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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읍은 진도군의 중심지이고 성내리는 진도읍의 핵심지이다. 본래 진도읍은 1437년(세종 19)에 부내면이 되었다가 1873년(고종 11)에 진도면으로 개칭되었고, 1979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여러 차례 행정개편이 있었지만 성내리는 읍성의 안쪽에 있다 하여 처음부터 성안 또는 성내로 불렸다. 법정동은 성내리이지만 행정동은 진도초등학교가 있는 성동리와 진도군청, 등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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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城內里)는 현재 행정구역상 진도군 진도읍에 속한 마을이다. 성내리는 성안 또는 줄여 성내라고도 하는데, 성동(城東)마을과 성서(城西)마을을 행정리로 두고 있다. 성내리의 마을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기왕의 동상리(東上里), 동중리(東中里), 동하리(東下里), 서상리(西上里), 서하리(西下里)를 합쳐 성내리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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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강(郡岡)[산] 성안에 있는 산으로 공원이 되었는데, 성이 있다. 성내(城內)[마을] 성내리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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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읍성은 1440년(세종22) 진도고읍성에서 현재의 진도읍으로 진도군의 터전을 옮기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도고읍성에서 현재의 진도읍성으로 치소를 옮기게 된 이유는 세종 때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하 삼도를 비롯한 함경도, 평안도의 읍성축조를 관장한 최윤덕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진도군지』(미간행) 참고). 진도읍 성내리에 있는 산성으로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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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는 성동리와 성서리로 구분된다. 이장도 각 마을별로 있으며, 두 개의 독립된 공동체가 결합되어 있다. 성내리, 특히 성서리는 가구 및 인구 이동이 빈번하고, 변화가 많아 정확한 통계가 어렵다. 따라서 공식적인 통계자료를 활용하여 그 추세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성내리의 가구수는 1968년 조사 당시 285가구였으나, 126가구가 증가하여 2006년 현재 410여 가구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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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을 총회 성동리의 마을 총회는 매년 1월에 개최하고 있으나, 회의 날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2006년의 경우에는 1월 16일에 마을 총회를 개최했다. 마을 총회에서는 지난해의 마을 수입과 지출 등 마을 사업에 대한 감사 결과를 보고하고, 이장 및 마을 임원들을 선출한다. 이장의 임기는 2년이다. 성서리의 경우는 총회 개최가 일정하지 않고, 참석자는 적다. 2006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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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삼현(任三鉉)[1874~1948]: 오위장을 지낸 임경록(任慶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호석(湖石)이며, 1889년 16세가 되던 해에 소치(小癡) 허련(許練)의 제자로 입문하여 그림을 공부했다. 운림산방의 살림을 운영했고, 소치 허련이 1893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의 휘하에서 그림과 글씨를 공부하다 소치의 유언을 따라 운림산방을 관리했다. 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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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도계 : 성동리에만 상도계가 있었는데, 3년 전에 해산했다. 성동리의 상도계는 약 15년 전에 결성되었으나, 젊은이들이 가입을 하지 않아 계속 유지할 수가 없다고 한다. ◦ 성동마을은 200년 전부터 마을의 주요 성씨인 김해김씨, 창녕조씨, 무안박씨, 밀양박씨 등 8현의 영전이 모셔져 있는 향현사(鄕賢祠)에서 함께 제사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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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의 인접마을인 교동리 275번지에 향교가 있으며, 역시 인접마을인 남동리에 진도천주교회와 통일교회가 있다. 한편 성내리에는 진도교회(감리교)와 진도중앙교회가 있다. 그리고 인접마을인 쌍정리에는 원불교 진도교당이 있다. 성동리는 약 30가구가 장로교계 기독교인이고, 3가구 정도가 감리교계 기독인이다. 불교는 10여 가구인데, 진도읍에 소재한 영룡사를 많이 다닌다. 성서리는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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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성내리에 향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인접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젊은이들이 교육을 받았다. 성내리는 진도군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인 국민학교가 처음 개교한 곳이다. 이 국민학교는 진도읍의 다른 국민학교에 비해 약 10년 이상 빨리 개교했으며, 현재에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진도군의 다른 농촌 마을에 비해 성내리는 근대적 교육을 가장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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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실시한 마을조사에 의하면, 성내리의 취업자 산업활동 인구는 총 666명이었다. 남자는 351명이었고, 여자는 315명이었다. 농업,임업,수렵업 종사자가 354명이었는데, 남자보다 여자가 월등하게 많았다(남자 124명, 여자 230명). 제조업 종사자는 총 19명이었는데, 남자는 13명, 여자는 6명으로 농업 관련업과는 반대였다. 전기,가스,수도,위생 시설 서비스업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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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농회 : 영농회는 성동리에만 결성되어 있다. 이 영농회는 1985년에 결성되었으며, 2006년 현재 회원은 63명이다. 월 2회의 모임을 갖고, 영농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한편, 생산 경영에 관한 사안들을 협의한다. 또한 영농회는 마을의 운영에 관한 주요 사항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 작목반 : 성서리에 구기자 작목반이 조직되어 있다. 7명으로 구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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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의 가장 중요한 생산 기반 시설은 상가이다. 상가는 성서리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진도읍 내의 상권은 역사적으로 보면, 성서리에서 남동리와 쌍정리 등으로 확장되었다. 철마광장의 남쪽 경계선에서 남동리의 중심부로 도로가 관통되기 이전만 해도 성서리가 진도읍 상권의 주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도읍 상권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버스터미널의 위치와 이동이었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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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와 남동리 및 쌍정리의 경계도로는 한동안 진도읍에서 가장 넓은 중심도로였다. 그러나 철마광장에서 남동리로 큰 도로가 연장 관통되고, 남동리 일대에 외곽 도로가 개설되면서 중심도로의 기능은 많이 감소되었다. 성내리 주택가 지역은 옛 길이 남아 있고 노후된 가옥들이 있어 차량 통행을 저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성내리에 접한 도로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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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 성동마을은 진도읍 중심가에 위치한 마을로서 비농가가 70%를 차지한다. 전체 270가구에서 230가구가 비농가이고 40가구만이 농사를 짓고 있다. 대부분 관공서에 다니거나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성동마을 내에는 농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인근마을에 농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인근마을의 농지를 임대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재배작목으로는 벼, 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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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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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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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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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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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경로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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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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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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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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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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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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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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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마을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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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는‘진도읍성’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1900년대 초 진도읍성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관청 이외의 건물과 시설들이 하나둘 건립되었다. 물론 진도읍성 내에 관청 및 통치 기구들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읍성들과 마찬가지로 관청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주택을 비롯하여 유지 및 상대적으로 신분과 지위가 높았던 사람들이 입거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내리라는 명칭이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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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읍성은 1987년 1월 15일에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자료 143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은 1440년(세종 22)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의 진도읍성은 성내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군면 고성리에 있었다. 고성리에 있던 진도읍성은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읍성이 조성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이곳은 진도의 치소(治所)로서 기능을 했다. 빈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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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동안 진도의 치소였던 진도읍성이 있던 곳이 성내리인 관계로 이곳에는 진도의 법과 행정, 그리고 공공기관들이 모여 있었다. 진도군의 발전과 더불어 진도읍이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중앙정부의 지방기관들과 각종 공공기관들이 인근 마을인 쌍정리, 남동리, 교동리 등에 신 청사를 건립하여 이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내리에는 여전히 진도군의 법과 행정을 시행하는 다수의 공공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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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진도군청 진도군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시행하는 진도군청은 성내리 64-1번지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곳으로 진도군청이 신축, 이전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전하기 전의 청사는 현 ‘소전미술관’이 있는 성내리 63-1번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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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진도경찰서 진도경찰서는 1910년 9월 16일 목포경찰서 진도주재소가 설치되면서 창립되었고, 1922년 5월 8일에 진도경찰서로 승격되었다. 경찰서 청사는 진도군 객사터였던 성내리 50번지에 있었는데, 약 30평 규모의 일본식 목조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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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그 역할과 기능이 다소 약화되었으나, 성내리는 진도군 경제의 중심이었다. 오늘날에도 철마광장 주변과 과거 철마광장으로 진입하던 주요 도로의 주변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이렇게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까지만 해도 철마광장에서 남강모텔이 들어서 있는 쪽이 진도시장이었다. 이곳에 있던 시장이 남동리로 이주한 것이 196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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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의 특징은 교육 관련 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비록 오늘날에는 성내리 내에 진도초등학교만 있으나, 진도군청 청사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성내리 64-1번지에는 진도중학교와 진도고등학교가 있었다. 따라서 이 일대는 학생들의 이동이 많았다. 게다가 성내리는 진도군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학원가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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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도초등학교 진도초등학교는 1909년 3월 31일 진명 4년제 4학급으로 인가되었고, 같은 해 4월 15일 진도읍 동외리 가마골서 개교했다. 1912년 11월 화재로 교사가 소실됨에 따라 1914년 3월에 현재의 위치인 성내리 54번지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사는 이후에도 수차례 훼손되었다. 이를테면, 1943년 11월의 화재로 교사가 소실된 바 있고, 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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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청이 있던 성내리 63-1번지에는 현재 소전미술관이 있다. 소전미술관은 1977년 3월 구의회 사무실, 즉 현재의 소전미술관 바로 앞 건물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1990년 4월 11일에는 민속유물전시관으로 개관했다. 그리고 1990년 12월 10일에 진도군 문화예술관 관리사무소로 개칭되었다가 2003년 5월 31일에 소전미술관으로 재개칭하여 개관하였다. 본래 이곳은 진도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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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진도군지』에 의하면, 당시 진도에 개원해 있던 의원은 진도읍에만 7개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4개가 성내리에 위치했다. 이 의원들은 진도보건소(1965년 2월 28일 개원), 중앙의원, 자생의원, 홍인의원 등이었다. 약국의 경우에도 진도읍에 총 7개가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4개가 성내리에 있었다. 서울약국, 이화약국, 호남약국, 서약국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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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는 군 단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사회단체의 수가 많은 가장 큰 이유는 문화 및 예술 관련 단체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도군의 시민사회단체들 가운데 많은 단체들이 성내리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성내리는 법과 행정 및 공공 기관들이 위치한 곳일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에게도 선호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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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마을이 속한 고군면은 진도군의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회동마을은 고군면의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첨찰산(尖察山)[485.2m]의 맥이 남남서 방향으로 내려가 두무골재를 지나 덕신산(德神山)[389m]을 이룬다. 점차 고도를 낮추면서 삼재를 만들고 곧장 바다로 내려가 회동재를 건너 동기미봉을 바다에 밀어 놓았다. 이 산줄기가 회동마을의 북서사면을 이룬다. 덕신산 밑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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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알려진 신비의 바닷길은 평상시에는 모래등이 해수면 아래 5~6m 지점에 있어 드러나지 않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큰 사리에 해할(海割) 현상이 발생하는 곳이다. 해할이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섬이 많은 다도해 지역에서 물리 빠지는 썰물 때 주위보다 높은 해저사주가 드러나면서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현상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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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회동마을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으로 꼽는 것이 8개 있는데 이를 회동팔경(回洞八景)이라 한다. 회동팔경은 회동명월(回洞明月), 금호귀범(金湖歸帆), 안암기운(鞍岩起雲), 초평모우(草坪牟牛), 남산호수(南山湖水), 장사낙안(長沙落雁), 송천무학(松川舞鶴), 삼도낙조(三島落照)를 일컫는다. 회동마을은 김 양식선 등 선박 100여 척을 소유한 부촌이다. 현재 회동마을은 신비한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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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回洞)마을은 현재 행정구역상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에 속해 있다. 금계리는 가계리, 금호리, 회동리, 용호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호리와 가계리의 이름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금계리라 명명하였다. 회동마을은 『호구총수』(1789)에 의하면 고군내면(古郡內面) 22개 마을 중 하나였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에 의하면 고일면(古一面) 11개 마을 중 하나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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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마을에는 현재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지명도 많이 있다. 여기에서는 회동마을 주민들이 의사소통 수단으로 부르고 있는 지명까지 수록한다. 지명에 관련된 기술 내용은 『한국지명총람-진도군-』과 박명진[남, 74세, 현 노인회장], 박철준[남, 74세], 장신일[남, 60세] 등 회동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 가인봉, 가연봉[산] : 매봉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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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봉[가인봉, 가연봉], 매봉달[291m] : 이 산은 고군면 금계리와 향동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회동마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회동마을 주민들은 가인봉이나 가연봉보다 가야산 또는 매봉달이라 부른다. 가야산이라 부르는 것은 매봉의 다른 이름인 가연봉·가인봉을 잘못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매봉달의 달은 우리의 옛말 중 달[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모나리[마을] :회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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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골[골] : 『한국지명총람』에는 불당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의 의견은 다르다. 70대의 제보자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60대의 제보자는 뽕할머니 제당 위쪽의 조그마한 골짜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 싹바우[바위] : 뒤까끔 아래쪽에 붙어 있는 바윗덩이를 말한다. 주민들은 싹이 많아서 닭을 못 키울 지경이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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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산[산] :회동마을 가까이에 있는 산을 말한다. 웃동네(가뎃동네← 가운뎃동네) 앞에 있다. 회동마을은 해안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바닷가를 향해 주택이 지어졌으나 앞과 뒤의 방위 개념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마을이 형성된 전면을 앞이라 하나 회동마을은 그렇지 않다. 뒤까끔은 위치상 마을의 옆에 있으며, 앞산은 마을의 뒤쪽에 있는데도 앞산이라 하기 때문이다. ○ 영등살[바닷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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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손동지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 풍파로 호동(지금의 회동마을) 앞바다에 표류하였다. 그리하여 호동마을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게 되었는데 호랑이의 침입이 잦아 호동마을 건너편 모도(茅島)라는 섬으로 피신하면서 뽕 할머니 한 사람을 남겨둔 채 떠나게 되었다. 뽕할머니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 매일 용왕님께 기원하였는데 그해 음력 3월 초 꿈속에 용왕님이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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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도군 수원지가 있는 방죽골부터 동기미까지 형성된 산자락은 말의 형국이라 한다. 이 산자락 끝에 해당하는 땅 이름인 동기미는 말의 머리 부분으로 말이 물을 먹는 형상이라고 한다. 앞산에는 말안장을 뜻하는 안장바위가 있음도 이러한 명칭 유래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동기미 끝자락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데, 이곳에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말이 물을 먹듯이 “꾸르릉, 꾸르릉”하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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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는 회동마을의 서쪽 동네를 가리킨다. 예전에 모나리에는 금호도를 왕래하는 나루터가 있어서 금호도까지 배로 왕래하였다. 하지만 샛바람이 불면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고 오도 가도 못하였다. 금호도와 회동마을을 잇는 정기적인 객선이 없었을 때 모나리에는 불자리가 있었다. 불자리에는 채씨 불자리, 박씨 불자리, 양씨 불자리, 정씨 불자리, 임씨 불자리 등이 있었다. 불자리에 신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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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의에는 정기회의와 대동회의가 있다. 정기회의는 매달 15일에 열린다. 특별한 안건이 없는 경우 방송을 통해서 알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대동회의는 12월 말에 개최된다. 대동회의에서는 이장의 일 년 업무보고, 결산, 임원 선출 등이 이루어진다. 마을조직으로는 청년회, 개발위원, 부녀회, 상부계, 어촌계 등이 있다. 청년회(진흥회)는 18세에서 40세에 해당하는 청년들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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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이전 회동마을 주민들은 조기잡이 중선배를 타거나 선원들에게 나무를 팔아서 생활을 했다. 당시 회동마을에만 10여 척의 조기잡이 중선배가 있었고, 마을 앞 금호도에도 대여섯 척의 중선배가 있었다. 중선배 한 척에는 7~8명의 선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회동마을 주민들의 생계 유지에 큰 역할을 했다. 회동마을에 김 양식이 시작된 것은 1960년 무렵이었다. 장흥에서 이주해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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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마을을 비롯한 모나리, 가계리, 모도리, 원포리 등 진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어촌에는 김 양식이 발달했다. 회동마을은 가구당 100줄로 200때(40m가 한 때로 두 때를 묶어서 양식을 하고 있다)를 양식하고 있다. 9월 초에 김발을 제작하여 중순 무렵까지 포자를 붙인다. 포자는 대여섯 때의 김발을 묶어서 그 위에 포자(김 종자)가 붙은 패각(조개껍질)을 뿌리고 차광막으로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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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확철이 되면 해남, 완도, 강진, 장흥 등의 김 가공업자들은 김을 사기 위해 회동마을을 찾는다. 수협을 통해서 위탁 판매한 김은 중매인을 통해서 가공업자에게 넘겨진다. 김 양식이 활발했던 1980년대 무렵만 해도 8개의 수협이 있었으나 지금은 1개가 운영되고 있다. 진도에서 김이 생산되는 곳은 동남쪽 바다로 갯벌이 발달한 원품리, 회동리, 수품리 등 세 지역이며, 이곳에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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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는 않지만 멸치 낭장망을 하는 가구도 있다. 가계리, 회동마을, 모나리 등 인근 마을의 십여 가구가 낭장망을 통해 멸치를 잡고 있다. 그물을 이용한 고기잡이는 봄에 시작해서 가을까지 계속된다. 회동마을 앞 갯벌에서 조도군도 사이의 바다는 다양한 어종들이 서식하고 산란하는 지역이다. 소형 그물로 고기가 잡힌다는 것은 바다와 갯벌이 양호한 생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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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마을과 모도(茅島)를 잇는 길이 2.8㎞에 너비 약 40~50m의 모래등이 드러나는 신비의 바닷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를 지냈던 피에르 랑디(Pierre Landy)에 의해서이다. 역사와 지리학 분야의 박사였던 피에르 랑디는 진도개를 살피러 왔다가 그 해 4월 회동마을과 의신면 모도 사이의 바닷길이 열리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프랑스 신문에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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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바닷길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에는 더욱 완연하게 드러난다.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광경은 장관이다. 5~6m 수심 아래 잠겨 있던 바닷길이 갈리면서 드러나고 바닷길 양 옆으로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신비롭다. 이 광경은 구약시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실제 진도 지역의 기독교계는 신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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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바닷길은 해마다 음력 3월 초와 보름, 4월 초와 보름, 6월 초와 보름 해질 무렵에 완전하게 구경할 수 있다. 신비의 바닷길은 지난 2004년 5월과 2005년 7월에 가장 크게 열렸었다. 진도군에서는 신비의 바닷길이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달에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를 개최하려고 노력한다. 2004년까지만 해도 영등축제라는 명칭으로 행사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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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마을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김 양식이다. 회동마을에서 김을 양식한 지는 약 30여 년 되었다. 따라서 주민들의 생활은 김 양식 주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김은 양력 9월 초(절기상으로는 백로 경)에 김발에 포자를 부착한다. 포자를 붙이고 나서는 유기산 등 김의 생장을 돕는 약을 한다. 수확은 양력 10월 말부터 이듬해 4월 중순 경까지 가능하다. 김 수확이 끝나면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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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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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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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진도 신비 바닷길 축제(영등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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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경로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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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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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일일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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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복날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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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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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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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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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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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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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바닷길은 자연지리적으로 특이한 해안과 해저지형, 큰 조차와 파랑(波浪), 해류의 흐름, 퇴적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자연현상이다. 진도군 고군면 회동마을과 의신면 모도마을 사이 해저에 발달된 육계사주가 가장 낮을 때 해상에 노출되어 마치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진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1999년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라남도 전역에서 많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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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바닷길 축제의 근간은 영등살 때 회동마을 사람들이 모셨던 영등제에서 찾을 수 있다. 회동마을에서는 영등제를 갯당제라 하였는데, 80여 년 전에 중지되어 현재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영등제는 한국의 농어촌에서 일반적으로 봉사되는 풍신제이며, 영등할머니는 영등제에서 봉사되는 풍신으로 농어촌에서 고루 봉사되는 신격이다. 회동마을 사람들이 영등제를 모신 곳은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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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마을에는 영등축제의 주신인 뽕할머니에 관한 두 편의 설화가 전하는데, 첫 번째 설화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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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는 회동마을, 진도읍, 회동 앞바다의 야외공연장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근래 가계마을에 진도해양생태관이 건립되고, 그 앞으로 넓은 주차장이 있어 다양한 볼거리와 편의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축제는 1978년 처음 시작된 이래 2005년 현재 28회까지 개최되었다. 제1회부터 28회까지 기간과 주요 행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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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처음 개최되었을 때는 4월 15일 뽕할머니의 제사와 의신면 모도초등학교 개교 21주년 운동회로 시작되었으며 만 여 명의 관광객이 참가하였다. 1980년 3회 축제 때에는 이만 여 명의 관광객 중 915명의 외국인 참가하였다. 이때부터 외국 관광객의 방문이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3년 6회 축제 때에는 「영등살이」 영화 촬영을 하여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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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03년부터는 축제기간이 4일로 확대되면서 다양하고 이채로운 프로그램이 선보인다. 뽕할머니 제사, 민속공연 외에도 영등살놀이라 하여 뗏목놀이, 용왕제, 뽕할머니 만남기원 및 농악놀이, 바닷길 대영합회, 뽕할머니 상봉, 뽕할머니 씻김 등을 개최하여 뽕할머니전설을 재현하였다. 그리고 찾아가는 박물관, 축하 비행, 해상 선박퍼레이드, 바닷길 불꽃축제, 진도닻배놀이 시연, 향토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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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면 회동마을에서 모도마을까지 물길이 열린다. 행정구역상으로 회동마을은 고군면에 속하고 모도마을은 의신면에 속한다. 모도마을은 회동마을에서 배를 타고 10여 분이면 도착하는 비교적 가까운 섬마을이다. 그러나 회동마을에서 보면 모도마을은 배를 이용해야만 갈 수 있으므로 가까우면서도 먼 이웃이기도 하였다. 과거 바닷길이 열릴 때면 회동마을과 모도마을 사람들은 바닷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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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도마을 당제는 2005년 7월 2일, 2006년 7월 7일(금) 2차에 걸쳐 조사하였다. 제보자는 김유형[남, 77세], 김병헌[남, 62세], 김복윤[남, 61세], 노강준[남, 52세] 등이다. 모도마을 중심부 위쪽에는 울창한 나무숲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당할머니를 모시는 당집이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당할머니를 뽕할머니라 부르고 있으나 원래는 당할머니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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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모시는 날인 정월 초이튿날이 되면 각 가정에서 한 사람씩 동원되어 당집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당집 올라가는 계단 양 옆으로 황토를 조금씩 놓아둔다. 그리고 제관은 자신의 집에서 제물을 장만한다. 예전에는 제관들이 오전부터 당에 올라가서 직접 제물을 장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집에서 제물을 장만한 뒤 제의 시간에 맞춰서 제관이 가지고 올라간다. 제물을 장만할 때는 함부로 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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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집에서 제가 끝난 뒤 제관은 정월 초사흗날 새벽에 다시 독샘에서 제를 모신다. 미리 제물을 장만하여 독샘 앞 바닥에 차려놓는다. 이때에는 당집에 올린 제물 외에 돼지머리도 함께 올려놓는다. 예전에는 거리제 모실 시간이 되면 각 가정에서는 부녀자들이 나물 한 그릇, 수저 한 벌, 빈 밥그릇을 놓은 상을 가지고 나온다. 그러면 제관이 미리 밥을 해가지고 와서 일일이 빈 밥그릇에 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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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제에 관한 몇 가지의 영험담이 있다. 첫 번째로 어떤 마을 사람이 당집 주변에서 캔 칡을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그날 밤 그 칡을 다시 갖다 놓으라는 꿈을 꾸고 나서 칡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두 번째로 아들 얻기를 원하는 사람이 당제를 모신 뒤에 아들을 얻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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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를 마친 뒤에는 축제에 대해 평가하고 방문객을 분석하여 다음 축제의 발전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26회부터 28회까지의 평가보고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003년 26회 축제 평가보고서에서는 향후 발전 과제로, 개막식 행사 및 진도읍내 축제 분위기 활성화, 체험관광 활성화, 행사장 주변 사유지 매입 추진, 영등살놀이 씻김굿 무대 시설, 한국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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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내용과 관련하여 조언을 하자면, 첫째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는 해마다 많은 일본인들이 단체로 방문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서는 철저한 눈높이 서비스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지역 이미지를 판매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프로그램 구성면에 있어서도 어설픈 흉내는 지양해야 한다. 특히 공연과 경연 등의 행사 프로그램은 진도의 정신과 혼이 들어간 행사로 바뀌어야 한다.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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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회동마을은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로 인해 제법 알려진 마을이 되었다. 28년간 축제가 계속되는 동안 회동마을 사람들의 역할은 초기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으나 마을 사람들에게 파생되는 사회문화적 인식과 경제적 파급 효과는 컸을 것으로 보인다. 외국 언론의 역할은 축제가 활성화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축제가 지속적으로 개최되기까지 회동마을, 진도군청, 지역인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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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리(龍藏里)하면 한자로 용을 품는다 또는 감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용은 예로부터 임금을 상징하는 말이다. 한양도성에서 천리 먼 길 떨어진 이곳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군지에는 1772년 남양홍씨가 처음 입향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995년(성종 14)에 진도군을 옥주군(沃州郡)으로 개칭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옥주를 다시 진도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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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리(龍藏里)는 현재 행정구역상 진도군 군내면 속해 있다. 용장리는 법정리이며 동시에 행정리이기도 하다. 용장리는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기왕의 용장리에 세등리 일부를 병합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장리는『호구총수』(1789)의 기록에 의하면 진도군 군내면(郡內面) 27개 마을 중의 하나였다. 이 자료에는 용정리(龍井里)로 마을 명칭이 나타난다. 이는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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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에 관련된 기술 내용은 『지명총람』(진도군)과 용장마을에서 제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며, 용장마을 이장인 곽재설(남, 64세) 씨와의 직접 면담조사 및 현장조사를 통해 작성되었다. 관청골[골] 삼별초 당시 삼별초군의 관공서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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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오룡장주(五龍藏珠), 오룡재주(午龍爭珠) 이야기 옛날부터 군내면 용장리 경내는 오룡이 장주(藏珠)하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고 전해오고 있었다. 약 200년 전에 일지승(一指僧)이란 이름난 도승(道僧)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진도로 들어왔다가 노환이 생겨 진도읍내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는데 모두 못 본 척하였다. 그러나 조그마한 여막(旅幕) 집을 경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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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수와 인구수는 표1 과 같이 여느 농촌과 다름없이 꾸준히 감소했다. 1968년에 134가구였으나, 37년 만에 54가구가 감소하여 2005년 현재 80가구(주민등록상)가 거주하고 있다. 최근 10년간은 감소 추이가 둔화되고 있으나, 여전히 줄고 있다. 가구수 감소와 비례하여 마을 인구도 대폭 감소하여 1968년에 688명이었으나, 522명이 감소하여 2005년 현재 16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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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장리의 운영 조직 -그림- 용장리 운영의 조직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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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당시의 동안(洞案)으로 보면, 박씨 36가구, 곽씨 20가구, 홍씨 16가구, 김씨 10가구, 조씨 6가구, 양씨 6가구, 하씨 5가구, 이씨 2가구 등 총 101가구였다. 2005년 12월 현재 행정상의 기준인 75세대를 대상으로 성별 세대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많은 성씨 순으로 정리하면, 박씨 29세대, 곽씨 21세대, 조씨 8세대, 김씨 6세대, 고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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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리와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밀양박씨(密陽 朴氏): 곽윤배(郭允培)[본관 현풍]의 처로 청상과부가 되었으나, 수절하면서 자식들을 잘 키워 집안을 일으켰다. 열녀로 칭송되어 동리에 비가 세워졌다. 군내면 세등치에 있는 삼강비에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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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지침 : 용장리는 마을 주민의 삶의 지침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리하여 마을 회관에 게재하였다. ①경노·효친을 우선합니다. ②서로 사랑하며 친절합니다. ③모범인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④마을일에 헌신 참여합니다. ◦ 상도계(喪徒契) : 용장리에는 6개의 상도계(喪徒契)가 반별 등을 기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마을 구성원이 점차 감소하고, 각 상도계들이 각자 운영되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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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서당터’라는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마을에 유서 깊은 서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하에서의 서당 교육은 파악할 수 없으나, 해방 뒤에는 마을의 서당이 있었다. 야학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1955년과 1956년에 동네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는 활동이 있었다. 초등학교는 처음에는 주로 군내초등학교를 다녔다. 한국전쟁 이후 고군면에 오룡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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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쌀을 재배하는 논농사의 경우 휴경 농지를 신청하는 가구수가 늘어나고 있고, 이에 비례하여 경작 면적도 감소 추세이다. 밭농사는 고추, 배추, 대파를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2004년의 경우 평당 판매가가 폭락하여 재배 작물을 폐기하거나 헐값으로 매도하였다. 1968년에 실시한 마을조사에 의하면, 취업자 산업활동 인구를 대상으로 할 때 농업·임업·수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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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수지 : 1969년 11월 20일에 마을 저수지인 용장제가 준공되었다. 용장제는 마을 동편에 위치해 있다. 몽이 면적이 15㏊이고 저수량은 45,060t이다. 농업용수로는 4월, 5월, 7월에 군내면 차원에서 또는 마을 차원에서 청소 및 정비를 하고 있다(2005년 기준). 2005년 5월 19일에 마을의 숙원사업이던 기존 용수로 철거 및 확장 신설 사업(저수지에서 큰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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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농업은 농기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농기계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농기계를 소유한 사람이 일정한 금액을 받고 관련 농사를 대신해 주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농기계를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 경우, 군내면의 공시 임대 가격을 준수하고 있다. 2006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경지면적 100평당 쟁기의 경우 밭 전용은 15,000원, 논 전용은 10,000원,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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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 : 용장리로 진입하는 도로는 801번 지방도이다. 18번 국도와 연결되어 용장산성 내부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마을 안길의 도로는 차량 통행이 힘들 정도로 좁다. 최근 마을 안길 흙담을 철거하고, 블록 담을 개축하고 있다. ◦ 교량 : 교량으로는 용장교(龍藏橋)가 있다. 용장교는 도로 벽파선(碧波線)에 놓여 있다. 1925년에 혼응토조(混凝土造)로 도로 확장과 동시에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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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마을은 역사와 유래가 깊은 마을이며 현재에도 70가구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 비교적 큰 마을이다. 주민들의 주요소득원은 벼농사와 대파, 월동배추 재배 등 농업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생활도 농사 주기에 맞추어져 있다.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하는 행사로는 망제, 경로잔치, 동계가 있다. 망제는 음력 1월 14일에 마을의 안녕과 농작물이 잘 자라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내는 마을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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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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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출향형제 귀향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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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정기적인 행사는 아니지만 농삿일이 한가한 이 달에 관광을 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돈을 내기도 하고 마을기금으로 다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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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경로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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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면민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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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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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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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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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추석노래자랑콩쿠르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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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없음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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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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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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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성장한 몽고(蒙古)와 같은 유목민족의 가장 중요한 정복대상은 남쪽의 농경민족이었다. 농경민족들이 지니는 풍부한 생산품이 그 구미를 돋우어 준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금(金)·송(宋)과 함께 고려도 몽고의 침략 대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을 치고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을 정복하기 위한 기지를 구하려는 목적도 몽고가 고려에 침략의 손길을 뻗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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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三別抄)는 최씨 무인정권에 의해서 창설된 군사조직이었다. 야간순찰과 같은 공적(公的)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라는 게 그 명분이었다. 그 시초는 최씨정권의 제2대 집권자인 최이가 수도의 치안을 빙자해서 창설한 야별초(夜別抄)라는 특수부대였다. 무인의 일당인 악소(惡少)의 무리들이 날뛰지 못하도록 막아 그 정권을 공고히 할 목적에서였다. 이 야별초가 후에 소속 군인 숫자의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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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반개경정부(反開京政府) 그리고 반몽고(反蒙古)의 노선을 표방하며 거사하였다. 1270년(원종 11) 6월 초하루의 일이었다. 앞서 같은 해 5월 23일에 재상들이 회의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하자 삼별초는 그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킬 속셈을 처음 드러냈었다. “재추(宰樞)가 모여 옛 서울로 돌아갈 것을 의논하고 날을 정하여 방(榜)을 붙이니, 삼별초가 딴 마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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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삼별초정권은, 이를 나위조차 없는 일이지만, 반몽(反蒙)을 기치로 내세웠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배중손이 노영희 등과 더불어 변란을 일으키고서는,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외치기를 몽고 군사가 크게 이르러 인민(人民)을 마구 죽여 대니, 무릇 나라에 힘이 되고자 하는 이는 모두 격구장(擊毬場)으로 모여라’라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들었는데,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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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삼별초정권이 조운로(漕運路)를 장악하자 개경정부의 재정상태는 곤핍을 극하게 되었다. 당장 시급한 군량(軍糧)조차 제대로 맞춰서 대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하루 빨리 진도 를 되찾는 것이 개경정부 존립의 관건이었던 셈이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도 삼별초와 남송의 동맹을 방지하고 또한 일본을 정복하려는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도 를 점령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8월에 개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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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곧바로 새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도성인 용장성(龍藏城)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둘러싼 용장산성(龍藏山城)의 안쪽, 즉 현재의 용장리 일원이 그곳이다. 여기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변의 고인돌 등으로 미루어 늦어도 청동기시대 즈음에 주민이 거주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후 삼국을 거쳐 고려와 조선에 이르도록 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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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덕병리는 덕저리, 떡저리, 또는 덕병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건너편 금골산 남서자락의 용인리와 달마산 건너편의 한의리를 합쳐서 법정리명인 덕병리로 병합했다. 그러나 장승이 서있는 마을로 당산제를 모시는 곳은 바로 석장승이 있는 덕병마을이다. 1400년경 처음 마씨가 시거했고, 그후 밀양 손씨들의 증손들이 들어와서 퍼졌으며, 경주 최씨, 신안 주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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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병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의 법정리이다. 또한 법정마을 덕병리의 행정리 명칭이기도 하다. 법정리인 덕병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기왕의 용인리(龍仁里)와 한의리(寒衣里), 덕병리 일부를 합쳐 이루어진 마을이다. 행정구역 개편 때 자연마을 덕병리의 일부는 둔전리(屯田里)로 병합되기도 하였다. 덕병리는『호구총수』(1789)의 기록에 의하면 진도군 군내면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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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에 관련된 기술 내용은 『지명총람』(진도군)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이병일(남, 76세, 덕병 노인회장) 씨와의 면담조사 및 현장조사를 통해 작성되었다. 이 항의 내용은 행정리로서 덕병리에 있는 지명만을 대상으로 기술하였다. 가심재[고개] 덕병에서 분토리의 분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옛날에 전통혼례를 치르면서 가마를 타고 분산마을 쪽으로 넘어가야 할 때에도 이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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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현재 덕병리는 102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인구는 남자 108명, 여자 117명이다. 덕병리는 행정리로, 덕병마을은 물론 용인과 한의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 마을들은 백조도래지인 나리방조제를 둘러싸고 있다. 이곳 나리방조제를 막기 전까지 용인마을은 염전을, 한의마을은 김 양식을 많이 했던 어촌마을이었고, 덕병마을도 바지락과 낙지 잡이 등이 많이 이루어졌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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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병리의 마을 임원으로는 이장, 개발위원, 청년회, 부녀회, 반장 등이 있다. 또 마을회의로는 연말결산총회 격인 동계, 이장이 필요시 개최하는 정기회의, 임원회의 등이 있다. 동계와 정기회의는 마을주민들 모두가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며, 임원회의는 마을원로, 반장(다섯 명), 노인회장, 부인회장이 참석한다. 마을 운영과 관련된 경미한 일은 대부분 임원회의에서 결정한다. 동계는 연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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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에는 갯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솔목'이라고 부르는 이 방풍림은 어느 시기에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나무, 팽나무 특히 대나무가 많았다. 그리고 바다 쪽으로는 모래사장이 발달해 학생들의 대표적인 소풍 장소였고 놀이터였다. 이곳 방풍림을 지키는 일은 구장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이었다. 나무가 귀하던 시절에 방풍림을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홍역을 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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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병리는 진도의 대표적인 갯벌이 있는 어촌마을이었다. 무안과 목포의 낙지잡이 전문가들이 와서 낙지를 잡아갈 정도였다. 고막, 바지락을 캐고, 운저리(표준어로는 문절망둑이 맞으나 이 지역에서는 운저리라 부름)을 잡아 읍내 장에 팔고 반찬을 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덕병에서 용인으로 잇는 원을 막았다. 그리고 2000년대에 덕병을 둘러싼 마을 한의와 내리를 막는 방조제가 완공되어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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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의 모든 원수는 저수지에서 취수하고 있으므로, 덕병리 역시 취수탑을 통한 취수형태를 취하고 있다. 진도군의 취수지는 4개의 수원지에서 취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회동수원지는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에 위치하고 있고, 제방의 규모는 길이는 232m이고 높이는 24.5m이다. 시설용량은 861㎦이고 급수구역은 진도읍 지역이다. 녹진수원지는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에 위치하고 있고, 제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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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병마을은 마을 앞으로 넓은 들을 끼고 있는 농촌마을이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농사와 밭농사 등 농업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생활도 농사 주기에 맞추어져 있다. 주요 작물은 벼, 대파, 월동배추, 담배, 고추 등이다. 주민들은 기계화 등의 요인으로 인해 농사주기가 갈수록 앞당겨지고 있다고 하였다. 덕병마을은 아직도 마을 공동으로 하는 행사가 많다. 음력 1월 14일 밤에 모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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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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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망제(望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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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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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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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경로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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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면민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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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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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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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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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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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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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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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마을로는 보기 드물게 북향을 하고 앉은 덕병마을은 앞쪽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수백년간 그 들판을 삶의 터전으로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시사철 땀을 흘려왔는지 모른다. 농촌에 전해지는 속담에 따르면 2월 초하루면 농부가 썩은 새끼줄을 들고 뒷산에 목매달아 죽으러 오른다고 한다. 농사가 시작되는 철이면 농부들에게는 고행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다. 한여름 뙤약볕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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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들에 나가면 농부요, 집안에 들어오면 부모이다. 그들은 애를 써서 들에서는 곡식을 키우고 집에서는 자식을 키우지만,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탄생과 성장은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연의 저 쪽에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있어서 그 힘에 의존하지 않고는 들판의 곡식도 집안의 자식도 제대로 키울 수 없다. 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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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정월 대보름에 덕병마을에서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동제를 모셔오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력으로 정월 14일 제반 준비를 끝내고 저녁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마을사람들이 합심하여 마을신들께 제사를 올린다. 전라도에서 동제를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당산제(堂山祭) 또는 당제(堂祭)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역에 따라 구별이 되는데, 내륙지역은 당산제라고 부르는 곳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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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문화재의 도난이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골동품의 값이 오르면서 문화재급의 유물들이 도심(盜心)에 노출되어버렸다. 예술품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전 같으면 경외의 대상이었던 신앙유물마저도 도난을 당하는 예들이 많다고 한다. 문중의 고문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찰의 탱화나 묘 앞의 문인석 등도 문화재청에 도난신고가 된 예가 허다하다. 덕병마을에는 언제 세운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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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제를 올리기 위해서는 제관을 뽑는다. 예전에 제주를 담아 제사를 모실 때는 약 5일 전에 제관을 선정하여 술을 앉히도록 하였지만, 지금은 소주를 사다 제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13일 경에 정한다. 요즈음은 2명의 제관을 뽑는다. 본래 3명이 맡았으나 사람들이 제관 맡기를 꺼리기 때문에 2명으로 줄였다. 매년 제관은 새로 뽑는다. 아무나 제관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의 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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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제는 매년 정기적으로 모시기 때문에 정월이 되면 이장을 중심으로 망제를 올리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예전에 제주(祭酒)를 제관의 집에서 만들어 썼을 때는 최소한 망제를 모시기 5일 전부터 준비와 금기기간이 시작되었다. 제주는 몇 동이를 앉힌다. 제사를 지낼 때는 맑은 청주를 떠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망제 다음날 마을사람들이 모여 총회를 할 때 함께 나누어 마신다. 예전에 세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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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제를 모시기 위해 14일 아침부터 바쁘다. 이장을 중심으로 제사를 모실 곳을 청소하고, 필요한 설비를 하게 된다. 아침나절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당집을 청소한다. 당집 주변과 당집 안을 깨끗이 쓸어 청소를 하고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깐다. 그리고는 거리제를 모실 마을의 삼거리길로 간다. 역시 주변을 청소하며 여기에 차일을 친다. 차일은 네 기둥을 세우는 대신에 바람이 통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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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제를 모시기에 앞서 마을에서는 굿을 치기 위해 농악대가 꾸려진다. 농악대에도 역시 스스로 깨끗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여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굿물을 들고 농악을 치고 다녔지만 요즈음은 극히 소수, 때로는 3인 정도만이 참여하여 흉내만 낼 때도 있다고 한다. 초저녁부터 농악은 시작된다. 이때는 농악이 아니라 제례악으로서 굿물이 쳐진다. 우선 마을회관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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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정월 14일 밤 10시경에 당집에서 당할머니에게 당제를 모셨다. 지금은 시간을 앞당겨 8시 30분경에 시작한다. 제물을 마련한 제관의 집에서 굿을 치는 사람들을 앞세우고 제물을 들고 당집을 향한다. 예전에는 당집 앞에 수령 250년 정도의 큰 팽나무가 있었는데, 태풍에 넘어져 죽고 지금은 가정집 담장 안에 당집만 남았다. 당집은 1평 정도로 시멘트집에 양철지붕을 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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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집에서 제사가 끝나면 다시 제관 일행은 굿을 치는 사람들과 더불어 마을 앞 삼거리 길에 차일을 쳐둔 거릿제터로 향한다. 예전에는 이때 마을길 양쪽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왔으며, 길굿을 멋있게 치고 놀았다 하는데 요즈음은 구경을 나온 마을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차일 속에는 거리신에게 바칠 제상을 차린다. 과일과 나물, 메와 국, 그리고 제주 등 간단하다. 거릿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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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의 일차적인 기능은 잡귀의 침입을 막는 것이다. 마을 입구나 사찰 입구에 세우는 장승은 나무로 만든 목장승과 돌로 만든 석장승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일차적인 기능은 나뿐 액이나 잡귀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지역수호신적 역할이다. 덕병마을 역시 마을 사람들은 장승이 전염병을 막아주고 나쁜 귀신이 마을에 침입하는 것을 또한 막아준다고 믿고 있다. 장승의 목에는 이미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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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제와 관련되어 그 영험을 물었더니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복받은 사람은 없어도 해을 입은 사람은 많다고 대답했다. 궁극적으로 망제는 복을 받기 위해 모시지만, 그러기 위해서 더욱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올렸으며, 망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구전이 마을에 전해오고 있다. 마을사람들에게 당할머니가 때때로 꿈에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망제를 더 이상 모시지 말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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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제가 끝난 후, 정월 대보름날 오전에 마을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마을총회를 연다. 이장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의 일을 협의하고, 임기가 되면 새로 이장도 선출할 수 있으며, 특히 망제를 결산하게 된다. 총회를 하면서 나누어먹기 위해 음식을 다소 넉넉히 준비해둔다. 마을회관에 모인 사람들은 총회를 하면서 술을 한 잔씩 돌리고 준비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50여년 전에 없어진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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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절기의 마을신앙이 망제로 모셔진다면, 하절기에 모시는 마을신앙은 충제이다. 지금까지도 매년 제관을 뽑고 제물을 장만하여 음력으로 6월 1일이 되면 마을에서는 충제를 모셔오고 있다. 제관을 뽑을 때 생기복덕을 보아서 연령에 맞는 사람 중 두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대문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아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제사 비용은 마을자금으로 충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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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특이한 마을민속 중의 하나는 도깨비굿이다. 덕병마을 말고도 예전에는 많은 마을들에서 도깨비굿을 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도깨비굿은 정기적으로 하는 경우와 비정기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정기적인 경우는 매년 정월 14일날 밤에 행해지는 것이며, 비정기적인 경우는 전염병이 돌 때 하는 것이다. 마을에 따라서는 정기적으로 하는 곳도 있지만, 덕병마을에서는 전염병이 돌 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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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로 보아 마을이 허한 곳과 강한 곳이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풍수지리로 보자면 뒤에는 산이 자리잡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가 전통적인 마을의 전형이다. 그리고 산들도 주산(主山), 진산(鎭山), 안산(案山) 등이 있어 마을을 보호한다. 마을의 뒷산이 좌청룡 우백호의 모습이면 더욱 좋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풍수지리적 요소들 중에 혹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인공물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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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리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내가 비껴 흐르므로 비끼내, 또는 빗내라고도 하고, 이를 한자로 사천(斜川)으로 표기한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상리와 사하리, 논수동을 합쳐 지금의 사천리가 되었다. 진도읍에서 군도9호를 따라 왕무덤재를 넘어서, 논수동에서 좌측으로 군도15호를 따라가면 나오는 사천리는, 진도읍 남동방향으로 직선거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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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리(斜上里)는 현재 행정구역상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 속해 있는 마을이다. 사상마을의 법정리인 사천리(斜川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기왕의 사상리와 사하리, 영산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명명된 마을로, 이때 의신면에 편입되었다. 사상마을은 사천마을에서 분화되었다. 현재 사천마을은 ‘빗끼내, 빗내’로도 불린다. 『호구총수』(1789)에 보면 사천마을은 의신면(義新面) 사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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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에 관련된 기술 내용은 『지명총람』(진도군)과 『사상마을지』를 기본 자료로 하여 작성하였고, 이희춘(남, 사상마을 새마을지도자) 씨의 도움을 받았다. (골 /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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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당산제에 얽힌 이야기 빗기내 당산제를 모시던 당산목은 수백 년 된 팽나무로 100여 년 전에 고목 밑부분이 썩어 바람에 쓰러져 고사되었다. 썩어 있던 팽나무에서 버섯이 나와서 최석 씨의 할아버지인 최광윤(당시 30세) 씨가 그 버섯을 따먹고 정신이 이상해져 ‘버섯 버섯’하고 다니다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 자리에 다시 팽나무가 자라나 그 당산목에 해마다 제를 모신다. 그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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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수와 인구수는 (표 1)과 같이, 감소하기는 했으나 농촌의 일반적 추이에 비하면 완만한 감소라고 할 수 있다. 가구수는 1968년 조사에서는 79가구였는데, 2005년 현재에는 63가구(주민등록상)로 조사되어,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다. 최근 10년 사이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구는 크게 줄었다. 1968년에는 463명이었으나, 313명이 줄어들어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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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을 총회(대동계) 대동계는 진도의 최고 의결기구이다. 대동계 의장은 마을 이장이 겸직한다. 회의는 매년 12월 22일 동짓날 개최되며, 1년 동안의 마을 수입금과 지출금을 결산 보고하는 것이 주요 안건이다. 또한 이 모임에서 새로운 이장을 선출한다. 2001년 이전에는 이장의 임기가 1년이었으나, 이후에는 2년으로 늘어났다. 이장세는 춘곡과 추곡 때 일정량의 보리와 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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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림산방과 남종화풍 화맥 진도에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소치(小痴) 허련(許練)[1808~1893]이 설치한 화실이다. 허련은 조선 말기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등과 더불어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에서 서화를 공부했다. 이를 통해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읽혀 남종화풍을 토착화시킨 화가이다. 그는 1856년 운림산방을 개설하고, 제작활동에 몰두했다. 그의 화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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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인접한 이웃끼리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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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당 마을 단위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던 서당은 조선 말기 3대 한학자이자 진도의 최후 유배자인 무정 정만조(鄭萬朝)[1858~1936]가 소치 선생의 아들인 미산 선생의 청에 의해 훈장으로 부임하면서 개설되었다. 이 서당의 명칭은 관란제(觀瀾齊)라고 칭했는데, 이는 흐르는 물의 순리를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관란제는 현재의 서당골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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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실시한 마을조사에서 의하면, 취업자 산업활동 인구를 대상으로 할 때 농업,임업,수렵업 종사자는 남자가 122명, 여자가 123명으로 총 245명이었다. 서비스업 종사자가 남자 2명이었고, 거의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6년 2월 현재는 농가가 30가구, 비농가가 29가구로 크게 바뀌었다. 그리고 농업인은 82명이고, 비농업인은 36명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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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목반 현재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가구는 7가구이다. 작목반은 구성되지 않았고, 재배를 많이 한 사람이 수합하여 출하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구기자 재배 농가는 현재 12가구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운림천 작목반을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구기자 병충해(탄저병)가 돌기 시작하면서 수확량이 감소하고, 일손이 많이 필요해서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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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수지 : 1968~1969년경 한해가 들자 국비로 ‘사천제’라는 명칭으로 완공했다. 완공 이후 마을에서 운영했으나, 몇 해 되지 않아 홍수로 저수지가 훼손되었다. 저수지를 보수하기 위해서는 백 몇십만 원의 보수비가 필요했으나, 이를 부담하기 어려워 관리 및 운영권을 농조로 넘겼다. 사천제는 몽리면적이 31㏊이고, 92,228t을 저장할 수 있는데, 사천 제1저수지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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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 : 진도는 진도군의 초고봉인 첨찰산 기슭 서남쪽의 의신천 상류 하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어서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교통이 쉽게 차단되곤 했다. 교통난을 해결하기 위해 도로 개설과 관련된 부역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주요 도로는 ‘사천선(斜川線)’이다. 이 도로는 1940년에 개통되었는데, 논수동(論水洞)을 기점으로 하여 쌍계사(雙溪寺)를 종점으로 했다. 1982년 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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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리 사상마을은 여느 마을에 비해 마을행사가 많은 편이다.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를 시작으로 음력 1월 15일에 열리는 정월대보름 세시풍속 놀이, 5월의 경로잔치, 추석날의 한가위 노래자랑, 12월의 동계와 김장 나누기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이러한 행사들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데에는 사상마을 청년회와 새마을봉사대의 역할이 큰 것으로 보인다. 마을행사와 관련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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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새해 해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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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정월대보름 세시풍속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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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 없음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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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 없음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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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경로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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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 없음 (2) 세시풍속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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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 없음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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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없음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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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한가위노래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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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 없음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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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효도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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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행사 -총회(대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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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시대인 오늘날 우리 삶에 있어 그림과 글씨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중국 춘추시대 대사상가로 유교의 개조인 공자(기원전 551~479)는 종이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논어』에서 ‘흰 바탕을 칠한 뒤 그림을 그리는 것[繪事後素]’을 이야기했고 『주례(周禮)』에서도 ‘무릇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칠한 뒤에 한다[凡畵繪之事後素功]’는 언급이 보인다. 새하얀 종이와 검은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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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거하듯 영원한 승자는 없다. 그것은 마치 유아기에서 노년에 이르는 인체의 변화와도 다를 바 없다.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 번성이 있으면 절정에 이어 쇠락이 따른다. 조선왕조의 끝자락인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까지 60년 남짓한 시기를 미술사학자들에 따라서는, 3분법에서는 18세기와 함께 후기에 포함시키거나, 세분한 4분법에서는 조선 말기 화단으로 분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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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확인되거나 알려져 있던 화단에서의 명성과는 별개로 조선 말기 화단에 있어 새롭게 조명된 매우 긍정적이며 값진 연구 성과와 업적의 예로 김수철과 홍세섭의 발굴을 들 수 있다. 이들에 대해선 일찍이 해방 후 한국미술사 연구의 일세대로 한국미술사 특히 회화사에 있어 전통적인 감식안(鑑識眼)을 바탕으로 초석을 세운 최순우(崔淳雨)[1916~1984], 이동주(李東洲)[19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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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련의 한 세대 후배이면서 상반된 성격이지만, 조선 말기 화단에서 중앙에서 활동이 두드러진 장승업은 조선왕조 전체를 통해 뽑힌 3대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큰 반대가 없긴 하지만, 이와 같은 오원 신화에 대해 이견이 없는 바는 아니다. 불과 백 여 년 전에 활동한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한 편은 아니며, 꽤나 신비화된 감도 없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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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깊은 산중에 있어 매번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면 푸른 이끼는 들에 깔리고 떨어진 꽃은 길바닥에 가득하다. 사립문에는 사람 발자국 소리가 없고 소나무 그림자는 길고 짧으며 새 소리는 오르내려 낮잠도 만족한다. 이윽고 샘물 길어와 솔가지 주어다 차를 다려 마신다. 생각나는 대로 주역, 국풍, 좌씨전, 이소, 태사공서와 도연명과 두자미의 시, 한유와 소식의 글 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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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련의 긴 화맥은 제자와 집안의 대물림으로 오늘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다른 지역과 구별된다. 남도라는 지역과 조선 말기라는 지리적,시간적 범위를 넘어 20세기 근,현대로 이어진다. 대원군에게서 미방(米舫)이라는 호를 하사받은 김익로(金益魯)[1845~1915]는 소치와 초의에게 그림을 배웠다. 소치의 넷째 아들 허형은 일찍 타계한 형의 호인 미산(米山)을 물려받았다. 그는 화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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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회화의 바른 이해에 있어 넘어야 할 산과 선결되어야 할 어려운 점은 한 둘이 아니다. 이 중에서도 힘든 난제의 하나는 우리의 단절되고 달라진 미감에 대한 인식이다. 문인화 이해의 코드이기도 한 격조와 기량의 상관관계를 들 수 있다. 시차에 따른 사고와 심미안의 차이는 잠시 논외로 하더라도 격조라 하는 것은 기실 가시적으로 표현되어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화가의 내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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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시마을은 진도군 서남부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석교리의 한 마을로, 절대적 위치는 남위 34도 24분 38초와 동경 126도 11분 29초 지점(마을회관)에 해당한다. 임회면과 지산면의 경계지점으로 임회면에서는 서쪽의 중앙지점이고, 동쪽의 지산면에서는 서쪽 끝 경계지점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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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시마을은 현재 행정구역상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에 속해 있다. 석교리는 본래 진도군 임이면(臨二面)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돌다리가 있다고 하여 독다리, 또는 석교로 불렸다. 『호구총수』(1789)에는 석교리가 임회면(臨淮面)에 속하며, 상석교리(上石橋里)와 하석교리(下石橋里)로 나누어져 있다. 또한 석교의 지명과 관련된 석교장(石橋場)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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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터[시장]:새장터가 형성되기 이전의 장터로, 새장터가 생기면서 구장터로 부르고 있다. 현재도 새장터와 함께 4일과 10일에 장이 선다. 콧대바위[산]:봉화산을 달리 이렇게도 부른다. 봉화산의 정상에 바위무더기가 있는데, 바위를 아우른 산의 형상이 사람의 콧대처럼 생겼다고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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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회면 십일시마을은 석교리에 포함된 행정리의 하나이다. 석교리는 십일시, 고방, 석교, 구분실을 포함한 법정리의 명칭이다. 따라서 석교리라는 명칭은 때로는 행정리로, 때로는 법정리로 사용되고 있다. 십일시마을은 임회면의 중심지이자, 면소재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1968년에는 106가구였으나, 2005년에는 188가구로 가구수가 늘어났다. 일반적인 농촌마을과 달리 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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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을총회(동계) 십일시리는 동계와 마을총회가 하나로 운영되고 있다. 동계의 정기회의가 곧 마을총회인 것이다. 동계는 1926년에 마을 경조사를 함께 치르기 위해 처음 결성되었으나, 기록은 1947년부터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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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시마을은 인근 주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출신지역별로 계를 하고 있다. ‘지산면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재 남자 11명, 여자 10명을 회원으로 하고 있는데, 남자계는 1990년대 중반에 조직되었고, 여자계는 2001년에 조직되었다. 이 계의 결성목적은 친목도모와 목돈마련, 경조사 챙기기 등이다. 남자는 일년에 한 번, 여자는 두 달에 한 번 모임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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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교리에는 본래 4개의 교회가 있었으나, 현재는 석교중앙교회, 임회제일교회, 제칠일안식일석교교회가 있다. 십일시마을에는 석교중앙교회가 위치해 있다. 교회는 많지만 기독교인은 많지 않다. 천주교회인 석교 공소가 1985년 10월에 신축, 축성되었으나 지산면과 통폐합되었다. 유교와 관련한 석교리의 사우재실(祠宇齋室)로는 밀양박씨 휘식 36위가 안치된 모충사(慕忠祠)와 밀양박씨 휘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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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시마을에 거주하는 어린이들은 대부분 석교초등학교를 다닌다. 석교초등학교는 1919년 11월 15일에 석교공립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했다. 1909년에 개교한 진도초등학교에 이어 진도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학교이다. 십일시마을에는 1964년 12월 19일에 설립된 석교중학교가 있으며, 1982년 3월 10일에 설립한 석교고등학교가 있다. 많은 학생들이 목포와 광주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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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시마을은 면소재지이기 때문에 다섯 군데의 의약시설이 있다. 병원시설로는 임회보건지소가 있고, 1990년대 초에 개원한 그린의원과 2005년에 개원한 전남의원이 있다. 약국으로 매정약국과 구분실한약국이 있다. 진도군에 있는 총 11개의 약국 가운데 2개가 십일시마을에 있다는 점과, 진도읍 이외에 개원한 총 5개의 병원 가운데 2개가 십일시마을에 있다는 점은, 곧 이곳이 진도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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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현재의 시장터는 1962~1963년경 지산면과 임회면 사람들이 부역으로 제방을 쌓아 만들었다. 그전의 시장터는 현재 상가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시장터의 면적을 넓히기 위해 제방을 쌓은 것이다. 새롭게 장터가 마련되면서 시장이 크게 번성했는데, 마을에 텔레비전이 보급될 무렵인 1970년대 중반에는 시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많아 걸어다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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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이루어진 조사에 의하면, 십일시마을의 취업자는 총 275명이었다. 취업자 가운데 남자는 131명, 여자는 144명이었다. 농업,임업,수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27명으로 남자가 50명, 여자가 77명이었다. 전기,가스,수도,위생시설 서비스업 종사자는 53명으로, 남자가 30명, 여자가 23명이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79명으로, 남자가 36명, 여자가 4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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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장옥:간척사업을 통해 현재의 장터[석교리 245-1번지]가 개설된 것은 1964년 10월 1일이었다. 부지면적은 2,937㎡이고, 매장면적은 396㎡이다. 이때 시장 내의 상설점포수는 12개였으나, 현재에는 3곳만 영업하고 있다. 장터의 장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인구가 감소하고 교통이 좋아지면서 상인과 소비자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상가:영업 중인 상설점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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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십일시마을에 형성된 장시는 10일에 한 번씩 열렸으나 장시가 번성하면서 4일에도 장이 열린다. 장이 번성한 이유는 임회면과 지산면, 조도면 사람들이 주로 이 시장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곳 주변 사람들에게 진도읍시장은 거리가 멀뿐더러 교통도 불편했다. 따라서 외부에서 상인들이 많이 들어왔고, 우시장도 크게 번성하여 시장의 발전을 촉진했다. 그러나 농업의 기계화로 우시장이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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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량:십일시마을에는 총 3개의 다리가 있다. 가장 중요한 다리는 십일시교로 1932년 진팽선(珍彭線)에 놓였다. 연장 36m, 교폭 6m의 혼응토조로 건설되었다. 이 다리는 한동안 십일시마을과 진도읍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다. 1994년에 새로 건설된 다리는 본래 다리가 있던 곳에서 약간 옆으로 이동하여, 연장 30m, 교폭 10.5m로 개축되었다. 또다른 다리는 홍수가 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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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시마을은 장터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마을이다. 그러므로 마을사람들에게는 장이 서는 4일(4일, 14일, 24일)과 10일(10일, 20일, 30일)이 가장 활기있는 날이다. 따라서 일년이나 한달을 주기로 움직이는 여느 마을과는 달리 장이 서는 4일과 10일을 주기로 순환되는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일장과 십일장 중에서 역사가 더 오래된 십일장이 현재까지도 더 큰 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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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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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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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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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정기적인 행사는 아니지만 부녀회나 노인회에서 주관하여 봄에 여행을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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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경로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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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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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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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면민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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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추석노래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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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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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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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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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시장은 물자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영역(market), 또는 그러한 상호작용이 행해지는 장소(marketplace)를 말한다.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공간적인 측면에서의 시장은 저자, 장시, 장문, 장터, 장, 시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기시장을 장시라고 지칭한 경우가 많았으며, 지방에 있는 시장은 향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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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지역 물품을 상호 교환하는 장시는 과거 한때 지역의 중추적인 중심 역할을 했으며, 장날은 인근지역 사람들의 잔칫날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산업화,도시화의 진행과 함께 장시는 양적, 질적으로 쇠퇴를 거듭했다. 장시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주요 요인으로는 소득 증대, 교통,통신의 발달, 대중매체의 확산, 농산물 및 공산품 유통구조의 변화 등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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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군거본능에 따라 마을을 형성하게 된다. 주거지 선택에서 중요한 고려사항은 토지로부터 보장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정주농업이 가능한가의 여부일 것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살기 좋은 곳의 조건으로 지리,생리(生利),인심,산수를 들고 있는데, 생리가 바로 정주농업의 조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땅이 기름져야 하고, 다음으로 배와 수레, 사람과 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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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이 발달하면서 진도 역시 광주, 목포 등 도시와의 연결이 편리해졌다. 이와 함께 농수산물은 대도시로 직접 출하되고, 유통업자들이 자가용을 이용해 생활필수품을 소비자의 가정으로 직접 배달하면서 장시의 기능이 현저히 쇠퇴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군 단위의 농수산물집하장은 소량 다품목 생산에 의존하는 영세한 소농의 생산물을 공동 출하하고, 규격 상품화를 촉진하며, 생산자의 조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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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도의 총면적은 5.73㎢로, 동경 126° 03′와 북위 34°14′에 위치하며, 진도 본섬의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진도 본섬 팽목항에서 남서부로 직선거리 약 17㎞ 정도 떨어져 있는데, 뱃길로 1시간 30분 거리이다. 관매도는 15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조도군도의 중심 섬인 하조도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5.6㎞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섬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의 길이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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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리(觀梅里)는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에 있는 마을이다. 관매리[1구]와 관호리[2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매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관매도리, 또는 관매도라고 부른다. 관매도의 마을명칭, 즉 관매(觀梅)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조선총독부령으로 만들어진『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진도군 조도면 지역의 명칭으로 ‘관매도리(조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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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도리(觀梅島里)[관매도, 관매리]:본래 진도군 조도면 지역으로, 관매도 또는 관매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매도리로 개칭하였다. 관매도리는 현재 관매마을[관매 1구]과 관호[관매 2구]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외에 자연마을로 장산편, 장산너머[또는 장산너메]가 있다. 관매리의 본래 이름, 즉 고유한 명칭은 볼매섬, 볼매리이다. 각흘리[마을]:각흘섬(각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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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리에는 주로 땅이름의 유래와 관련하여 전하는 설화가 많다. 『한국지명총람』(1984)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구렁이바우[바위]:다리축구석에 있는데, 이 바위의 형상이 두 마리의 구렁이가 바다에서 서로 엉기어 산으로 올라가는 것 같다. 옛날 당제를 지내던 청년이 몰래 벼락바우 밑에서 애인을 만나 속삭이다가 천벌로 벼락을 맞아 구렁이바우가 되었다고 한다. 여자들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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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조도면에 자리한 관매도는 관매, 장산, 관상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조도는 섬들이 새떼처럼 모여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관매도의 원래 지명은 '볼매'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새가 먹이를 물고 날아가다 잠깐 쉬어가는 섬'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관매도의 형상은 관호마을과 방에섬 양측을 날개로 매가 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관매리는 1970년대까지 270여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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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조도면 관매리 관매마을 진도군 조도면에 자리한 관매도는 관매, 장산, 관상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조도는 섬들이 새떼처럼 모여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관매도의 원래 지명은 '볼매'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새가 먹이를 물고 날아가다 잠깐 쉬어가는 섬'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관매도의 형상은 관호마을과 방에섬 양측을 날개로 매가 나는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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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는 논이 41.7㏊, 밭이 8.7㏊에 이르며, 미역과 톳양식을 하는 호수가 23호, 낭장망을 이용해 멸치잡이를 하는 호수가 1호, 통발을 이용해 장어,문어,꽃게잡이를 하는 호수는 6호다. 벼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체 가구 중 7~8호에 불과하며, 밭농사를 짓는 사람도 20여 호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농사를 짓지 않고 외지사람에게 임대해주고 있다. 외지사람들은 3만 평 정도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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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면의 섬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섬이 바로 관매도이다. 특히 관매도에는 천연기념물 제211호인 상록수림대와 제212호인 후박나무가 있어서 생태 테마 관광지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관매도에는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 많다. 사람들은 그 가운데 여덟 곳을 선정해 ‘관매 8경’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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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도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상품이 자연산 미역이다. 잭원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가내수공업 형태로 가공한 뒤 20가닥(1속)으로 묶어 상인에게 넘긴다. 주로 목포상인들을 통해서 유통된다. 자연산 미역을 넘기면, 상인들이 판매하고 일정한 소개료를 제한 뒤 주민들에게 판매대금을 송금한다. 특별한 계약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믿는 신뢰관계로 유통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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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도를 드나드는 교통편은 팽목(진도)-관매, 팽목-창유(조도)-관매, 팽목-진도의 여러 섬 경유-관매, 목포-관매[도중에 여러 섬을 경유]의 네 가지 교통편이 있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편은 팽목에서 조도를 거쳐서 관매도를 오가는 배편으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다음은 팽목과 관매 사이에 진도의 대마도, 소마도, 관사도, 조도 등을 경유하여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배편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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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마을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양식톳과 양식미역, 자연산미역 등이다. 따라서 주민들의 생업력은 이들 수산물의 생육에 맞추어져 있다. 양식미역과 양식톳의 포자를 바다에 넣는 11월과 12월, 자연산미역과 자연산톳을 채취하는 7월 말경은 관매마을 주민들에게 가장 분주한 시기이다. 또한 여름철에는 이름난 관광지인 관매도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 이 때문에 주민들 대다수가 민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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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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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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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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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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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관매초등학교 봄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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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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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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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면민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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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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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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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⑵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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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주요행사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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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도는 어로활동이 활발한 섬이다. 특히 닻배라고 불리는 조기잡이 어로는 관매도를 비롯한 조도군도의 두드러진 전통 중의 하나이며, 1960년대까지도 사용되던 닻배는 이 지역사람들의 어로활동을 상징하는 문화적 코드라고 할 수 있다. 전라북도 위도의 칠산어장까지 원정을 다녔던 닻배는, 외형적인 규모에서뿐만 아니라 생활문화를 지탱하는 물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낭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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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닻배의 구조 닻배는 배에 수많은 닻을 싣고 다닌 데서 유래된 명칭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정선(碇船)이라고 한다. 정선망은 물 속에 병풍처럼 길게 그물을 펼쳐 고기를 잡는 자망의 일종으로, 그물의 아랫부분에 무게를 주고 그물을 일자로 펼치기 위해 소형 닻들이 많이 필요하다. 그 닻들을 배에 싣고 어로활동을 한다고 하여 닻배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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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장망은 물살이 센 장소에 설치하는 멸치잡이 어구다. 자루 모양처럼 길게 생겼다고 해서 낭장이라고 부른다. 관매도 주변 바다는 조류의 흐름이 세어 낭장망 어업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낭장 그물 한 조를 ‘한 틀’이라고 한다. 관매리는 1호, 관호리는 10여 호 정도가 낭장망 어업을 한다. 조업은 양력 7월 무렵부터 11월까지 하는데, 조업이 끝나면 그물을 철거한 뒤 손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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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치 끌낚시는 소형(1~3톤) 어선에 대나무 2개를 양팔 벌리듯 설치하고 여기에 낚시줄을 매달아 삼치를 잡는 어업이다. 현지에서는 ‘삼치 스릴’이라고 부른다. 관매도에는 30여 척의 채낚기 어선이 조업 중이다. 어구는 배의 중간 부분에 설치한다. 낚시대 2개에 각각 2개 또는 3개씩의 낚시를 매단 줄을 연결한다. 줄은 약 30㎝ 정도이고, 낚시대에서 1.5m 떨어진 곳에 삼치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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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통발은 원통형 통발에 미끼를 끼워 꽃게를 잡는 어구다. 관매도에는 관매리, 관호리, 각흘도에 각각 1척 씩의 꽃게통발어선이 있다. 한 줄에 100~200개 정도의 통발을 연결하는데 그것을 ‘한 틀’이라고 한다. 통발의 부피 때문에 한번에 세 틀 정도를 배에 싣고 간다. 어업시기는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이다. 산란기인 6월~8월에는 금어기다. 봄에는 안개, 가을에는 바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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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낙은 긴 모릿줄에 수많은 낚시를 매달아 물고기를 잡는 어구다. 어종에 따라 농어주낙, 돔주낙, 명태주낙, 장어주낙, 우럭주낙, 다랑어주낙, 꽁치주낙 등이 있다. 사용방법은 거의 비슷하다. 관매도에서는 주낙으로 농어, 장어, 꽁치 등을 주로 잡는다. 꽁치주낙은 약 50발 정도의 모릿줄에 낚시 180여 개를 매달아 조업한다. 상자 하나에 정리된 낚시를 한 틀이라고 하는데 사각형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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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해역에 위치한 관매도는 질좋은 해조류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미역, 톳, 가사리, 파래, 김 등이 생산되는데, 특히 자연산미역과 톳이 유명하다. 관매도에서는 자연산 해조류를 공동으로 생산한다. 관매도의 해안선은 마을 공동소유의 어장이다. 관매도의 두 개 마을 관매도리와 관호리는 각각 어촌계가 있어 공동으로 어장을 관리한다. 두 마을에서는 해안선을 구역화하여 조별로 운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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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미역은 바위에 달라붙어 자란다고 하여 돌미역이라고 부른다. 채취시기는 음력 6월 보름 무렵의 사리 때다. 물이 들었다가 빠지기 시작하면 ‘재건’들이 소형 채취선을 타고 자신들의 구역인 ‘똠’으로 가서 작업을 한다. 낫으로 미역을 잘라 채취하는데 물이 바로 들기 때문에 2시간 정도밖에 일을 하지 못한다. 똠의 공동작업으로 채취한 미역은 회원이 똑같이 분배하고, 개별적으로 건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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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톳은 미역 채취시기인 음력 6월에 채취한다. 대개 미역을 먼저 하고 톳을 채취한다. 낫이나 칼로 베어 바구니나 망에 담아 온다. 생톳을 분배하기도 하고, 공동으로 건조해서 판매가를 분배하기도 한다. 양식톳은 음력 9월경 바위에 붙은 톳 종자를 채취하여, 원줄에 10㎝ 간격으로 부착해 바다에 설치한다. 원줄의 길이는 50발이며 플라스틱 원형 부표를 이용해 줄을 뜨게 하고 나무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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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관매도리 당제 관매도리 당제는 입도선조(入島先祖)에게 마을의 안녕과 해산물의 풍요를 비는 마을제사의 성격이 강하다. 대대로 전승되어오다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정부의 미신타파 정책으로 철폐되었다. 당시 관매도에 파견돼 있던 경찰들이 방위병들을 시켜 당집을 해체하면서 당제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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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는 어로의 안전을 지켜주는 배서낭을 모셨다. 대개는 여(女)서낭으로, 서낭은 깨끗한 곳에 모시는데 밥을 하는 ‘투시칸’이나 침실에 감실을 마련해 모셨다. 감실 안에는 삼색헝겁에 바늘과 실을 함께 묶어 모셨다. 서낭과 별도로 조상을 모시는 경우도 있었다. 창지를 접어서 ‘할아버지들’을 선주의 침실 머리맡에 모셨다. 뱃고사는 대부분 닻배와 관련이 있다. 뱃고사의 종류로는 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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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배가 출어하기 2~3일 전에 단골을 불러 연신굿을 했다. 한식 무렵에 칠산어장으로 출어를 하는데, 관매도에서는 10여 척의 닻배가 고기잡이에 나섰다. 연신을 하게 되면 선주집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사람(개고기를 먹었거나 상복을 입고 산고 든 사람)들은 출입을 금하고, 선주와 선주가족 그리고 선원들은 목욕재계한다. 연신굿은 낮에 배 위에서 했다. 굿을 하게 되면 이틀간 술과 음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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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도는 닻배의 중심지답게 관련 민요가 많이 전승된다. 닻배노래는 닻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면서 부르는 어업노동요로, ①놋소리 ②술비소리 ③풍장소리(배치기)로 구성된다. ①은 노를 저을 때 부른 소리이며, ②는 배에 그물을 싣거나 바다에서 그물을 당길 때 부른다. 그리고 ③은 만선의 흥취와 신명을 표출하는 풍장소리로 불린다. 닻배노래에는 조도 어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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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는 관매도의 대표적인 여성민요로서 추석이나 설, 대보름 등 명절 때 부르던 노래이며 놀이다. 닻배노래가 남성들 중심의 구비전승이라면 강강술래는 여성들이 전승해온 민요다. 강강술래 여흥놀이로는「긴강강술래」, 「자진강강술래」, 「덕석몰이」, 「청어엮고 풀기」, 「고사리꺽자」, 「남생아놀아라」, 「도굿대당기기」 등이 있다. ①조사일자:1996년 7월 13일 ②조도면 관호리 ③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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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들노래」의 고장 인지리는 진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산면의 면소재지이다. 과거 해남군 화원지방에 있던 목장을 지산면 지력산으로 옮기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초기에 임회면에 부속되어 오다가 조선시대 중엽 목장면이라 칭하고 관마리에 청을 두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산면 인지리의 절대적 위치인 경,위도 좌표는 북위 34도 25분 27초이고, 경도는 126도 10분 00초로 면의 중심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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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치리(禿峙里)는 현재 행정구역상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속해 있는 마을이다. 독치마을의 법정리인 인지리(仁智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전의 인천(仁川)마을과 독치마을을 병합하면서 새로 생긴 명칭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에 인지리의 명칭이 보이지 않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반영하여 작성한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에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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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에 관련된 기술 내용은 『지명총람』(진도군)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김옥택[남, 66세, 마을 이장] 씨의 도움을 받았다. 독치리는 마을 뒤쪽(부흥산)으로 가치리, 관마리와 경계를 이루고, 마을 앞쪽으로 인천리, 마을 좌측으로 와우리, 마을 우측으로 삼당리와 경계를 이룬다. 규암(窺岩)[바위] 외뜬바우의 다른 이름이다. ‘외뜬바우’ 항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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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면은 나라의 목장이 있었던 탓에 조선시대 중엽까지 목장면이라고 하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이곳에 위치한 지력산의 이름을 빌려 지산면이라 하였다. 인지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인천리와 독치리를 병합하여 인지리라 했다. 2006년 6월 현재 독치리는 총 152세대 290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중 농가는 130호, 비농가는 22호이며, 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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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식 임원으로는 이장, 반장, 부녀회장, 남녀 새마을지도자, 청년회장, 개발위원 등이 있다. 회의는 정기적인 마을 '운영위원회'와 ‘연말결산총회’로 구분할 수 있다. 운영위원회는 6명의 반장과 6명의 개발위원들이 참여하는 회의이며, 연말결산총회는 마을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총회다. 결산총회는 12월 말에 일 년 예산, 수입을 결산 보고하는 자리이며, 사업보고와 계획이 수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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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리는 진도민속을 배태한 마을이다. 「남도들노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30여 명에 이른다. 진도의 무형문화재 중 소포리에서 나온 진도북춤을 제외하고,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등은 모두 이곳 인지리에서 나왔다. 인지리는 많은 진도민속, 무형문화재와 관련된 조공례, 박병천, 신영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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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리에는 1999년 12월 설립된 '지산면 민속놀이 전수관'이 있다. 이 전수관에서는 「남도들노래」(이영자: 남도들노래 예능보유자, 박동매: 남도들노래 예능보유자, 박재준: 남도들노래 조교), 「진도만가」(김항규: 진도만가 예능보유자, 설재림: 진도만가 예능보유자)의 전수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진도들노래보존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전수활동을 하고 있으며, 김기순씨[남도들노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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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치리의 경지면전은 밭이 46.3㏊, 논이 47.5㏊이며, 인구에 비해서 경지면적이 적은 편이다. 주민들의 주 생업은 밭에서 이루어지는 대파농사이며, 이를 통해 생계와 자녀교육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대파 대신 보리를 심었으며, 일부 논에서는 배추를 심기도 한다. 대파농사를 짓는 농가는 100여 농가에 이르며, 20여 년 전 나락수매가 이루어지고 쌀값이 좋을 때는 논에는 벼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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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는 100평 한 마지기에 약값, 종자값, 인건비 등을 고려할 때 35만 원 정도 투자가 되며 2005년 가격이 좋을 때는 150만 원, 보통 50~60만 원에 거래되었다. 가격이 좋지 않을 때는 투자비용을 건지기 어려울 때도 있다. 대파농사는 예약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대파가격이 괜찮을 것 같으면 3월부터 상인들이 선금을 주고 예약을 한다. 대파판매는 포전판매(밭떼기)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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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도로가 발달하기 전에는 진도읍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고뱅이 잔등[고백리] - 칠전부락 - 꿀재를 지나야 읍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 길은 30여㎞에 이른다. 소포만이 막히기 전에 진도읍으로 가는 길은 앵무까지 걸어가서 나룻배를 타고 장구포를 거쳐 진도읍으로 들어가는 길과, 소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해창으로 들어가 진도읍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이렇게 진도읍으로 들어가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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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치마을의 주요 소득원은 벼농사와 밭농사 등 농업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생활도 농사주기에 맞추어져 있다. 주요작물로는 벼, 검정쌀, 대파, 월동배추, 고추, 구기자 등이다. 농사력은 농촌지도소에서 제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전체적으로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기계화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빨리 수확을 해야 좋은 가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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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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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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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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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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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경로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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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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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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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면민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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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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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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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2)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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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행사 ○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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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면 인지리는 지산면의 소재지 마을이다. 진도의 7개 무형문화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무형문화재의 본산이라고 할만하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는 남도들노래, 진도씻김굿을 비롯해,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인 진도만가가 해당되고, 간접적으로는 강강술래, 다시래기 등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진도북놀이 등의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가 해당된다. 직접적으로 관련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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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진도씻김굿은 진도 전역을 통괄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인지리 출신의 박병천 일가를 중심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인지마을이 진도씻김굿의 본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된 후 박병천 일가가 인지리를 떠나 서울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지마을에서의 전승활동이나 연행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진도읍에 설치된 무형문화재 전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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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들노래는 특히 지산면 인지마을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던 노래를 중심으로 하여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즉, 남도들노래는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논일노래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벼농사에 관련된 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들노래는 1972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진도에는 남도들노래 뿐만 아니라, 의신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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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만가는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연행되는 상여소리를 말한다. 진도만가(珍島輓歌)라는 이름은 1975년 남도문화제에서 입상하는 시기를 전후해서 이를 연구하거나 관여했던 학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원래 진도에서는 상여소리라고 했는데, ‘상여소리를 한다.’ ‘상여운구를 한다’, ‘생애(喪輿) 나간다’ 등의 동사(動詞)적 개념으로 사용해 오던 말이다. 대체로 진도만가는 두 가지 유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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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도북놀이가 인지마을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못북기원설’의 측면에서 보면, 남도들노래가 못북의 배경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북놀이와 들노래의 친연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따라서 북춤으로 지정된 인간문화재가 인지마을에 없다는 것을 빼고는 인지마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북춤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박병천을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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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강술래는 인지마을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다만, 강강술래를 안무할 당시에 해남군 우수영 강강술래를 지도한 사람이 인지리의 박병천이었고, 그런 영향 때문인지 지금까지 왕성하게 강강술래를 보존시켜오고 있는 마을 중의 하나가 인지마을이라는 점에서 강강술래와의 친연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본래 강강술래는 진도읍의 양홍도를 중심으로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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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가 인지마을의 경제적 발전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섣불리 대답하기 곤란하다. 다만 문화적인 영향면에서 본다면, 진도의 민속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마을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점과, 많은 명인들을 배출한 마을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인지마을의 문화적 위상을 무형문화재가 높였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지리에 있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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