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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치마을-특성-중요 무형문화재의 전승양상-남도들노래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8035
한자 智山面 禿峙마을-特性-重要 無形文化財의 傳承樣相-남도들노래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문화마을
인구(남) 198명
인구(여) 211명
가구수 181가구

[남도들노래]

남도들노래는 특히 지산면 인지마을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던 노래를 중심으로 하여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즉, 남도들노래는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논일노래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벼농사에 관련된 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들노래는 1972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진도에는 남도들노래 뿐만 아니라, 의신면을 중심으로 한 대동두레놀이가 있다. 이것은 공동으로 목화밭 작업을 하면서 부르던 ‘화중밭 노래’와, 벼농사를 하면서 부르던 ‘들소리’를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진도들노래는 소포만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으로 특징적인 일노래가 전승되어 오고 있는 셈이고, 논일소리와 밭일소리로 또 구분되어 전승 보존되어 오고 있는 셈이다. 의신면 들노래와 지산면 들노래는 그 기량이나 음악적 구성면에 있어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학자들은 이를 들어 소포만을 경계로 한 서부문화와 동부문화로 나누어 해석하기도 한다.

논일소리를 중심으로 하는 들노래는 일하는 절차에 따라 노래들이 분화되어 있다. 모내기는 흔히 ‘모를 찐다’고 해서 ‘모찌는 소리’라고 한다. 모찌는소리는 긴모뜨는소리, 자진모뜨는소리로 구분되고, 모심는 소리는 긴못소리, 자진못소리로 구분된다. 또 김매기소리는 긴절로소리, 중절로소리, 자진절로소리 등으로 구분된다. 세벌매기를 끝내고 상머슴을 소에 태우고 놀이하는 ‘질꼬냉이’는 다른 지역에서 흔히 ‘장원질소리’라고 하는 것으로 진도의 특유한 가락과 노래 구성을 보여준다. 만물이 끝나는 날에는 그 해 농사가 가장 잘된 집과 그 집에서 가장 일을 열심히 한 머슴을 ‘상머슴’으로 골라 축하는 놀이가 ‘질꼬냉이’다. 내륙지역에서는 흔히 ‘장원질’, ‘장원축’, ‘만드리’ 등으로 부른다. 남도들노래 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김기순에 의하면, 인지리에서는 이 날 큰 황소의 코뚜레에다가 흰 백목을 묶어 양편으로 늘어뜨리고 이 백목을 일꾼들이 잡고 행진을 했다고 한다. 소 몸에는 백목을 칭칭 감고 칡넝쿨, 혹은 담쟁이 넝쿨 등을 소 몸통에 감는다. 소를 탄 상머슴의 얼굴에는 솥검드렁(아궁이에서 긁어 낸 까만 재를 ‘검드렁’이라고 한다)을 칠하고, 긴 풀잎으로 만든 안경을 씌운다. 등에는 진흙으로 손바닥 도장을 찍고 삽을 어깨에 매게 한다. 이때 ‘질꼬냉이’ 노래를 부르면서 행렬이 들과 동네를 지나게 되는데, 주인집에서는 이들을 맞이하고 술과 닭죽 등으로 음식을 차려 내놓게 된다.

장단도 느린 것과 빠른 것, 12박자, 6박자, 4박자 등 다른 어떤 지역보다 다양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육자배기토리뿐만이 아니라, 경기도 지역의 민요를 수용하여 적절하게 버무려 낸 ‘남도경토리’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여기서의 ‘남도경토리’는 사당패에 의해서 유입된 서울 지역의 민요를 수용하여 진도만의 노래로 재창조했음을 증거 해 준다.

또 장단에 있어서도 논매는소리에 있어서 진양조장단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개 남도민요의 일반적인 특징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등의 장단이 가장 많이 사용되지만 농요에 있어서는 노동동작과 관련되기 때문에 중모리, 중중모리 가락이 많이 사용된다. 질꼬냉이에서 삼박자 중심의 ‘삼장개비’장단이 사용되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단은 ‘진도아리랑’ 등에서 사용되는 삼박자 계열의 장단이되,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진도씻김굿에서 사용되는 ‘삼장개배’ 장단이 아니라 ‘질꼬냉이형 삼장개비’ 장단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느린 장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1910년 이전부터 진도에 들어와 활동했던 남사당의 노래를 자기화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지리의 설재천 등이 사당패의 노래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재창조의 과정은 진도의 여러 가지 민속음악적 사례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남도들노래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큰 삿갓을 쓰고 치는 북이다. 북을 치는 사람을 흔히 ‘모방구’, ‘못북’ 등으로 부르는데, 일을 하는 사람들의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작업을 리드하거나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다. 진도북놀이의 기원을 여기서 찾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를 ‘못북 기원설’이라고 한다. 혹자는 북은 지휘자의 역할을 맡기 때문에, 일반 풍물 구성의 편대에서 ‘법고’가 리듬악기 역할을 맡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동경대의 이또오 교수가 찍은 1972년 남도들노래 사진 속에는 여러 사람의 법고만 등장하지 못북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에 현재의 못북이 없었다기보다는 들노래의 형식과 리듬이 다양했던 것처럼 악기의 편성이나 음악의 구성이 일률적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그 이전부터 못북이 존재했음을 여러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도들노래에서 빼놓으면 안될 맥락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일상적인 들노래 연행이 아닌, 보존회 설립이나, 들노래의 구성, 안무 등에 관여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지춘상, 안무가로는 인지리의 박병천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주도하여 1971년 진도들노래를 발굴하게 되고, 1971년 10월 제 12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것이 1972년 ‘진도들노래’가 ‘남도들노래’라는 이름으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 51호로 지정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보유자는 설재천(薛在千), 조공례(曺功禮)였으며, 두 분의 타계 이후로는 김영자, 박동매가 전통을 계승해 가고 있다.

남도들노래의 경우, 문화재로 지정하기 전까지는 현재의 단계처럼 획일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르게 부르던 노래와 서로 다른 상황에서 부르던 노래들을 모아서 연출한 노래가 현재의 ‘남도들노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바로는 소포리 김막금과 인지리 설재천인지리 조공례, 특히 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작고한 인지리의 박팽년 등의 사설들을 한데 모아 구성한 것이 현재의 남도들노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소포만을 중심으로 하여 소포리인지리의 대표적 사설들이 모여져서 ‘남도들노래’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 증거이다. 이것은 들노래의 구성이 시간적 제약이나 불변의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준다. 상황에 따라 노래가 취사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들노래의 구성, 장단의 편성, 사설의 취합 등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안무자 겸 연출자는 박병천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남도들노래를 포함하여 강강술래, 다시래기 등에 현격한 영향을 끼친 것은 유랑극단과 그들의 연희 및 노래들이다. 남도들노래의 논매는 소리에, 타 지역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중모리장단을 사용한다든가 육자배기 토리가 아닌 솔선법을 사용한 점 등이 이를 말해준다. 이 음악어법들은 1910년부터 이미 남사당패에 의해 유입이 되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소포만의 노래는 아니지만, 의신면에서 전승하고 있는 밭노래(미영밭 들노래)는 거의 전부가 경기민요의 선법을 차용하거나 재창조해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 남사당패의 일부는 진도에 정착했고, 이들에 의해 다시래기와 대시래기(待時來期)등의 놀이 일부 및 기악의 전수 또는 제작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남도들노래는 지산면 특히 지산면 인지리소포리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노래들을 습합시켜 새로운 구성의 노래로 탄생시킨 셈이다.

인간문화재였던 설재천이 타계한 이후 판소리선생이었던 이병기의 일남인 이해룡이 후계자로 지정을 받았으나 아쉽게도 지병으로 타계하고, 남자소리꾼은 아직 지정되지 않은 상태다. 조공례 타계 후 이영자, 박동매가 뒤를 이어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박동매는 조공례의 막내딸로 들노래뿐 아니라, 판소리, 잡가에도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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