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용장마을-특성-삼별초의 봉기와 진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3045
한자 龍藏마을-特性-三別抄의 蜂起와 珍島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
집필자 변동명

[삼별초의 봉기와 진도]

삼별초는 반개경정부(反開京政府) 그리고 반몽고(反蒙古)의 노선을 표방하며 거사하였다. 1270년(원종 11) 6월 초하루의 일이었다. 앞서 같은 해 5월 23일에 재상들이 회의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하자 삼별초는 그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킬 속셈을 처음 드러냈었다. “재추(宰樞)가 모여 옛 서울로 돌아갈 것을 의논하고 날을 정하여 방(榜)을 붙이니, 삼별초가 딴 마음이 있어 따르지 않은 채 마음대로 부고(府庫)를 열었다.”(『고려사』26, 원종 11년 5월)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몽고에서 개경으로 귀환한 원종이 5월 29일에 삼별초를 해산하도록 조치하자, 그에 맞서 6월 초하루에 왕족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추대한 후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원을 임명하는 등 신정부(新政府) 수립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이틀 뒤인 6월 3일 몽고 전란기의 수도였던 강도(江都)의 재물과 사람들을 휘몰아 1천여 척의 선박에 적재하고서 서안(西岸)의 구포(仇浦)[내가면 구하리·구상동]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진도에 들어가 웅거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가까이 지난 8월의 어느 날이었다. 몽고에 항복한 원종 및 개경정부를 반대하며, 고려왕조의 정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권이 진도에 들어선 셈이었다.

강화도를 포기하고 더욱 멀리 떨어진 깊은 바다의 섬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무인정권의 이른바 ‘해도재천(海島再遷)’ 혹은 ‘해도심입(海島深入)’의 구상은 원종 초년부터 확인된다. 최씨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고려와 몽고에서 연이어 군왕이 교체되며, 고려 태자[元宗]의 입조(入朝)에 따라 고려와 몽고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 등,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위기감을 느끼던 집권무인들 사이에서 진작부터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논의되었던 것이다. 삼별초의 봉기가 발생하기 10년쯤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도읍을 옮겨갈 대상지로 맨 먼저 언급된 것은 제주도였다.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바다에 위치함으로서 몽고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바닷길을 통해 일본이나 남송(南宋)과 연결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도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제주도는 “송의 상인(宋商)과 섬의 왜놈(島倭)들이 무시(無時)로 왕래하는 곳”(『고려사』25, 원종 원년 2월)이라는 지적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삼별초정권이 거점으로 택한 곳은 진도 였다. 무엇보다 명분상의 문제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고려왕조의 정통을 계승한 정부임을 표방하던 그들로서는, 본토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거점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주도는 본토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러한 점에서 매우 불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본토와의 연계성을 전제로 할 경우, 여러 측면에서 진도 만 한 조건을 갖춘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진도는 우리나라의 연해안에서 손꼽히는 큰 섬 가운데 하나이다. 해안지대를 비롯하여 내륙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인데다, 풍부한 해산물과 함께 섬 안의 비옥하고 넓은 농토에서 산출되는 곡물이 적지 않아 외부로부터의 고립에 대비하는 데에도 한결 유리하였다. 또한 강화도와 달리 개경과 상당한 거리를 둠으로써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하기에 적합하였으며, 더욱이 연안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운로(漕運路)를 장악할 수 있었음도 놓칠 수가 없다. 국가의 주요한 세입원(稅入源)이던 곡창지대를 제압할 수 있음으로 해서 얻게 되는 전략상의 이점(利點)은 구구히 늘어놓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고려가 당면한 어려움을 몽고 측에 하소연하는 글 중에, “지금 역적들(三別抄)이 날이 갈수록 번성하여 그 피해가 경상도의 금주(金州)[金海], 밀성(密城)[密陽]에까지 미치었습니다. 더욱이 남해·창선·거제·합포·진도 등의 지역을 빼앗아 취하였으며 바닷가 마을들을 빠짐없이 노략질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징발해 맞추려 해도 필요한 만큼 대기가 어렵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공부(貢賦)는 모두 육상으로 나르지 못하고 반드시 바다로 운반해야 하거니와, 지금 역적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진도는 뱃길의 목구멍과 같은 요충이어서 오고가는 배들이 지나갈 수 없는 실정입니다.” (『고려사』27, 원종 12년 3월)와 같은 설명에 그것이 잘 드러난다.

게다가 진도에는 그 전부터 이미 무인정권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였다. 최씨 무인정권의 제3대 집정인 최항(崔沆)이 만전(萬全)이라는 이름의 승려로 활동할 적에, 진도에 위치하는 한 사찰―아마도 용장사(龍藏寺)―의 주지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수선사(修禪社)[순천 송광사]와 백련사(白蓮社)[강진 만덕사] 등 무인정권과 종교적으로 그리고 사회·경제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던 사원세력이, 가까운 남해 연안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점도 무시할 수가 없다. 무인정권의 계승자인 삼별초에게, 진도는 그 근거지로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기에 유리한 여건을 갖춘 채 기다린 것이나 진배없는 요충지였던 셈이다.

1270년(원종 11) 6월 3일 강화도의 서안 구포를 출발한 삼별초군이 진도에 도착한 것은 최소한 8월 19일 이전이었다. 무려 70일 가까이 소요되었거니와, 치밀한 준비를 할 겨를이 없는 거사에 이어 곧바로 남행길에 올라야만 되었던 그들의 절박한 처지를 말해주는 듯 여겨진다. 그리하여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일대의 도서(島嶼)를 경략하는 동시에, 조직을 정비하고 식량과 식수 등을 공급받으며, 아울러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한 끝에 진도 입거를 결정하였던 것이 아닌가 헤아려지는 것이다.

한편 몽고를 등에 업은 개경정부에서는 삼별초의 남행을 예의주시하면서 대응책을 강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삼별초의 진도 입거를 점쳤던 것 같다.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무인집권자의 잔당을, 삼별초의 진도 입거 이전에 나주(羅州)로 옮겨서 구류시켰던 것이 그 증거이다. 삼별초가 진도로 향하는 것을 파악한 개경정부에서 그처럼 선제 조치를 취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삼별초의 진도 행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결정되었으며 또한 오래지않아 개경정부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반드시 그와 같지는 않았을지라도 최소한 삼별초가 진도 를 위시한 남해안 일대를 거점으로 삼으리라는 게 당시의 일반적인 예측이었다는 정도의 설명은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