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광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03
한자 文光彩
영어공식명칭 Mun Gwangchae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1년연표보기 - 문광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문광채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3·1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5일 - 문광채 「보안법」 위반 혐의로 8월 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19년 12월 15일연표보기 - 문광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문광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4년 - 3·1의거 애국선열 추념탑 및 용진 3·1의거 기념비 건립
출생지 송촌리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지도보기
활동지 송촌리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지도보기
활동지 조안리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문광채(文光彩)[1861~1919]는 1861년 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에서 태어났으며, 3·1운동에 참여할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경기도 양주군3·1운동은 각 면 단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지금의 남양주시 와부읍조안면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덕소리 일대의 독립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5일에 일어났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시작되고 「독립선언서」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정성(李正成)[1878~1948]·김춘경(金春經)[1894~1952]·김현모(金顯模)[1878~1938] 등이 독립 만세 시위를 사전에 계획하였다. 이정성 등은 용진교회(龍津敎會)의 기독교인들로서, 용진교회가 1914년 설립한 사립 경진학교(敬進學校)의 교사·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주동자들은 1919년 3월 15일 아침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키는 한편, 시위 대열을 이끌 적극 가담자들을 규합하여 나갔다. 문광채를 비롯하여 전태현(全泰鉉)[1888~?]·김현유(金鉉有)[1881~1942]·박경식(朴景植)[1882~?]·이내한(李來漢)[1893~1954]·박수만(朴壽萬)[1897~1980]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시위 대열은 사전 제작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양주군 와부면 일대를 행진하였다.

이 가운데 문광채는 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와부면 조안리 방향으로 시위대를 이끌며 독립 만세 구호를 전파하였다. 와부면 송촌리[현 조안면 송촌리]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 운동은 시위가 전개될수록 점차 격렬해졌으며, 시위대는 일제 침략의 말단 기구인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탄압하였다.

시위 이후 문광채이정성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의 상고심도 기각되어 8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문광채는 형기 마감을 얼마 남기지 않은 채 1919년 12월 15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문광채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 운동과 여기에 참여한 문광채 등의 인물을 기념하고자 1994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3·1의거 애국선열 추념탑과 용진 3·1의거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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