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76
한자 崔永甲
영어공식명칭 Choe Yeonggap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대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최영갑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3·1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2일 - 최영갑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
출생지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지도보기
활동지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최영갑(崔永甲)[?~?]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민족 대표들의 3·1 독립선언 소식을 접한 뒤 봉선사 승려들은 시위 계획을 구체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 29일 봉선사의 승려였던 이순재(李淳載)·김성암(金星岩)·강완주(姜完珠), 서울에서 약종상을 하고 있던 김석로(金錫魯) 등은 문건을 작성하여 부평리와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배포된 문건의 명의는 ‘조선 독립단 임시 사무소’였으며, 내용은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기로 결정한 듯하므로, 이러한 기회에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영갑이순재 등이 배포한 문건에 영향을 받아 부평리 광릉천 일대의 시위를 처음으로 결의하고 구체화한 이재일(李載日)최대봉(崔大奉)·양삼돌(梁三乭)·유희상(柳熙庠)·박석몽(朴石夢)·이흥록(李興錄) 등과 함께 1919년 3월 31일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시위는 일본 헌병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이에 따라 최영갑은 체포되었지만, 부평리의 시위로 1919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의 재판에 회부된 8명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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