회 변동과 경기도 남양주 기독교의 주요 양상.

[개설]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기독교는 한국 근현대 사회 변동과 함께해 왔다. 먼저 한국에 근대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천주교가 신앙으로 자리 잡는 데 정약종(丁若鍾)과 그 일가의 터전인 마재성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에는 개신교 전파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경기도 남양주 일대에도 신앙이 전파되고 교회가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대대적으로 발생한 3·1운동에서 경기도 남양주 지역 교회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농촌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봉안마을 이상촌 운동은 김용기(金容基)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추진하였다. 해방 이후 냉전 체제에서 발생한 6·25전쟁은 교회의 파괴를, 전후(戰後) 복구는 교회의 재건을 가져왔으며, 박정희 군사 정권의 독재는 유신 헌법을 비판하는 교회의 강제 철거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한편 최근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진행 중인 재개발 사업은 해당 지역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봉사하던 지역 교회의 교인 감소와 강제 철거를 가져왔다.

한국 근현대 사회 변동과 남양주 기독교를 통해 상생의 미래를 위해 배우고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조선 후기 사회 변동 속에서 천주교 마재성지의 탄생]

조선 후기 탈(脫)성리학적 분위기가 강해지고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17~18세기 청나라 북경을 방문한 사신들은 한문으로 된 서학(西學) 서적을 국내로 입수해 왔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토대로 학문적인 차원에서 서학을 공부하였지만, 일부는 서학을 천주교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학을 천주교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한국 천주교 창설과 천주교 교리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로 정약종을 꼽을 수 있다. 정약종은 ‘마재’라고 불리는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출신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인물이다. 정약종은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는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이었고, 한글로 된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정약종뿐만 아니라 정약종의 형제들인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정약종의 아들 정철상(丁哲祥), 정하상(丁夏祥) 등도 천주교인으로서 초기 한국 천주교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마재는 18세기 초 이래 정약종 집안의 세거지였다. 마재에서 정약종과 가족들은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1780년대 무렵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후 마재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 창설의 공로자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 권일신(權日身) 등과도 연결되어 한국 천주교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재 마재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면서 마재성지로 기려지고 있다.

[개항 이후 개신교의 전파와 교회 건립]

조선 왕조의 지배층은 천주교의 전파를 경계하였다. 천주교의 교리가 신분제 질서에 기반한 왕조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초기 한국 천주교는 수차례의 종교적 박해를 감내해야 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서세동점의 국제 환경 속에서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서양이 아닌 일본에 의한 개항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서양 각국과 근대적 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도래와 조선에서의 천주교 포교의 허용 역시 그러한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1880년대 개신교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에서 천주교 포교가 허용되었다. 특히 1885년 서양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의 입국은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한국에 교회를 세우고 교육과 의료 활동을 중심으로 개신교 전파에 힘썼다. 그 결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도 개신교 신앙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경기도 남양주 지역민들은 당초 변변한 교회도 없이 삼삼오오 모여 예배를 보았지만 오래지 않아 교회들을 건립하면서 신앙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 건립된 당시의 교회로는 도농교회[1906년 건립], 용진교회, 월산교회[1907년 건립], 광능천교회[1908년 건립] 등이 있다. 이 교회들은 개신교 복음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당·강습소·야학교·소학교 등을 건립하여 운영하면서 지역민들에게 한학이나 신식 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과 함께한 남양주 기독교]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제 한일 병합 이후, 대다수 한국인은 35년에 걸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한국인들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였고, 그러던 중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때 경기도 남양주 지역 개신교 교회의 구성원들도 상당수가 3·1운동에 참여하여 항일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있었던 만세 시위의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5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당시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는데, 용진교회 교인들과 송촌리 및 인근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시위 참가자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모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당시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헌병대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다음날 용진교회 예배 도중 헌병과 헌병 보조원들이 교회를 포위하고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이들을 체포하였으며, 체포된 사람들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1919년 3월 18일에는 월산교회 교인을 포함해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답내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월산리·답내리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하였다. 밤에 횃불을 들고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당시 양주군 화도면 마석우리]로 가 만세를 부르며, 만세 시위 모의 과정에서 검거되어 투옥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들의 발포로 5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5명이 중상을 입으면서 시위 군중은 해산되었다. 일본 헌병들은 다음날 아침에 만세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을 연행해 갔으며, 연행된 이들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월산교회의 목사 김필규(金弼圭)는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19년 7월 2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농촌 계몽 운동의 일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이상촌(理想村) 운동]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농촌 계몽 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아 농촌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2리와 능내3리[당시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의 봉안마을에서 진행된 이상촌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촌 운동은 봉안마을 출신의 개신교인 김용기가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봉안마을에서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해 전개한 농촌 개발 사업이다.

김용기는 1939년 27세의 나이에 봉안교회 장로가 된 인물로, 훗날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는 여운형(呂運亨)의 광동학교(廣東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김용기는 마을 뒷산 황무지를 부인과 함께 일군 것을 시작으로 이상촌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가옥을 분배하고 함께 토지를 점차 확대 경작하며 공동 생활을 하였다. 농사 기술의 개선을 통해 당시 시급하였던 식량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의식주 생활과 교육 수준을 개선하는 데도 힘썼다.

그 외에도 김용기는 이상촌에서 일본이 강요하던 동방요배(東方遙拜)[일본 궁성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일]를 거부하고 창씨개명과 강제 공출에도 반발하여 조선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40년대 들어 김용기는 이상촌을 독립운동가, 징용·징병 거부자 등의 은신처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김용기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상촌으로 피신해 온 이들을 고구마 창고와 기도굴 등에 숨겨서 보호하였다. 이상촌으로 피신해 와 김용기의 보호 아래 은거 생활을 했던 인물 중에는 여운형도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의 하부 조직인 농민동맹이 이상촌 지역에서 결성되어 일본의 강제 공출과 징용·징병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였다. 김용기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일대를 관할했던 경기도 양주군 대표로 농민동맹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냉전과 독재, 한국 현대사와 남양주 기독교]

1945년 해방 후 요동치는 한국 사회의 여파는 남양주 기독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냉전 체제 아래에서 1950년에 6·25전쟁이 발발해 3년 간 이어지면서 경기도 남양주 지역 교회들을 소실·훼손시켰다. 하지만 6·25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원조 속에서 남한 사회가 재건된 것처럼 일부 교회는 미군의 원조를 받아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월산교회는 1952년 미군 부대의 지원으로 목조 건물인 교회와 학교를 건축하였고, 마석교회는 1954년 미군 제72 탱크 부대와 대한원조단의 지원으로 교회를 건축하였다. 광능천교회는 1955년 주한미군 1군단 하사관학교 군목의 지원으로 교회를 건축하였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 정권의 독재는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교회 사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용진교회의 목사 류창열이 1972년 선포된 「유신 헌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관에서 용진교회를 철거한 것이다. 사태의 추이는 이랬다. 지역 경찰서장이 파출소장과 예비군 중대장을 대동하고 류창열을 찾아와 「유신 헌법」을 적극 지지하고 홍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류창열이 거절하였다. 그러자 관에서는 완공을 앞둔 용진교회 신축 건물을 철거하고 벌금 10만 원을 부과하였다. 1973년 철거 당시 교인들은 격렬히 반발하였고 몸싸움까지 벌이며 저항하였지만, 결국 용진교회는 경찰과 철거반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다.

[21세기 재개발의 파고 속 남양주 기독교]

경기도 남양주시는 서울특별시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2000년대 이후 서울 주택 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신도시가 조성되고 여러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노후된 주거 환경이 개선되고 대단지 주택이 공급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개발 과정에서의 불협화음과 마찰이 고스란히 지역민들의 피해로 이어지는 역기능도 발생하였다. 일례로 2009년부터 추진된 다산 공공 택지 지구 조성 사업 과정에서 해당 지역을 터전으로 삼아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일이 있다.

지역 사회에 정착해 있던 교회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역민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지내온 교회들이 공공 택지 지구 조성 사업이 시작된 이래로 상당수의 교인을 잃고 토지 수용 결정에 따라 해당 지역을 떠나게 되었다. 그 중에는 1906년에 설립되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경기도 남양주의 역사와 함께한 도농교회도 있다. 도농교회는 공공 택지 지구 조성 사업을 추진하는 측의 토지 수용 결정에 대해 반대하며 항의하였으나, 결국 강제로 철거되기에 이르렀다.

새로 조성된 공공 택지 지구에는 다른 교회들이 들어섰고, 교인들이 채워졌다. 새로운 교회들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새로운 시대를 감당하겠지만 지난 시간 한국 근현대 사회 변동의 물결을 함께했던 경험과 정신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이는 한국 근현대 사회 변동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저력과 내공을 쌓아 온 남양주 기독교가 앞으로 더욱 소중히 지켜져야 할 이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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