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28
한자 柳熙庠
영어공식명칭 Yu Huisa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유희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2일 - 유희상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3·1운동 관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2일 - 유희상 징역 6월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19일 - 유희상 태형 90대 선고
추모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유희상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지도보기
활동지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유희상(柳熙庠)[1881~?]은 1881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양주군에서는 1919년 3월 13일부터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봉선사(奉先寺)의 승려인 이순재(李淳載)·김성암(金星岩)·강완수(姜完洙)와 서울에서 약종상을 하는 김석로(金錫魯) 등은 서울에서 독립 선언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평리 인근의 주민들을 모아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순재 등은 독립 만세 시위를 추진하는 한편, ‘조선 독립단 임시사무소’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운동을 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문건을 제작하여 배포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 29일 봉선사 서기실에서 인쇄한 약 200매의 유인물을 승려 강완수 등 2명이 밤 9시부터 다음 날인 1919년 3월 30일 새벽까지 부평리·진벌리 등 부근 4개 마을의 민가에 배포하였다.

해당 문건을 접한 부평리이재일(李載日)은 문건을 마을 사람들에게 돌리며 광릉천 일대에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고, 1919년 3월 31일 이재일·최영갑(崔永甲)·최대봉(崔大奉)·양삼돌(梁三乭)·박석몽(朴石夢)·최대복(崔大福)·이흥록(李興錄) 등이 광릉천 일대에서 600여 명을 모아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는데 유희상도 참여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 시위를 주도한 인물 8명을 체포하였다.

유희상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1919년 5월 2일 징역 6개월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공소한 끝에 1919년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상훈과 추모]

유희상에게 2011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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