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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471
한자 鳴梁大捷
영어음역 Myeongnyang Daecheop
영어의미역 Great Victory at Myeongnyang
이칭/별칭 없음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해남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해전
발생(시작)연도/일시 1597년 9월 16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97년 9월 16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남도 진도군과 해남군 사이의 명량해협
관련인물/단체 이순신|안위|김응함|송여종|정응두|구루시마 미치후사

[정의]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명량해협(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역사적배경]

1597년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해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고,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왜의 수군과 싸웠으나 다대포(多大浦)와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였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조정은 그해 7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남아 있는 전력은 전선 13척과 수군 120명뿐이었다.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을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에 몇 차례 기습공격을 해왔으나 조선 수군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과]

1597년 9월 14일 적선 55척이 어란포에 정박하자,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겨 명량을 앞에 두고 진을 설치했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적선 133척이 명량을 거쳐 우수영 앞바다로 돌진해오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결과]

명량은 간만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하고자 했다. 9월 16일 새벽 왜의 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현자(玄字)·지자(地字)의 총통(銃筒)을 쏘면서 공격했다. 군사력은 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순신은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왜군 준사(俊沙)가 왜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에 왜군이 분노해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적선 31척을 격파했고, 나머지 적선은 달아났다.

[의의와 평가]

명량대첩 은 13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왜군이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싸움은 세계해전사의 전무후무한 대승이었고, 조선은 명량대첩 이후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명량대첩 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장하기 위해서는 해전 자체만을 놓고 전승의 요인을 분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량해전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해남, 강진, 영암 일대에서는 왜군이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의 의병전도 그만큼 활발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가까운 육상에서 전개된 연해 지역민의 항전이 전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므로 명량대첩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요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명량해전이 있었을 무렵 가까운 연해지역에서는 영암의 전몽성·류장춘·박문립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부대의 활동이 수군과의 긴밀한 협력 아래 펼쳐지고 있었으며, 강진과 해남 일대에서도 역시 활발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대첩을 가능하게 한 주된 요인이 해역의 특성과 조류를 이용한 관방전술(關防戰術)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지휘관만의 전술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명량에 최후방어선을 구축한 것부터 현지의 실정과 지리에 밝은 지역출신 인사들의 책략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 해전의 전투요원들 대부분이 당해 연해지역 주민들이었다고 볼 때 누구보다도 현지 사정에 밝은 그들이 관방에 익숙해 있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회령포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군진을 옮겨 17일간 머물렀으니 전투준비가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참여한 수군의 대부분은 전라우수영 관내, 특히 진도와 해남, 영암지역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향선을 이용하여 피난길에 오른 우수영 관내 피난민들도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명량대첩은 자보의식(自保意識)으로 결집된 현지의 지역민들이 수군지휘부와 결합,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여 싸운 자전자수(自戰自守)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해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난선을 전선으로 활용, 피난민들이 전장에 뛰어들어 전투를 함께 하였다는 점에서 향보성(鄕保性) 의병항전의 성격을 띤 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8.04 [경과]. [결과] 수정 <변경 전> 왜의 수군 130여 척이 <변경 후> 왜의 수군 133척이
이용자 의견
df 섬도(島) 시마라고도 읽습니다. 그리고 12척에서 1척이 더 합류해서 13척 맞아요.
  • 답변
  • 디지털진도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08.18
박가현 구루시마가 아니라 구루지마로 알고 있는데요
  • 답변
  • 디지털진도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은 島 시마, 또는 지마라고 읽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전과 동일하게 구루시마로 기재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8.14
박가현 13척의 배가 아니라 12척의 배입니다
  • 답변
  • 디지털진도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중에 남아 있던 전선(戰船)12척에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서 13척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8.14
오민석 이유정님 명량해협에 들어온배는 130척이고 아직 진입하지못한배는 200척 총합해서330척입니다
  • 답변
  • 디지털진도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정확한 수치로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8.03
이유정 왜군의 배는 130척이 아닌 330척입니다
  • 답변
  • 디지털진도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정확한 수치로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