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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마을-자연과 지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3002
한자 郡內面 龍藏마을-自然과 地理
이칭/별칭 용정,오룡쟁주,오룡장주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
집필자 박철웅

[자연과 지리]

용장리(龍藏里)하면 한자로 용을 품는다 또는 감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용은 예로부터 임금을 상징하는 말이다. 한양도성에서 천리 먼 길 떨어진 이곳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군지에는 1772년 남양홍씨가 처음 입향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995년(성종 14)에 진도군을 옥주군(沃州郡)으로 개칭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옥주를 다시 진도로 고치고 현재의 고성(古城)에 있던 관부를 현재의 군내면 용장으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마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진도 역사에서 용장마을은 중요한 기점이었고, 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역사적 전개가 지명과 무관하지 않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 배중손이 왕족 승화후 을 왕으로 추대하고 용장에 도읍을 정하여 궁성인 용장성을 지어 항거하다가, 1271년 여몽연합군에게 패할 때까지 약 9개월간 왕을 품고 있었던 곳이 바로 용장마을이다. 바로 이 궁성터는 지금 대궐터골로 불려지고 있다.

또한 용장마을용장사(龍藏寺)에 대해 옥주지(1761)에서 추정한 것을 보면, 무신정권의 왕족이 된 최충헌의 손자인 최항이 이곳 용장사에 머물면서 전횡을 하였다는 기록 또한 이 마을 지명과 무관하지 않는 듯싶다.

용장마을진도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8㎞ 거리로 18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오일시를 지나 801번 도로로 빠져 챙재(56m)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진도대교가 착공되어 진도의 주간선도로인 국도 18번이 고두산 간재터널을 뚫고 지나면서 곧바로 진도읍으로 들어가지만 진도대교가 착공(1984)되기 전에는 내륙에서 진도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과 물자는 해남 삼지원과 벽파항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1928년에 백파~용장~세등을 연결하는 도로가 연결되면서, 그 덕에 용장리는 진도의 주요 길목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벽파항의 뱃길은 사라지고 적막함 속에 남아 있는 간판에서 옛 영화의 흔적을 느낄 뿐이다. 용장마을에도 그런 쓸쓸함이 곳곳에 배어 있다.

용장마을은 북위 34° 31′ 10″, 동경 126° 19′ 54″ 지점의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완만한 산록면에 자리하고 있다. 상봉(267m) 아래 용장산성지(262m) 봉우리를 등에 지고 북쪽을 향하고 있다. 이 배후산지는 상봉을 중심으로 좌로 철천산(161.2m)으로 이어지고 그 맥은 다시 고도 60~80m의 낮은 구릉대로 이어지면서 과거에 바다였던 지금의 둔전저수지에 맞닿아 있다.

반면 상봉에서 남동방향으로 200m~250m에 달하는 연봉들인 서낭산(208m)~성황산(229.2m)~망바위(90m)로 이어진다. 이 맥은 용장마을을 남동-북동쪽으로 감싸고도는 모습이다. 이 낮은 구릉들은 오룡초등학교 뒤로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벽파항을 남서-북서 방향으로 감싸고돌다가 바다로 함몰한다.

이처럼용장마을은 북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이 산으로 둘러쳐져 있다. 북쪽 방향은 열려 있으나 그 끝은 산줄기가 바다를 살짝 가려주는 분지형국이다. 이 배후 산줄기를 따라서 1984년에 사적 126호로 지정된 용장산성이 석성과 토성형태로 약 13㎞ 정도가 남아 있다.

주위 산에서 발원하는 물은 7.91㎢의 유역면적과 길이 4.61㎞의 지방2급 하천인 용장천을 이룬다. 이 용장천은 상봉 오른쪽 줄기에서 발원하여 대궐터골과 용장사를 적시면서 용장저수지를 이루고 다시 마을 앞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흘러가면서 간천지를 적시기 위해 만든 둔전저수지에 합수된다.

산과 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뒤쪽과 좌우는 산지이고 앞쪽은 바다이니 북쪽에서 다가올 여몽연합군을 바라보면서 맞서 싸울 만한 곳으로 손색이 없다. 이런 자연지세를 갖춘 마을은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어 남쪽의 풍수해엔 대비할 수 있으나 북쪽에서 불어 닥치는 겨울바람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같은 군내면덕병리가 열려 있는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 남쪽의 높은 고두산(252.2m)에 면한 남향집을 짓는 것과 다르게 당당히 북쪽을 바라보면 북향으로 집을 짓는다. 물론 덕병리만큼 바로 바다에 열려 있지 않고 몇 개의 구릉들이 빗장이 되어 주고 있다. 거기에 약 250여 년 된 마을 앞 느티나무들이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기능을 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지붕의 처마를 마당 쪽으로 드러내고, 일자형 가옥구조의 마루는 대부분 아파트 베란다처럼 덧문으로 막아서 겨울바람에 대비하고 있다. 여름의 습기와 통풍은 남북방향의 문과 창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은 좋은 건축자재와 난방기술 덕에 추위나 바람을 피하기보다는 전망 좋은 곳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

마을 안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삼별초의 짧은 천하를 이루었던 궁성은 바다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곳으로 산속에 들어가 있어 용장마을에서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 드러내고 위용을 과시하면서 적을 위압하는 것이 아니라 숨듯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궁성인 용장성을 보면 영락없는 그 지명 그대로인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높은 망바위에서 적의 침입을 관찰하면서 항몽투쟁을 이어갔던 이 용장마을의 용은 입도 9개월 만에 적들이 바다가 아닌 내륙의 우회를 통해 공격함으로써 허를 찔려 그만 막을 내려야 했다.

과거 이곳 삼별초 무리들은 용장마을의 기반이 되는 용장천을 따라 1㎞의 내외에 좌우 폭 500m 정도에 펼쳐진 곡저와 챙재를 넘어 남쪽의 고성리에 있는 분지와 곡저평야에서 나오는 토지 생산성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 규모에 맞춘 왕궁을 건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용장리는 대국을 건설할 만큼의 큰 용 터는 아니었다.

지금은 80여 호의 가구가 괴촌을 이루면서 대부분 살, 대파, 월동배추, 구기자 등 진도의 다른 곳과 다름없는 농업 중심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인구 166명에 불과하여 평균 가구당 인구가 2명 정도로 젊은 층은 거의 없고 노인 1~2명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거기에 여자가 94명으로 여초현상이 두드러지고, 논과 밭의 분포가 비슷한 전형적인 진도의 농촌마을이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면서 역사의 풍랑 속에서 비껴 있던 인지리는 들노래가 남아 있으나, 진도 어느 곳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체가 되었던 이 마을엔 들노래가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역사이야기만이 전해지고 있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마을 중심부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공동 샘터가 있으며 공공시설로 노인정이 있다. 현풍곽씨밀양박씨가 주요 성씨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서쪽에 있다고 전해지는 흑색의 큰 바위를 ‘망바등’이라고 부르는데, 그 바위 속에 창고가 있어 보물이 가득하며, 도선이 억달새풀로 주문을 외우며 탁 치면 바위굴이 열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한 지금은 신선이 잠적해서 열지 못하나, 장차 신선이 오면 열릴 것이라는 아기장수설화 유형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용장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진 3기의 입석은 선독이라고 부르며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망제’라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이 입석에 금줄을 치고 제를 지내고 당산굿을 한다.

삼별초가 입도하기 훨씬 이전부터 용장산성 안에서 불력을 키웠던 용장사에는 고려 초 제작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인 석불좌상(石佛坐像)이 남아 있는데, 현재 군내면 용장리 52번지에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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