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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인구와 조직-성내리가 배출한 인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1013
한자 珍島邑 城內里-人口組織-城內里가 輩出한 人物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호기박철웅황금연이옥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198
인구(남) 492명
인구(여) 499명
가구수 411가구

[성내리가 배출한 인물]

임삼현(任三鉉)[1874~1948]: 오위장을 지낸 임경록(任慶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호석(湖石)이며, 1889년 16세가 되던 해에 소치(小癡) 허련(許練)의 제자로 입문하여 그림을 공부했다. 운림산방의 살림을 운영했고, 소치 허련이 1893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의 휘하에서 그림과 글씨를 공부하다 소치의 유언을 따라 운림산방을 관리했다. 미산 허형이 1912년 강진 병영으로 이주하자 그도 1914년 운림산방을 떠났다고 한다.

김득수(金得洙)[1917~1990. 5. 21]: 1917년 성내리에서 진도북춤의 종시조로 알려진 김행언의 아들로 출생했다. 본명은 김영수(金永洙)이다. 본래 판소리를 공부했으나, 이후 고수의 길을 걸었다. 1956년부터 예술원 국극단을 창단하였으며, 1964년부터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악장을 역임했다. 1970년에는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했고, 1985년에 판소리 고법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양태옥(梁太玉)[1919~2003] : 1919년 11월 3일 성내리에서 옥(玉) 공예업을 하는 아버지 양방진과 어머니 김황덕의 3남 2년 중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아동기 때부터 농악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진도고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후 신청(神廳) 농악대에 가입했다. 여기에서 북, 꽹과리, 장구, 징 등 농악에 쓰이는 타악기의 연주법을 습득했다. 1937년에는 진도군 조도면 율도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북에 더욱 심취했고, 가르쳤다. 1954년에는 진도민속예술국악원을 창립 운영했다. 1981년부터는 한국국악협회 전라남도지부 부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84년 경주에서 열린 신라문화제 특장부문에서 진도 북춤으로 최우수상을 받고 난 뒤 그의 진도 북춤은 널리 알려졌다. 1987년 8월 25일에 박관용, 장성천 등과 진도북놀이 기능보유자 비장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1993년에 『민속놀이 진도신청농악』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 한정석[1929~사망]: 1923년 성내리에서 출생했다. 1944년 의신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직에 입문하였고, 1985년에 상만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후 모도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다 다시 상만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가 퇴임하였다.

◦ 한평교[1929~ ] : 1929년 성내리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진도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채계만(蔡桂萬)[1915~사망] : 성내리에서 채다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초기에는 햇님 여성국극단, 삼성 여성국극단 등의 유랑극단 악사로 활동했다. 섹소폰 등의 악기를 잘 다루었고, 클라리넷 연주도 잘했다. 1980년 11월 17일 진도씻김굿이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박병천, 김대례 등과 함께 아쟁악사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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