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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치마을-역사와 언어-유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8004
한자 智山面 禿峙마을-歷史와 言語-由來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금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문화마을
인구(남) 198명
인구(여) 211명
가구수 181가구

[독치마을의 역사와 유래]

독치리(禿峙里)는 현재 행정구역상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속해 있는 마을이다. 독치마을의 법정리인 인지리(仁智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전의 인천(仁川)마을과 독치마을을 병합하면서 새로 생긴 명칭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에 인지리의 명칭이 보이지 않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반영하여 작성한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에 처음으로 나타난다(이 자료에는 새로 생긴 마을 명칭 위에 ‘▲’ 표시를 하였는데 인지리 위에 이 표시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독치마을의 역사는 매우 깊다. 『진도군지』(미출간, 530쪽)에 의하면, 이 마을의 입향조는 광산이씨로 1400년경에 정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치마을은 『호구총수』(1789)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후기에 진도군 목장면(牧場面) 18개 마을 중의 하나였는데, 독치동리(禿峙洞里)로 나타난다.

현지인(독치마을 주민들)들은 인지리를 ‘인천 독치’로 말하기도 하는데 독치보다 인천을 앞세워 일컫는다. 『호구총수』(1789)의 기록에는 독치마을이 독치동리로 되어 있으나 주민들이 말하는 인천리는 보이지 않는다. 인천리라는 마을 명칭이 없었던지 아니면 독치동리가 더 큰 마을단위였을 것이라 추정된다.『진도군지』(미출간, 530쪽)에서는 인천리의 마을 형성시기를 137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후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에는 그간에 목장면이 지산면으로 명칭이 바뀌었기 때문에 독치리인천리지산면의 소속 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독치와 인천을 병합하여 인지리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독치마을인지리(법정리)의 행정리인데, 이 마을은 다시 3개 마을[동]로 나뉘어 있다. 독치마을의 3개 동은 남중, 남하, 서상인데 이들은 각각 남중동, 남하동, 서상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운상계가 있었는데 이 3개 동 단위로 운영되고 있다. 이전에는 앞서 밝힌 3개 동에 남상(남상동 또는 웃동네라 부른다)이 더 있어 4개 동으로 마을이 운영되었다. 그러던 것이 남상동의 호수(戶數)가 줄어 몇 가구만 남게 되자 각 가구는 남중과 서상에 편입시키게 됨으로써 남상동은 없어졌는데 이는 10여 년 전의 일이다.

『진도군지』(미출간, 530쪽)는 마을 명칭 유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은 민둥재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고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지명총람』에는 ‘민둥재’와 어형상 유사 지명으로 ‘민재’, ‘민재동’ 등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민재, 민재동은 잘 모르나, 인지리를 말할 때 ‘민잣골’이라고 한다고 알고 있다. 이 ‘민잣골’은 ‘민재동’이 변한 것이다. ‘민재동’은 ‘민잿골’로도 부르는데 ‘민잿골’이 ‘민잣골’인 것이다. 현재의 지명 독치(禿峙)는 이때의 ‘민재’를 한자로 바꿔 표기한 것이다. ‘민재’의 ‘민’은 ‘민둥산’(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산)의 ‘민둥’과 어원이 같은 것이다.

실제로 민둥산을 독산(禿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곧 현재의 지명 독치는 ‘민재’[고개]의 다른 표현이므로, 마을의 지명 유래는 이 마을에 예전부터 있었던 민재[-峙][고개]를 한자어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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