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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128
한자 觀光
영어의미역 tour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안종수

[정의]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의 풍속(風俗)·풍광(風光)·사적(史蹟) 등을 유람하는 것.

[개설]

관광이라는 말의 어원은 주나라 때의 『역경(易經)』에 나오는 “관국지광이용빈우왕(觀國之光利用賓于王)”이라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한 나라의 사절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여 왕을 알현하고 자기 나라의 훌륭한 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 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관찰함이 왕의 빈객으로 대접받기에 적합하다는 일종의 의전적(儀典的)인 개념이다. 여기에서의 관(觀)은 본다는 뜻이면서 보인다는 의미도 있다. 광(光)은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 자랑스러운 것을 뜻하는 것이다.

진도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귀양을 가서 지냈던 섬이다. 우리나라에서 진도가 최고의 귀양지로 꼽혔다면 이곳이 사람이 살기 가장 힘든 곳이겠구나 하는 편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진도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민속문화와 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 진도에서는 국가적 자존심을 드높인 유적지도 볼 수 있다. 또한 한국 최고의 특산품이 생산되고 있다. 거기에다 진도에는 절경은 아니지만 음미할 만한 수수한 자연경관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진도의 민속문화적, 예술적, 역사적, 자연적 요인들이 진도를 관광할 만한 고장으로 만드는 요인들인 것이다.

[유배의 섬, 진도]

진도는 조선시대 국내에서 귀양당한 사람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었다. 서울에서 먼 지역이라는 점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모두 700명이 전국에 걸쳐 유배를 당했는데 그 가운데 54명이 진도로 귀양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다. 유명한 함경남도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이 두 고을의 유배자인 21명보다 두 배나 더 많다. 삼수와 갑산은 지세가 험하고 추워서 사람이 살기 힘들다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말에 ‘삼수갑산을 가다’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왕실을 둘러싸고 권력다툼을 벌이다 패배한 우두머리와 핵심 세력들은 유배를 당했다. 옛날 유배자들은 요즘 말로 하면 정치범들이다. 특히 조선시대 유배자들은 사대부 출신이 많았다. 사대부들은 정치, 학문, 예술을 독점했던 계층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대개 문장에 능했다. 또 그림에 능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가 있다. 이광사는 조선 후기 명필이자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광사는 시(詩)·서(書)·화(畵) 세 부문에 두루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광사는 함경도 회령에서 처음 유배생활을 한 뒤 진도로 옮겨져 22년 동안 살았다.

또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가 있다. 정만조는 조선 후기 고종 때 고위 관료를 지냈다. 정만조는 1896년 진도에 유배되어 12년을 살았다. 정만조는 학식이 높아 유배에서 풀려난 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강사를 지냈다. 또 정만조는 『고종실록(高宗實錄)』과 『순종실록(純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정만조는 시문에 뛰어났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또한 손재형이 여섯 살 때까지 정만조손재형의 집 뒤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서당을 열었다. 정만조는 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정만조의 유배생활은 소전이 서예를 공부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진도에 귀양살이를 하던 사람들은 서울에서 누렸던 영화를 잊으려고 유배지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더러는 노래하고 춤추는 일에 일가견이 있었다. 서울에서 권세를 쥐고 살 때 춤, 노래, 악기에 능하기로 장안에서 소문난 예술가들과 함께 풍류를 즐겼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진도 출신으로 조선 후기 대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허련이 있다. 그는 초의선사(艸衣禪師)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 후 허련은 30대 초반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문하에 들어가 서화(書畵) 수업을 받았다. 허련초의선사를 만나고 추사 김정희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일찍이 진도에 유배되어 온 사람들에게나 그들의 제자에게서 기본 실력을 충실하게 닦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남종화의 대가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정만조의 서당에서 8살 때부터 글과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08년 허백련은 그의 나이 18살 되던 해 정만조가 진도 귀양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글과 그림을 배웠다. 그것도 모자라 스승인 정만조를 따라 서울로 상경해 그의 집에서 3년 가까이 기거하기도 했다.

박종기는 20세기 한국 국악의 거두로 추앙받는 사람 중 하나이다. 박종기가 지은 대금산조가 오늘날 한범수(韓範洙)류 대금산조의 기본이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박종기는 구전되어 내려오던 「진도아리랑」을 오늘날과 같은 세련된 형식으로 다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종기의 타고난 음악적 감각을 개발해 준 이가 그의 부친 박덕인이었다. 박종기박덕인, 정만조가 함께 시와 음악을 즐길 때 부친 박덕인을 따라와 놀았다고 한다. 이 사실은 정만조의 저서 『은파유필(恩波濡筆)』에 기록되어 있다.

진도 사람들은 그들 고유의 노래와 춤으로 서울에서 온, 한때는 귀한 몸이었던 유배자들을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진도 사람들은 음악과 춤에 일가견이 있었을 유배자들의 훈수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음악과 춤의 세계를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진도의 토속 문화는 진도로 유배되어 온 사람들을 통해 자연히 서울의 수준 높은 문화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진도의 문화를 유배문화라고도 말한다.

[풍요의 섬, 진도]

진도는 국내 최고의 유배지였던 이미지와는 달리 모든 것이 풍요로운 땅이다. 국내 제2의 유배지 삼수갑산과는 아주 다른 조건의 섬이다. 우선 산이 그리 높지 않고 기름진 작은 평야가 있다. 게다가 월동작물을 가꿀 만큼 날씨가 따듯하다.

진도를 처음 방문하는 외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세 번 놀란다고 한다. 먼저 진도가 작은 섬인 줄 알았는데 넓고 비옥한 농토가 있는 고장인 것을 보고 놀라고, 평범한 시골인 줄 알았는데 가는 곳마다 전문 소리꾼이나 화가 수준의 토착 예술인들이 살고 있어 놀라며,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을 붙잡고 미역이나 대파 등 선물을 한보따리 싸주는 인심에 놀란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진도가 풍요로운 땅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땅이 풍요롭지 않고서야 문화와 예술이 발달할 수 없고, 땅이 많은 것을 만들어내지 않고서야 인심이 후할 리가 없는 것이다.

옛날부터 진도에는 한 해 농사를 지어 삼 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진도는 농토가 많을 수밖에 없는 땅의 조건을 지니고 있다. 진도는 전체 면적의 70% 정도가 산과 구릉지이다. 진도의 산들은 대체로 200~400m 정도로 낮은 편이다. 이 정도의 산세이면 밭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진도의 해안선은 총 662.3㎞로 리아스식 해안이다. 이와 같은 형세로 진도에는 수많은 갯벌이 들쭉날쭉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진도 사람들은 언제든지 갯벌에 나가 낙지와 조개 등 해산물을 넉넉하게 채취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도 사람들은 그동안 부지런히 갯벌을 논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진도에는 섬치고는 꽤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섬들로 이루어진 조도면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 진도 읍면 사람들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며 살아왔다. 어업을 전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드물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진도의 민요 가운데는 어장을 무대로 한 노래보다는 들판을 무대로 한 노래가 발달되어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남도 들노래」(국가무형문화재 제51호)이다.

진도에는 산간 지대에서 발원하는 진도천과 의신천 등 그 길이는 짧지만 실핏줄처럼 온 들판을 적시는 작은 하천들이 형성되어 있다. 거기에다 진도의 들판은 원래 중생층 점판암 토질로 유기질이 많아 비옥하다. 갯벌을 간척한 논에는 원래 갯벌 밑에 퇴적되었던 유기체 층이 녹아 있다. 그 유기체 층이 영양분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간척지에서는 맛 좋은 쌀을 생산할 수 있었다. 진도의 농작물이 특산품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장이라고 해서 빈약한 것이 아니었다. 진도에는 논에 먹을 것이 없으면 밭에 먹을 것이 있었다.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면 바다에 먹을 것이 있었다.

진도는 230개의 섬으로 형성되어 있다. 섬은 고기들이 모여들고 해초가 달라붙는 거대한 인공어초와 같은 곳이다. 거기에다 섬 주변은 물살이 빠르게 흘러가니 오염원이 어장에 머물지 않아 바다가 깨끗하다. 거대한 인공 어초가 많고 바닷물이 깨끗하다 보니 어장 또한 풍요로웠다. 그래서 진도의 수산물도 특산품으로 인정받는다.

진도는 먹고살기에만 좋은 땅이 아니다. 구경하면서 즐길 것이 많은 아름다운 땅이기도 하다. 진도는 한반도 남서 방향의 소백산맥 지맥이 황해에 이르러 서서히 침강하여 이루어진 다도해 섬이다. 다도해 섬인 진도는 해안선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바람과 파도에 깎여지면서 아름다운 해안과 해상 풍경을 연출한다. 그래서 새 떼처럼 섬이 오밀조밀하게 떠 있는 바다에 관매8경이 생겼다. 세방낙조에서는 오색 빛깔로 황홀하게 일몰이 떨어진다. 백조들은 다도해가 바라다 보이는 해안을 날아다닌다.

진도 풍경을 운치 있게 만드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다. 진도의 풍경은 은은하게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매력이 있다. 진도의 땅은 농토이든 어장이든 풍요롭다. 그것도 경치가 요란스럽지 않게 수려한 땅이다. 그래서 진도는 한자 표기가 뜻하는 대로 ‘보배로운 섬’이다.

[역사의 섬, 진도]

진도는 서울에서 아득히 먼 거리에 떨어진 곳이지만 풍요로운 섬이기에 역설적으로 격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유적지를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혹독한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진도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겪고 그 사정을 아는 한을 안고 살았다.

진도 땅은 확실히 보물 같은 섬이어서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 땅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태봉국(泰封國)의 장수가 되어 견훤의 후백제를 침공할 때 진도를 먼저 차지했다. 왕건은 이를 발판으로 호남 곡창의 중심인 나주를 차지했던 것이다. 진도가 육지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가치가 있어 일찍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삼별초가 몽고와 대항하기 위해 찾아든 땅도 진도이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자기들의 나라를 선포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오랑(五狼)이었다. 삼별초는 진도 진도 용장성을 오랑국의 도읍지로 삼았다. 삼별초는 10개월 동안 진도에서 국가 경영을 했다. 진도는 여몽연합군에 대항해 전쟁을 수행하는 삼별초에게 군량미를 충분하게 공급할 수 있는 땅이었다. 그래서 진도는 민족 자주성이란 국가적 자부심을 회고해 볼 수 있는 진도 용장성을 비롯한 수많은 삼별초 유적지를 갖게 된 것이다.

삼별초가 쫓겨나간 진도에는 원주민들의 통곡 소리가 진동했다. 고려 장수 김방경의 군대는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몽고 군대도 남녀 포로 1만 여 명을 데려갔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을 감안하면 진도는 거의 사람이 없는 황무지가 되었을 것이다. 몽고 군사들에게 잡혀가 포로생활을 하거나 몽고의 노예로 팔려갔던 진도 사람들이 풀려난 것은 22년만인 1293년(충렬왕 19)이었다. 진도 땅 구석구석마다 한이 서리지 않는 곳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진도는 다시 한 번 역사의 격랑에 휩쓸렸다. 바로 임진왜란 때 명량해전의 영향권에 직접 들어간 것이다. 울돌목이란 국가적 위기를 건져준 천혜의 전략적 수단이 된 바다를 끼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진도 사람들은 조선 수군을 도와 싸웠다. 조선 수군은 승리했지만 진도 사람들을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조선 수군은 명량대첩 이후 지금의 신안군 지도면을 거쳐 영광군 홍농 방면으로 잠시 퇴각했다. 이를 틈타 일본 군대는 진도와 해남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그 바람에 진도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래서 진도 사람들에게는 한이 많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진도 사람들은 삼별초의 난에서 보듯 한국 사람들의 공통적 정서인 한을 일찍 그리고 깊게 겪었다. 거기에다 서울에서 내려온 유배자들의 한을 보았다. 그래서 한을 누구보다 더 크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도 사람들은 한에 좌절하지 않았다. 삼별초의 난과 임진왜란 등 감당하기 힘든 난리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쑥대밭이 되고 피로 물들었어도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본래부터 풍요로운 땅과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다. 그들은 희망을 보았기에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들은 슬픔과 깊은 한을 알았기에 슬픔과 한을 깊이 걸러내는 노래를 불렀고 춤을 추었다. 그렇게 진도 사람들은 슬픔과 한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찬란한 지역 민속 문화의 꽃을 피웠다. 진도 문화의 특징은 우선 형식이 세련되었다. 어떤 이들은 진도 문화를 유배문화라고 말한다. 어쩌면 유배자들이 전수한 서울 양반문화가 진도 토속문화에 형식적 세련미를 보탰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도 문화에 독창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도 사람만이 보여주는 특별한 문화세계가 있다. 진도 사람들은 세련되게 다듬은 형식에 자신들만이 갖는 원색적 감정을 담아냈다.

그 결과 진도 문화에는 진도 특유의 독창성이 가미되었다. 구성이 탄탄하고 내용이 솔직하다. 한 마디로 예술성이 뛰어나다. 세련된 형식에 내용이 솔직하면서도 충실하게 잘 담겨진 예술은 사람들의 폭넓은 호응과 높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진도 민속문화가 그렇다. 진도 씻김굿, 진도다시래기, 「진도 아리랑」, 「진도 만가」, 「남도 들노래」가 그러하다. 진도 씻김굿 음악은 지난 1979년 세계민속음악제에서 금상을 획득했다. 진도의 민속문화가 거의 모두 국가 혹은 지방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