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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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집필자 | 정요근 |
[정의]
선사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시대적 변동에 대한 내용.
[선사]
선사 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는 아직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도봉 지역은 한강 유역의 일부에 해당하므로, 한강 유역의 선사 문화권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아직까지 도봉 일대에서 선사 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등 서울의 한강 변에 선사 유적이 발견되는 곳이 확인되므로, 도봉구 지역에도 선사 시대 이래 주민들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삼한 시대(三韓時代) 도봉구 지역은 목지국(目支國)을 우두머리로 하는 연합체인 마한(馬韓)의 영역이었을 것이며, 백제(百濟)가 건국되면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후 고구려(高句麗)가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는데,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공격으로 백제의 도읍인 한성이 함락되면서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판도 아래에 들어갔다. 이 시기 도봉 지역은 고구려가 한강 이북 지역에 설치한 북한산군(北漢山郡)의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551년 백제와 신라(新羅)의 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을 회복하였으나, 2년 뒤인 553년(진흥왕 14) 7월 신라가 한강 하류의 영토를 빼앗았다. 이때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은 신주(新州)의 영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 통일 후 신라는 685년(신문왕 5) 전국을 9개의 주(州)로 나누고 5개의 소경(小京)을 설치하는 등 지방 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는데, 도봉구 지역은 한산주(漢山州)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전국적인 지방 행정 단위 개편 때 한산주는 한주(漢州)로 개칭되었으며 도봉구를 관할하는 행정 구역으로 한양군(漢陽郡)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이르면 전국 각지의 지방 유력자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는데, 도봉구 지역은 어떤 유력자에 의해 통치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898년 왕건(王建)을 보내 양주(楊州)와 견주(見州)[현 경기도 양주시]를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통하여 도봉구 지역은 일찍부터 궁예(弓裔)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궁예의 후고구려를 계승한 고려(高麗)의 판도 안에 포함되었다.
[고려]
고려 시대에 들어서면서 도봉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호칭인 해촌(海村)이 사료에 처음 나타난다. 즉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숙종 때 양주 지역에 남경(南京)의 설치를 계획하였는데, 입지 조사 과정에서 후보지로 노원역(盧原驛)·해촌·용산(龍山) 등이 거론되었다. 비록 고려 남경의 중심지는 현재 경복궁 일대에 건설되었지만, 서울특별시 도봉구 일원도 남경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즉 고려 시대 현 도봉구 지역은 양주, 그리고 그를 계승한 남경과 한양부(漢陽府) 등의 관할 영역이었던 것이다.
남경의 설치 이전 양주는 신라의 한양군을 계승하였으므로, 그 중심지는 현재 서울특별시 광진구 지역에 위치하였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은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으로부터 장단(長湍)과 적성(積城), 견주 등을 거쳐 남쪽의 광주(廣州), 충주(忠州) 등으로 연결되는 고려 시대 개경 이남의 간선 교통로의 경유지에 해당하였다.
거란의 2차 침입 때 전라도 나주 지역으로 피난을 갔던 현종(顯宗)이 도봉 지역을 경유하였던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고려 중기 남경의 설치로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는 현재의 파주와 고양 사이에 위치한 혜음령을 지나는 노선으로 변경되어,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의 입지적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조선]
조선(朝鮮)이 개창된 후, 1394년 도읍의 천도를 통해 옛 남경이 있던 한양부 지역이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옛 남경의 영역 중에서 도성 지역 및 도성 주변의 성 밑[城底] 약 3.93㎞[10리]의 영역에 포함되지 못하는 지역은 인근 견주와 통합되어 새로이 양주 영역으로 편성되었다. 즉 고려 시대 남경의 영역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도읍의 영역과 양주의 영역으로 분속되었는데, 도봉구 지역은 양주 영역에 포함되었다. 한편 도성의 동북방 성 아래 약 3.93㎞의 영역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북구와 강북구 영역까지 포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현재의 도봉구 지역은 양주목(楊州牧) 해등촌면(海等村面)에 해당한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도봉산 밑에 해촌이 있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으며, 1765년(영조 33)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해등촌면이라는 명칭이 명확하게 등장하고 있다. 역시 18세기 후반의 자료인 『호구 총수(戶口總數)』에서는 해등촌면 내에 영국리(靈國里), 누원리(樓院里), 암면리(巖面里), 소라리(所羅里), 우이리(牛耳里), 마산리(馬山里), 각심리(覺心里) 등이 확인되고 있다.
고려 중기 남경의 설치 이후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의 요충지적 성격은 약화되었지만, 1394년 조선 왕조의 한양 천도 이후 도봉구 지역의 입지적 중요성은 다시 부각되었다. 그것은 도봉구 지역이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 지역으로부터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도봉구 지역에 덕해원(德海院)이라는 숙박 시설이 설치되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임진왜란 을 전후한 시기부터 덕해원 대신 누원(樓院), 즉 다락원이라는 명칭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조선 후기 누원 일대에 자생적으로 형성·발전된 누원점은 한양과 함경도 지방을 왕래하는 여행객의 숙식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에서 생산된 물품을 한양 도성으로 공급하는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특히 누원점은 한양 도성 안의 특권적 시전 상인들에 대항하여 상권을 확장한 사상 도고(私商都賈)들의 거점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또한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 1573년(선조 6) 설립된 도봉 서원은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조광조(趙光祖)를 배향하여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던 곳으로, 조선 후기를 지배하였던 사림 세력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17세기 이래로 도봉 서원이 위치한 도봉산 일대에는 유명한 사림 인사들이 방문하여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도 하였다. 즉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은 한양의 동북 관문이라는 지리적 중요성을 넘어서서 사상적·문화적 중심지로서도 중요하게 기능하였던 것이다.
[근대]
1895년에는 양주군이 13도제에 의거하여 경기도의 3등군으로 편성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도봉구 지역에 해당하는 해등촌면이 노원면과 통합하여 양주군 노해면이 되었다. 1914년 경원선 철도가 건설되고 서울~원산 간 도로가 확장·개통되어 도봉구 지역을 경유하면서 도봉구는 농촌을 떠나 서울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대거 이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비록 도봉구 지역은 경성부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간선 도로와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이었으므로 도로와 철도를 따라 마을이 밀집되어 형성되었으며 그러한 경향은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현대]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의 행정 구역 확장으로 고양군 숭인면이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되었고, 1963년에는 현재의 도봉구가 포함된 양주군 노해면이 성북구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61년부터 약 20년간 수유 지구와 창동 지구, 도봉 지구의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이 차례로 진행되면서 도봉구는 도심 지역으로부터 이주하는 인구 및 농촌에서 올라오는 인구를 수용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도봉구에서는 대대적인 정착지 조성 사업이 진행되어 무허가 불량 주택지가 대거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71년에는 북한산 국립 공원 일대가 개발 제한 구역으로 지정되어 과도한 도시 구역 확산을 제어하였고, 1973년에는 드디어 도봉구가 성북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이때 도봉구는 옛 고양군 숭인면과 양주군 노해면의 영역을 포괄하는 인구 65만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1983년에는 북한산 국립 공원이 지정되었고, 1985년에는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었으며, 1986년에는 경원선의 성북~의정부 구간 복선전철화가 시행되었다.
1988년에는 양주군 노해면 시절의 한 축이었던 옛 노원면 영역을 중심으로 노원구가 분리·신설되었으며, 1995년에는 미아동·수유동·번동 등 옛 고양군 숭인면의 영역을 중심으로 강북구가 분리·신설되어 옛 양주군 해등촌면의 영역을 중심으로 쌍문동·방학동·창동·도봉동 등 15개 동을 관할 구역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