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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마을-특성-장승업 신화의 실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5044
한자 義新面 斜上마을-特性-張承業 神話의 實際
이칭/별칭 비끼내,빗내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복

[화원 그림과의 관계-장승업 신화의 실제]

허련의 한 세대 후배이면서 상반된 성격이지만, 조선 말기 화단에서 중앙에서 활동이 두드러진 장승업은 조선왕조 전체를 통해 뽑힌 3대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큰 반대가 없긴 하지만, 이와 같은 오원 신화에 대해 이견이 없는 바는 아니다. 불과 백 여 년 전에 활동한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한 편은 아니며, 꽤나 신비화된 감도 없지 않다. 다만 예술가로서 틀에 얽매이지 아니한 일탈적인 생활태도 등 기인과 방외지사(方外之士)의 면모를 강조한 자유분방한 삶을 알려주는 일화 등이 신화처럼 잘 알려져 있을 뿐이다.

직업화가로서 조선 말기 화단의 말미를 장식한 화가인 점, 근대화가의 두 거봉인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1853~1920]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이 모두 그의 제자인 점, 나아가 이들 문하에서 현대까지 한국화의 계보가 줄기차게 이어진 점 등이 그에 대한 과대포장의 진원지이다. 기존의 명성에 비해 그에 관한 본격적인 논고는 몇 편 되지 않으나, 개설서나 전시도록의 도판해설을 통해서도 부정과 긍정의 두 측면에서 회화사적 의의나 위상이 언급되곤 했다.

이전과 구별되는 새로운 화풍이라 할 수 있는 근대적인 면모가 필치나 용필법(用筆法)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으니, 그가 보여준 다양한 화풍 중에는 채색기법에 있어서는 김수철에 뒤지지 않는 수채화적인 요소도 감지된다. 많은 작품을 제작한 데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수묵이 중심이되 주로 담청(淡靑)과 담황(淡黃) 등 두 가지 색조만을 즐겨 집중적으로 사용한 점도 시선을 모은다. 긍정적 시각에서 그의 그림을 살필 때, 그는 철저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란 사실도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되며 나름대로 진일보한 새로운 시도를 감지할 수 있다. 이 점은 오히려 그의 제자들인 소림과 심전이 보다 복고적이고 고답적이며, 일반적으로 조선 말기 회화 대부분이 매너리즘 경향을 짙게 보여주는 화풍들과 좋은 대비를 보인다. 결국 장승업의 부침은 조선 말기 중인계층 부침(浮沈)의 가시화로 생각된다. 숙종 이래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위항문인(委巷文人)들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로, 이들 미감의 구현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김용준(金瑢俊)[1907~1964]은 일찍이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에서 ‘국초의 안견과 후기 초두의 단원 김홍도와 아울러 삼대거장으로 우열을 다툴 만한 천재’임과, ‘화격이 고매하여 화면에 신운(神韻)’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김원용(金元龍)[1922~1993]은 『한국미술사』에서 ‘적어도 기술면에 있어서 중국 본토의 수준을 따를 수 있는 좁은 의미에서 이조에서 탈출하여 동양화의 본 세계로 뛰어든 화가로 그림은 격이 높지 못하고, 자기 본유의 세계를 확립하지 못한 채 그 일대로서 끝나고 만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최순우는 ‘오원 독자적인 용묵과 용필의 묘기가 두드러지게 특징지어져 있어서 ‘원인법(元人法) 아닌 오원법(吾園法)’이며 ‘천재적인 조형력과 시골티 짙은 개성’으로 간주했고 ‘문인화가 가지는 문기(文氣)와 서권기(書卷氣)까지 기량으로 처리함으로서 문인화의 이념미(理念美)조차 회화적인 차원으로 소화해 버린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안휘준(安輝濬)은 『한국회화사』에서 ‘조선 말기의 우리나라 회화를 꽃피운 거장’이되 ‘기량은 풍부하나 그 시대를 지배한 문자향과 서권기는 결여된 것’으로, 이귀열(李龜烈)은 『근대 한국화의 흐름』에서 오원을 ‘중인 계급의 지식층으로부터 떠받들림을 받은 천운과 시운이 따른 천부의 화가’이나 ‘시대의식은커녕 대체로 타의성이 많은 중국화풍 추종으로 일관한 것’으로 보았다. 유홍준은 『구한말의 그림』에 게재된 전술 논고에서 ‘예술적 상상력은 비열한 것이고, 조형의식은 빈약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선택한 소재는 화본(畵本)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지향 하는 바 어떤 예술세계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추사 이후 주눅 들어 있던 화원, 즉 직업화가의 승리’로 보았다. 또한 황현(黃炫)[1855~1910]이 그를 ‘신품(神品)’이라고 평한 것을 유홍준은 인용하고 있다. 어떤 조선화가들보다도 그가 아주 예스럽게 생각됨은 고답적인 그의 화풍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허련 과 비교할 때 소재와 주제, 그리고 화경(畵境)의 측면에서 보수적인 허련에 비해 장승업은 새로운 감각의 신화풍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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