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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치마을-특성-중요 무형문화재의 전승양상-진도북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8037
한자 智山面 禿峙마을-特性-重要 無形文化財의 傳承樣相-珍島북춤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문화마을
인구(남) 198명
인구(여) 211명
가구수 181가구

[진도북춤(진도북놀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도북놀이가 인지마을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못북기원설’의 측면에서 보면, 남도들노래가 못북의 배경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북놀이와 들노래의 친연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따라서 북춤으로 지정된 인간문화재가 인지마을에 없다는 것을 빼고는 인지마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북춤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박병천을 중심으로 한 인지마을의 북춤을 으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대개 진도의 북놀이를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양태옥류, 박관용류, 장성천류를 말하는데 반해 진도북춤이라고 하면 박병천류의 북춤을 말하기 때문이다.

진도북놀이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80년대이지만, 못북설 등의 여러 가지 유래설에서 보듯이 그 변화는 훨씬 이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군무를 중심으로 북을 메고 추는 춤을 북놀이라 하고 독무를 중심으로 북을 메고 추는 춤을 북춤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전남도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북놀이로 지정되었으므로 (북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진도의 북은 양손에 채를 쥐고 친다고 하여 흔히 ‘양북’이라고도 하고 채를 쌍으로 들고 춘다고 해서 ‘쌍북’이라고도 한다. 혹은 어깨에 메고 친다고 하여 ‘걸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대개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양손에 채를 쥐고 친다는 의미의 ‘양북’이라는 용어로 통칭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다.

진도북춤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들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 중에서도 들노래에서 보이는 ‘모방구’ 혹은 ‘못방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풍물(농악)의 북놀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래설 중에는 풍물에서 장고 대신으로 북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이에 따르면 장고 구입이나 제작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고는 왼쪽 피와 오른쪽 피를 각각 개가죽이나 소가죽 등 다른 가죽을 사용해야 하고, 원철, 구철, 진흥사 등의 특수 부품이 필요한 악기이다. 따라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북통과 북을 장구 대신으로 연주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가락 자체가 장구가락을 대신하는 잔가락을 많이 사용한다는 논리이다.

진도에서의 북은 설북이라고 해서 설쇠가 풍물을 리드하는 것처럼 판을 리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모내기 등의 들노래에서는 설북이 지휘자의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진도씻김굿에서 징이 지휘자의 역할을 하는 점이나, 걸궁 농악에서 설쇠가 지휘자의 역할을 하는 것에 견주어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내기 등의 들노래에서는 징과 꽹과리는 따라붙지 않아도 북은 필수 악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북수는 큰 삿갓을 쓰고 삿갓 끝이 물에 닿을 정도로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춘다. 또 북채를 지휘봉 삼아서 못군들을 지휘하는데, 흥을 돋우는 것은 물론이고 이 빠진 모나 줄 틀린 모를 지적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북춤은 흔히 매구굿 등의 걸립에서 사용하던 담배꽃 고깔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이후 북춤이 변화하면서 특히 박병천 등에 의해 상투머리나 머리띠 등을 사용하는 예가 많아졌다.

진도북의 명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만큼 진도북놀이가 광범위한 예술적 인프라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는 김행원이 북춤이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 외에 김기수(金基洙), 김성남(金成南), 임장수, 박태주 등의 북수들이 이름을 떨쳤다. 이 중 소포리박태주는 북을 잘 쳤다고 해서 흔히 ‘북태주’라고 불린다. 진도북춤이 중앙에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1983년에 문화재위원인 정병호(鄭炳皓)가 도깨비굿 조사를 위해 진도에 들렸다가 의신면 청룡리의 노인들이 북춤 추는 것을 보고 중앙에 적극 홍보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이때 진도의 설북이 양손에 채를 쥐고 치는 양북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점차 중앙에까지 북춤공연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양태옥을 제외하면, 박병천을 비롯해 장성천, 박관용, 곽덕환 등이 소포만문화권 선조들의 기예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지마을이 소포만문화권의 중심지임을 전제하게 되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뒤를 이어 회자되는 사람들도 소포만문화권에 속해 있는 사람들로, 대개 본명보다 속명으로 알려진 이들이 많은데, 조도 꼴기미의 최우물, 포산의 돌무채 등이 있고, 삼당리의 김길선은 장성천의 뒤를 이어 북놀이 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소포리의 김내식은 일명 ‘북태주’의 북춤 사위를 가장 비슷하게 모사하는 북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외에도 북놀이보존회를 이끌었던 많은 북수들을 포함하여 마을마다 한 명 이상의 명인들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도북춤은 다양한 가락과 춤사위를 곁들인 놀이이자 춤으로 연행되어 왔다. 그러나 1987년 전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면서 일정한 틀을 강요받게 되었고, 장성천, 양태옥, 박관용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일종의 유파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진도북춤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즉흥성’과 ‘엇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락과 구성에 고정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자유분방하고 다채로운 구성이었음을 말한다. 양태옥류를 포함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세 북놀이의 공통적인 특징은 왼쪽 채를 오른쪽 북면으로 연신 넘기면서 가락을 치는 ‘다듬이질 사위’를 위주로 연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하면 박병천 계열의 북놀이는 애초부터 춤으로 출발했기 때문인지 이 다듬이질 사위가 빠져있다. 북놀이와 북춤의 차이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어떤 유파든지 엇박을 잘 활용하는 것은 공통사항에 속한다. 어쨌든 진도북의 주요한 특징은 다듬이질사위를 사용한다는 점과 엇박을 잘 활용하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진도북놀이와 북춤이 언제부터 독립적인 장르로 전승되어 왔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북놀이는 본래 각 마을에서 또 각 민속음악의 현장에서 연행되던 종합연희물이었다. 농악에서, 들노래에서, 그리고 만가에서 혹은 닻배의 풍장굿에서 각자 연희되던 것이라는 점이다. 독립된 춤이나 놀이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정한 기간 특히 소포만의 간척기를 전후해서 독립된 종목으로 연행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무대에서 북춤의 이름으로 공연을 한다든가, 북놀이만을 따로 떼어 연행하는 형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놀이에 대한 매력을 발견한 진도 사람들이 독립된 장르로 재창조해 낸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북놀이에 대한 기원설이 다양하게 제기되는 것만큼이나 북놀이 혹은 북춤을 연행하는 형태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다양성의 확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사람들의 일면을 보더라도, 서로 다른 형태의 춤사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진도북놀이의 성격을 한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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