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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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時烈-道峯書院配享論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종현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694년 5월 27일 - 이숙이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배식하도록 상소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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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694년 8월 22일 - 이기익 등이 송시열의 도봉서원 배향을 청하는 상소를 올림 |
전개 시기/일시 | 1695년 3월 26일 - 호남 유생들이 송시열의 도봉서원 배향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 |
전개 시기/일시 | 1695년 12월 16일 - 정호가 송시열의 도봉서원 입향이 배향(配享)이 아니라 병향(並享)임을 확인함 |
전개 시기/일시 | 1696년 1월 10일 - 송시열 도봉서원 향사 |
전개 시기/일시 | 1696년 1월 10일 - 송시열의 도봉서원 향사를 반대하는 소를 올린 이제억 등을 벌함 |
전개 시기/일시 | 1696년 1월 19일 - 관학 유생들이 송시열의 도봉서원 합향이 타당함을 상소로 논함 |
전개 시기/일시 | 1696년 1월 22일 - 송시열의 병향을 주장한 정호를 배척하는 상소가 올라옴 |
전개 시기/일시 | 1696년 2월 28일 - 남인 정시한이 노론·소론 양쪽을 모두 비판하는 상소를 올림 |
전개 시기/일시 | 1696년 3월 1일 - 노론과 소론 남인계에 공동 대응하는 상소를 올림 |
전개 시기/일시 | 1723년 3월 3일 - 송시열의 도봉서원 병향이 옳지 않다는 소론계 유생의 상소로 송시열 도봉서원 출향 |
종결 시기/일시 | 1725년 1월 17일 - 송시열의 도봉서원 재배향 및 논쟁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송시열의 도봉서원 배향 논쟁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종결 장소 | 송시열의 도봉서원 배향 논쟁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성격 | 송시열의 도봉서원 향사 논쟁 |
관련 인물/단체 | 노론|소론|남인|정호|김창협|정시한|권상하|박세채 |
[정의]
조선 후기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도봉서원에 송시열을 향사하는 문제로 노론·소론·남인 간에 벌어진 논쟁.
[역사적 배경]
17세기 말 도봉서원에 송시열을 향사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당시 도봉서원의 위상과 정치적 상황이 상당히 반영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도봉서원은 1574년 양주 목사로 부임한 남언경(南彦經)이 조광조를 배향하고 서원 공역을 시작한 이래, 허엽(許曄)·백인걸(白仁傑) 등 중앙 관인들과 근기 사림들의 도움으로 완성을 하고 사액을 받았다. 이이(李珥)가 도봉서원의 기문을 짓고, 서울 지역의 서인계 사림들과 관인들의 자금 원조가 이어지면서 서인계 학통의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다.
도봉서원은 이후 100여 년간 서울 경기 지역의 서인 유력 인사들이 많이 찾는 교유처가 되었다. 송시열의 도봉서원 제향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 1694년 갑술환국 이후에는 서인 노론과 소론이 각각 자파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원 건립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때 마침 신원된 송시열을 제향하려는 서원들이 도봉서원을 포함하여 10개가 넘었는데, 이는 노론 학파·정파의 명분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경과]
갑술환국에 따른 후속 조치가 이루어진 1694년 5월에 유생 이숙(李埱)이 기사환국 때 죽은 송시열의 행적은 조광조와 다를 바 없다면서 조광조와 함께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향사하기를 상소로 청하였다. 같은 해 8월 22일에 유생 이기익(李箕翊)에 의한, 10월에 성균관 유생들에 의한 송시열의 도봉서원 향사 청원이 있었고, 곧 송시열을 제향하는 것을 허락하는 분부가 내려졌다. 그러자 1695년 3월 26일에 호남 유생들이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동시에 서원 남설에 대한 폐단을 지적하는 의론이 조정 내에 일었다.
서원 남설의 문제를 제기하며 동시에 송시열의 도봉서원 제향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은 대부분 소론 계열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는 송시열의 제향을 통해 정치적 명분을 확고히 하려는 노론 측의 의도에 일정한 제동을 걸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호(鄭澔)는 1695년 12월 10일 소론 측의 의도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데 이어 13일에는 송시열의 제향 문제가 예조의 실수로 ‘병향(並享)’이 아니라 ‘배향(配享)’으로 잘못 처리되었다면서 이를 시정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와 같이 많은 논란이 있던 중에 1696년 1월 10일에 송시열이 도봉서원에 향사되었다. 그러자 이제억(李濟億) 등 남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민진형과 윤지선 등 소론들이 이를 우회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여기에 대항하여 노론 유생들이 1월 19일 연명 상소를 올리는 등 점차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2월 28일 남인 정시한(丁時翰)이 본격적으로 송시열의 도봉서원 향사와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까지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노론과 소론의 대립 양상은 금세 남인을 합동하여 비판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3월 1일에는 노론과 소론이 연합하여 정시한을 벌하라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송시열의 도봉서원 제향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결과]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송시열의 도봉서원 제향에 대한 논의는 경종 대의 신임사화로 인해 노론이 정치적 실권을 모두 잃었을 때 다시 촉발되었다. 1723년 3월 3일에 소론계 유생들이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향사한 일은 숙종의 본의가 아니었다면서 이를 취소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것이 받아 들여져서 송시열은 도봉서원에서 출향되었다. 이에 대응한 노론 측의 반응은 미미했다. 그러나 곧 경종이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종 대에 출향되었던 노론계 인사들이 대거 복향(復享)되었고, 1725년 1월 17일 송시열이 도봉서원에 다시 향사됨으로써 논쟁이 마무리 되었다.
[의의와 평가]
도봉서원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남인이 벌인 논쟁은 숙종 대 갑술환국 이후부터 영조가 즉위할 때까지의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벌어졌다. 도봉서원에 송시열을 향사하려는 시도는 갑술환국 이후 노론 계열의 정치적 명분과 학파적 정당성을 확고히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에 반하여 송시열의 도봉서원 제향을 반대하던 소론과 남인은 노론의 거두였던 송시열의 서원 향사를 저지함으로써 노론을 저지하려 하였다. 일종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던 이 논쟁이 특히 도봉서원을 둘러싸고 크게 벌어졌던 이유는 서울 지역에서 도봉서원이 가지는 의미가 서인에게 매우 컸기 때문이다. 사림의 상징인 조광조를 향사하는 도봉서원은 양쪽 모두에게 정치적·학문적 정당성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