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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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판소리의 하나. 「열사가」는 역사적 위인들의 생애를 소리로 엮어 부르는 창작 판소리의 하나이다. 해방을 전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된 노래로서, 지금도 진도 지역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는 판소리의 하나이다. 「열사가」는 일본의 부당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의미로, 주로 이준·안중근·윤봉길·유관순 등 일제에 대하여 폭력적 저항을 했던 인물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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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부르기에 앞서 창자들이 목을 다스르기 위해 불렀던 짧은 노래. 단가는 본래 판소리 소리판에서 목을 다스르기 위해 불리던 노래이나 진도지역의 소리판에서는 곧잘 독립적인 노래의 형태로 불리기도 하였다. 특히 다시래기나 씻김굿에서 청중들이 참여하는 거리 등에 단골메뉴로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단가는 주로 이병기나 김득수, 신치선 등에 의해 보급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파급된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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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출신의 민속예술인. “북을 칠려면 양태옥이만큼 쳐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춤에 일가를 이룬 양태옥은 1918년 군내면 정자리에서 출생하였다. 「진도 북놀이」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비무계 출신으로 정의현과 함께 진도국악원을 설립하는 등 진도 국악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국악협회 전라남도위원으로 재직하였다. 비무계로 신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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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에 있는 민속놀이 전수관. 임회면 민속놀이 전수관은 인간문화재였던 고 장성천(임회면장 역임) 선생이 1970년대에 십일시 우시장 도축 건물을 개조해 전수관으로 운영하면서 설립되었다.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 산86-5번지에 있다. 현재 임회면 민속놀이 전수관에서는 진도북놀이와 남도민요 등을 전수하고 있으며, 임회면 석교리 박영수씨가 관리를 맡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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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출신의 민속예술인. 장성천은 20세 때부터 북놀이 가락과 장구, 아쟁, 판소리 등을 배웠다. 한편, 행정공무원으로 출발하여 면장으로 정년퇴임하였다. 1987년 8월 25일에 「진도 북놀이」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면서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취미로 시작한 국악활동이 말년에는 전공이 된 셈이다. 장성천은 1984년부터 「진도 북놀이」보존회를 만든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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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가 인지마을의 경제적 발전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섣불리 대답하기 곤란하다. 다만 문화적인 영향면에서 본다면, 진도의 민속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마을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점과, 많은 명인들을 배출한 마을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인지마을의 문화적 위상을 무형문화재가 높였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지리에 있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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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도북놀이가 인지마을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못북기원설’의 측면에서 보면, 남도들노래가 못북의 배경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북놀이와 들노래의 친연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따라서 북춤으로 지정된 인간문화재가 인지마을에 없다는 것을 빼고는 인지마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북춤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박병천을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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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에 속하는 17개 군(郡) 중의 한 군. 진도군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430.6㎢로 전라남도 면적의 3.6%를 차지한다. 진도·상조도·하조도·가사도 등 23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의 대부분은 진도군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도군에는 진도읍·군내면·고군면·의신면·임회면·지산면·조도면, 가사출장소·거차출장소 등 1개 읍, 6개 면, 2개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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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을 어깨에 맨 채 양손에 채를 쥐고 추는 국내 유일의 양북춤 진도북춤은 흔히 ‘북춤’과 ‘북놀이’로 혼용해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굳이 분류하자면, 군무를 중심으로 북을 메고 추는 춤을 북놀이라 하고 독무를 중심으로 북을 메고 추는 춤을 북춤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북놀이로 지정되었으므로 ‘북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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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삼현(任三鉉)[1874~1948]: 오위장을 지낸 임경록(任慶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호석(湖石)이며, 1889년 16세가 되던 해에 소치(小癡) 허련(許練)의 제자로 입문하여 그림을 공부했다. 운림산방의 살림을 운영했고, 소치 허련이 1893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의 휘하에서 그림과 글씨를 공부하다 소치의 유언을 따라 운림산방을 관리했다. 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