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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마을-특성-조선말기 화단의 실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5042
한자 義新面 斜上마을-特性-朝鮮末期 畵壇의 實像
이칭/별칭 비끼내,빗내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복

[조선 말기 화단의 실상-전통과 변화의 과도기]

우리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거하듯 영원한 승자는 없다. 그것은 마치 유아기에서 노년에 이르는 인체의 변화와도 다를 바 없다.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 번성이 있으면 절정에 이어 쇠락이 따른다. 조선왕조의 끝자락인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까지 60년 남짓한 시기를 미술사학자들에 따라서는, 3분법에서는 18세기와 함께 후기에 포함시키거나, 세분한 4분법에서는 조선 말기 화단으로 분류한다.

기울어가는 왕조의 제 현상을 반영하듯 화단은 후기(1700~1850년경)에 유행한 우리 민족의 고유색 짙은 정취와 미감을 잘 드러내 보여준 진경산수(眞景山水)와 풍속화가 점차 쇠락하기에 이른다. 그 대신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남종문인화가 더욱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화단 일각에선 개성이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며 새로운 감각으로 이른바 이색화풍을 창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경향은 전자의 경우 격조 높은 문인화를 이룩한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그를 추종하는 조희룡(趙熙龍)[1789~1866], 허련(許鍊)[1808~1893], 전기(田琦)[1825~1854] 등 이른바 추사파에 의해서, 그리고 후자는 그들 또한 추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나 김수철(金秀哲), 홍세섭(洪世燮)[1832~1884] 등의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간취된다.

김정희 일파가 남종화법을 다져놓는 데 기여했다면, 김수철홍세섭 등은 남종화법을 토대로 현대적 감각의 화풍을 형성해 전개시킨 데 회화사적 의의가 있다. 특히 김수철은 과감한 생략, 소략(疏略)한 필치, 깔끔한 담채 등 수채화에 방불한 참신한 화풍으로 정통회화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근,현대화단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화원으로서 출중한 기량을 지닌 장승업(張承業)[1843~1897] 등이 말기 화단에 있어 분명한 자기 색깔과 역할을 보인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한편 이하응(李昰應)[1820~1898], 민영익(閔泳翊)[1860~1914] 등에 의해 묵란(墨蘭)이, 정학교(丁學敎)[1832~1914] 등에 의해 괴석(怪石)이 즐겨 그려지는 등 문인화적인 소재가 활발하게 다루어진 편이다. 19세기 후반은 시대의 요청과 미의식을 반영하듯 장수를 기원하는 신선도나 노후의 평안을 비는 노안도(蘆雁圖),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화단 일각에서 괴석도(怪石圖), 어해도(魚蟹圖) 등이 즐겨 그려지게 된 소이는 세기말적 시대 분위기의 파악과 더불어 선명해진다 하겠다.

또한 경제적 부(富)가 축적되면서 그림에 대한 지방의 수요도 이전과 달리 증가했다. 이에 서울 화단과 별개로, 이 시기에 늘어난 그림 수요와 더불어 지방화단이 형성되었다. 호남 화단의 허련과 그를 따른 일련의 화가들, 포도 그림 「묵포도(墨葡萄)」로 잘 알려진 전라북도 옥구의 최석환(崔奭煥)[1808~1877 이후]과 초상화가로 이름난 채용신(蔡龍臣)[1850~1941], 평양 화단의 이희수(李喜秀)[1836~1909]와 기러기 그림 「노안(蘆雁)」으로 명성이 높은 양기훈(楊基薰)[1843~1919 이후] 및 김윤보(金允甫), 함경도 원산의 김준근(金俊根)과 게 그림으로 이름을 얻은 무산(茂山)의 지창한(池昌漢)[1851~1921] 및 단천의 우상하(禹相夏), 대구의 사군자 등 문인화의 서병건(徐丙健)[1850~?], 서병오(徐丙五)[1862~1935] 등 지역별로 활약이 돋보인다.

나아가 이 시기는 회화분야 영역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민화(民畵)에 대한 조명 또한 요구된다. 실제로 이희수 같은 문인화가는 그의 문하에서 강원도 민화가의 계보를 찾게 된다. 화단의 여러 경향과 유파, 그리고 이 시기의 주류가 단순히 전통의 고수나 복고적인 성격이라 할지라도 나아가 근대성 내지 미래지향적인 화가들의 발굴과 조명은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를 조명한 특별전시로는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내 현재 민속박물관 건물로부터 헐린 중앙청, 즉 옛 총독부 건물로 옮겨 재개관한 이듬해 이전 1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으로 개최한「한국근대회화 백년(1850~1950)」을 들 수 있다(1987. 10. 20~12. 6.). 간송미술관에서 개최한 「근대산수」기획전(1987. 5. 15.~5. 28.)은 시기에 있어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를 포함시켰고, 분야에 있어서는 한자문화권의 전통회화에 있어 첫 번째 위치를 점하는 산수화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아울러 동처에서 전통회화 전반으로 장르를 넓혀 개최한 「근대회화」(1992. 10.~10. 21.)를 들 수 있다. 학고재에서 전술한 개관 특별전에 이어 이듬해 마련한「구한말의 그림」(1989. 10. 27.~11. 13.) 등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관계 논문과 전시 작품에 대한 상세한 도판해설 등 조선말기 화단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동시대 회화를 조명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또한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최 시기에 연「한국 근대회화 명품」(1995. 9. 18.~11. 15.) 기획전은 조선 말기부터 1920~1930년대까지 포함된 짜임새 있는 전시였다(1995. 9. 18.~11. 5.).

이들 전시는 예외 없이 도록이 간행되었고 말기 화단의 실상을 밝힌 비중 있는 논고들이 함께 게재되었다. 오늘날 조선 말기 화단으로 지칭되는 조선왕조 말기의 60년간은 전환기나 과도기라는 명칭은 어울리지 않는 시기로, 단순히 왕조의 말기라는 시대적 구분 외에도 화풍상 여러 가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는 시기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이 시기를 대하는 태도는 사람들에 따라 나름대로 시각차가 없지 않으나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이 우세하며, 이 점은 회화뿐 아니라 역사 전반이 두루 통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근대의 선두라는 입장에서 단지 쇠퇴양상이나 말폐(末廢) 측면만이 아닌 긍정적이며 발전적인 시각에서의 재조명 요청도 없지 않다. 세인의 이목에서 소외되어 크게 조명받지 못한 시기이나 엄존한 우리의 과거이며, 이를 바탕으로 그 뒤의 역사가 이어졌다는 분명한 사실에서 시대의 실상이나 그 의미에 대한 인식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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