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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541
한자 朴德仁-朴德寅
영어음역 Park Deokin
이칭/별칭 박기순(朴基順)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생활·민속/민속,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주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음악가|예술가
아버지 박헌영
박덕희(朴德喜)
아우 박덕춘(朴德春)
아내 김해김씨|진원박씨
출신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 138번지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27년경
몰년 1900년연표보기
본관 밀양
초명 기순(基順)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 출신의 민속예술인.

[개설]

대금산조 창시자 박종기의 부친으로도 유명한 박덕인은 1827년경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 138번지에서 세습무계 박헌영(朴憲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집안의 가업인 무업에 종사한 것으로 간주되며, 김해김씨와 결혼했다가 진원박씨와 재혼한 족보의 내용이 있다. 그러나 박씨 부인이 50여 세에 또 죽자 무업을 파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박덕인이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낸 것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가 1896년 진도로 유배를 갔다가 남긴 『은파유필(恩波濡筆)』에서 굿판에 나타난 특별한 노래쟁이 박덕인(朴德寅)을 소개하면서였다.

[가계]

진도 씻김굿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된 박병천(朴秉千)의 집안에서 큰집 계열인 박병주가 가지고 있는 ‘가승보’에는, 박종기의 아버지가 박기순이 아니라 박덕인으로 적혀 있다.

박덕인은 형 박덕희(朴德喜)와 동생 박덕춘(朴德春)과 함께 박헌영의 아들들이었고, 가승의 박덕희는 족보에 박덕균(朴德均)으로 기재되었다.

박덕희에게는 아들 박종주(朴鍾柱)·박종태(朴鍾泰)·박종림(朴鍾琳), 박덕인에게는 박종현(朴鍾現)·박종기(朴鍾基), 박덕춘에게는 박종수(朴鍾洙)·박종삼(朴鍾三)이 있었다. 이후 박종주는 박호준, 박종태는 박평준, 박종림은 박경준·박철준을 두었고, 박종현은 박판준·박범준, 박종기는 박성준·박천준·박만준·박계준 4형제, 그리고 박종수는 박봉준·박쌍준·박탐준 3형제를, 박종삼은 박동준·박남준·박서준·박북준 4형제를 낳았다.

이로써 박헌영 한 사람이 3대에 걸쳐 27명의 후손을 두었으며, 박헌영의 4대째인 병(秉)자 항렬 21명까지를 포함하면 모두 48명이나 되지만 박병원(朴秉元)의 형 박병권(朴秉權)처럼 가승에 누락되고 족보에 올라 있는 경우도 있으니 일단은 모두 50여 명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여기에 병자 항렬 밑으로 예능에 탁월하거나 수업중인 후손으로는 박병천의 자녀들을 거론할 수 있다. 장남 박한영(현 부산대학교 교수)은 대금연주자로서 이미 명성을 지니고 있으며, 딸 박미옥과 차남 박성운이 씻김굿을 전수하고 있다. 여기에 박한영의 중학생 아들은 이미 대금으로 수상경력을 지녀 이들 또한 틀림없는 희망주로 예상되고 있다. 이와 함께 박병원의 아들은 아쟁을 전공하고 있다.

이와 함께 박덕인의 장남 박종현은 강릉함씨와 결혼하여 진도에서 가장 유명한(아름답고 큰 키에 굿을 잘 하는) 지모[祭母] 박선내를 두었으며, 차남 박범준은 한국국악계의 거성 박병천을 낳았고, 박병천은 아들 박환영과 손자에게 조부의 대금소리를 전수하게 하고 있다.

[생애]

박덕인『은파유필』에 기록되어 있듯이, 1897년 무렵 무정 정만조를 위해 70여 세의 나이로 20년 만에 잔치마당에 나섰다고 했다. 족보에는 출생연대와 관련한 기록이 없고, 재적등본에는 1900년에 사망한 사실이 나타난다.

1897년 무정을 만났을 때 70세였다면 박덕인은 1827년경에 태어나서 1900년 6월 27일에 74세로 세상을 뜬 셈이다.

박덕인에 관한 『은파유필』의 기록이 간략하여, 우선 어디에서 살았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박덕인이 우리나라 대금산조 창시자인 박종기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약간의 기록이 추가되었다. 진도에 구전되어오는 아들 박종기의 생애와 연결되는 부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효자로 이름난 박종기는 다섯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날마다 어머니의 묘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의 아버지 박덕인이 둘째 아들 박종기의 손을 잡고 날마다 아내의 묘를 찾았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아마도 박덕인은, 두 번째로 맞이한 박씨 부인과 함께 아들 박종기를 낳고 살면서 그녀를 무척 사랑했으나, 그녀가 죽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박덕인이 20년 만에 처음으로 무정을 위해 잔치판에 나왔다는 뜻은, 아내가 죽은 뒤로는 전혀 굿판에 나서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박덕인은 부인이 죽자 자기 소유의 판을 외면하고 굿판에 나서는 일을 폐지한 듯싶다. 아마도 부인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날마다 어린 아들 종기를 대리고 그녀의 묘를 찾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위의 초년환경으로 볼 때 아버지 박덕인이 혼자 남은 슬픔을 대금이나 가야금으로 달래어, 어려서부터 악기소리와 더불어 성장한 박종기가 대금산조 창시자가 되었다고 보아진다.

[활동사항]

박덕인의 생시 활동은 무정 정만조『은파유필』에 기록한 내용이 전부이다. 이 기록을 박덕인의 둘째아들 박종기의 구전이나 기록과 연계하여 추정해 보는 것이 한계라고 하겠다.

서두에 약간의 주석을 붙인 무정의 글은 다음과 같다.

贈歌者朴德寅(증가자박덕인: 노래를 부른 박덕인에게 드림)

-노래한 자는 나이 70여인데 가곡에 아속청탁(雅俗淸濁)과 완려애유(緩儷哀愉)에 능숙하였는데 폐지한지 20년이 되었으나 나를 위해서 처음으로 베풀어주었고 또한 무용도 능숙하며 더욱 가야금 및 퉁소에 능하였다 -

여러 해를 절간에서 꽹과리를 익혔으며

날마다 성변에서 노래로 일삼았네

밤새도록 쟁쟁하니 따가웁게 들었었고

하늘에선 풍로(風露)처럼 맑은 가락 나오는군

야산과 흐르는 물 구름따라 어울린데

이원(梨園)에서 문을 닫고 20년을 지냈구나

풍류(風流)에 깃든 정(情)이 늙어서만 아닐진대

사람들이 좋은 가락 모르고 있음이라

옥퉁수 불고 나니 안개구름 서리는 듯

서풍(西風)은 강개(慷慨)한데 술이 많이 취했구려

공산(空山)에 밤이 드니 나그네는 애닲은데

더하여 처절하게 비곡(悲曲)을 울린구나

동풍(東風)이 불어오니 비단창이 그리우며

어느 집의 아해(兒孩)들은 이별도 많다던고

등불 아래 곡(曲)을 듣고 서로가 정신 잃어

하얀 이 붉은 입술 좋은 가락 나온구나

자리는 잠잠하여 떠든 소리 사라지고

미산(眉山)이 움직이고 안파(眼波)만 일어난다

뜰 앞의 화조(花鳥)들은 모두가 졸리는 듯

춘면(春眠)은 한가롭게 느린 반주 나온구나

백일에 발 거두니 소낙비가 지나가고

홀연히 어지럽게 춤춘 모습 아름다워

부는 것과 다룬 것을 뉘라서 분별하리

오로지 영산(靈山)만이 연주곡을 알리로다

강한(江漢)의 노래가락 상(桑)의 잡곡등은

책장마다 남녀들의 원한이 서려있네

조정에는 지금도 진시법(陳詩法)이 있어서

거리에는 민요 있고 항간에는 동요로다

꽃다운 나이에는 금슬(琴瑟)을 탄다는데

악공의 귀밑부리 백설처럼 하얗구나

열두 줄을 조절하여 닭 울음도 내어본데

비 내리는 숲 속에선 초가(楚歌)가 애처롭다

타관 땅을 떠돌면서 자탄하는 신세인데

그럭저럭 좋은 세월 허망하게 보냈구나

문호와 영웅들도 이렇듯 지나가니

차라리 술 마시며 노래일랑 불러보리

위수(渭水)가에 노래한 자 이름이 누구인고

영문(郢門)에서 부른 곡을 화답하여 적었다네.

년조 깊은 악부(樂府)들은 방명(芳名)도 많거니와

내가 지은 가사곡조 그대가 불러보게

(번역 박래호)

[상훈과 추모]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城內里) 군강공원에 있는 무형문화재전수관 마당에는 박종기의 비석이 있다. 비문에 의하면 박종기가 (남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예술을 터득하여 대금명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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