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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병마을-특성-망제-잃어버린 장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4034
한자 郡內面 德柄마을-特性-望祭-잃어버린 장승
이칭/별칭 덕저리,떡저리,덕병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옥희

[유명세 때문에 잃어버린 마을의 문화재]

요즈음 문화재의 도난이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골동품의 값이 오르면서 문화재급의 유물들이 도심(盜心)에 노출되어버렸다. 예술품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전 같으면 경외의 대상이었던 신앙유물마저도 도난을 당하는 예들이 많다고 한다. 문중의 고문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찰의 탱화나 묘 앞의 문인석 등도 문화재청에 도난신고가 된 예가 허다하다.

덕병마을에는 언제 세운지 모르지만, 두 주의 석장승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들을 장성이라고 불러왔다. 동쪽에 서있던 장승의 가슴에 “대장군(大將軍),” 서쪽에 서있던 장승의 가슴에 “진상등(鎭桑嶝)”이라는 한자가 음각되어 있었으며, 진상등장승의 뒤쪽에는 “장성(長城)”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사진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 풍모를 알 수 있는데, 이종철은 이들을 다음과 같이 매우 사실적이며 실감나게 묘사한 바 있다.

“서쪽 대장군은 화강석으로 높이 140㎝, 둘레 123㎝, 동쪽 진상등(鎭桑嶝)은 높이 195㎝, 둘레 약 130㎝였다.

대장군은 두부(頭部)에 16㎝ 높이의 탕건(宕巾) 형상의 관을 쓴 듯 표현하고, 폭 30㎝, 높이 11㎝의 이마에는 주름이 없고, 눈은 얕은 선각으로 감고 있는 듯하고, 코는 두툼하면서도 세모난 칼날 코, 귀는 부처님 모양 귓볼이 축 늘어지고 입은 선각으로 웃은 입, 이빨은 표현이 없고, 턱은 방방한 둥근 턱으로 목은 5㎝로 짧으며, 주름이 없다. 손과 발, 몸체 부분은 명확한 표현을 하지 않았으나 어깨에서 팔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앞면 뒷면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풍겨주는 느낌은 인자하고 근엄한 얼굴이다. 조형면에서 볼 때 전체적으로 중량감을 느끼게 하는 장방형 사다리꼴로, 섬세한 조각술보다는 순박한 농민의 신앙심을 불어넣은 작품이라 하겠다.

서쪽의 진상등(鎭桑嶝)이란 각자(刻字)가 있는 여장성은 머리에 관이 없이 높이 13㎝, 폭 38㎝의 훤칠한 긴 이마와 두드러진 눈썹을 가졌으며, 눈은 쇠눈처럼 크고 둥그렇게 튀어 나왔다. 코는 역시 세모난 칼날 코이며, 귀는 눈썹 부분에서 코에 이르기까지 길게 늘어져 있으며, 입은 선각으로 웃는 형태이다. 이는 드러내놓지 않았고, 턱은 둥글고 방방하며, 목은 5㎝이나 삼도(三道)는 없다. 목에서 어깨에 이르는 부분은 거의 곧은 선으로 나타냈으며, 팔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의 가슴 쪽을 목과 같은 높이로 각지하여 하반신에서 갈라진 수염을 표현한 듯한 여덟 팔자로 음각문자를 새겼다. 전체적으로 방형의 사다리꼴을 연상케 하는 동체는 지금 30㎝의 화강암 석인으로 장성 목에 걸어둔 왼새끼 금줄의 소 아가리 턱뼈는 어떠한 액살도 씹어서 내뱉을 모방주술을 표현함으로써 ‘건살뫼’의 멋을 한껏 부풀게 하고 있다.”

1989년 어느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랬다. 장승이 서 있던 곳이 허전해보였다. 밤사이에 마을을 지켜주던 석장승 두 기가 도난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근에 차를 받혀두고 중장비를 동원해서 장승을 뽑아 가버린 것이었다.

남도문화재에 이 마을의 망제가 출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장승을 도난당한 후 2년간은 그때 만들어서 사용했던 목장승을 임시로 세워두고 제사를 모셨다. 하지만 본래의 장승이 없어지고 나서 그해부터 마을에서 젊은 사람이 죽어나갔고 정신이상자가 생기는 등 좋지 않은 일들이 생겼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협의 끝에 1991년 마을자금 4백여만원을 들여 다시 현재의 석장승을 준비하여 예전에 있던 자리에 대신 세우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거의 모두 장승을 잃어버리게 된 동기를 두 가지로 꼽고 있다. 하나는 유명해졌기 때문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농로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유명해진 동기는 KBS에서 이 마을에 대해 특별방송을 하면서부터라도 한다. 정확한 프로의 이름은 기억을 하고 있지 못하지만, 1980년대에 이 마을의 장승이 KBS를 통해 전국에 소개되면서 마을의 중요한 문화재를 도둑을 맞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에는 장승이 서있는 곳까지는 논길로 차가 다닐 수 없었지만, 농로가 잘 닦이면서 차를 대놓고 중장비로 장승을 뽑아갔을 것으로 짐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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