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신
-
조선 중기에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전라남도 진도군에서의 유배 생활에 관한 심사를 읊은 글.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은 노수신이 진도에 유배와서 자기의 심사를 이천자(二千字)로 적어 놓은 글로 노수신 선생의 문집에 실려 있다. 내가 귀양살이 온지도 어언 반년이 되었구나. 온 포구는 왜적들이 발동하여 피에 젖었고 석가래 사이에 시(詩) 몇 편 걸려 있어 읊으려니 목이...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중휘(仲輝), 호는 의졸(宜拙). 좌의정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남아(南啞)이고, 증조부는 남언순(南彦純), 아버지는 평강현감 남리(南裡)이다. 어머니는 서주(徐澍)의 딸이다. 아들은 남세하(南世夏)·남상하(南相夏)·남수하(南壽夏)·남성하(南聖夏)·남서하(南瑞夏)·남경하(南敬夏)·남덕하(南德夏)가 있다. 사위는 민진장(閔鎭...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노숭(盧嵩)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노경장(盧敬長)이고, 할아버지는 노후(盧珝)이고,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홍(盧鴻)이다. 1531년 성리학자로 명망 높은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혼인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노준명(盧峻命)의 증조이다....
-
진도의 전통 세습무계. 진도의 세습무계에서 노씨무계의 비중은 매우 작다. 노씨무계 중 1960년대 후반까지 군내면 송산리에 거주하며 판을 소유하고 굿을 했던 노00는 1970년대에 들어서 고군면 오일시 이완순에게 판을 팔아버렸다. 노00의 차남(69)은 “내가 총각 때 이완순과 결혼할 뻔했다. 그때는 완순이가 아니라 귀자라는 이름이었다.”고 말했다. 이 말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예술. 근대 이전까지 진도군의 문학은 글자가 아닌 말로써 노래나 이야기로 구성되거나 놀이 속에 녹아 대를 이어 전승되어왔다. 즉 근대 이전의 진도문학은 설화나「진도아리랑」·「강강술래」·「진도씻김굿」 등의 민요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었다. 설화들은 주로 지형과 관련한 내용이 많고, 사찰이나 암자, 높은 산의 샘 등에 사연을 담았다. 또 묘지 명당터와...
-
문학, 미술, 서예, 음악, 무용 등 각기 독특한 표현양식에 의하여 아름다움을 창작하여 표현하는 활동 또는 그 작품. 전라남도 진도군의 문화예술은 진도군민들 각각의 삶의 가치를 높이고, 바쁜 현대생활의 속에서도 정서적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총체적 개념을 모두 포함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진도의 문화예술의 중심은 시·서·화·창이다. 시(詩)는 유배인들을 중심으로 많이 창작되었는데,...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익선(翼仙), 호는 경신재(敬愼齋). 진도 입도조 박희정(朴希貞)의 6세손이며, 아버지 박윤(朴潤)과 어머니 장흥임씨 임순공(任純恭)의 딸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밀양박씨로 아들 박춘(朴春), 박하(朴夏), 박추(朴秋) 3형제를 두었다. 손자 박승종(朴丞宗)은 제주판관을 지냈다. 소재 노수신(盧守愼)[1515...
-
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던 노수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서원. 진도에 귀양살이를 하던 유학자들이 진도 군민들을 가르쳐 문풍을 일으켰으므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세워 모시는 전통이 생겼다. 봉암서원에 대한 첫 기록은『영조실록』에 나오며 1759년 간행한『여지도서』 진도 「단묘(壇廟)」 항목에도 나온다. 1791년『진도군읍지』에 따르면 원생이 60명이었다고 한다. 이 서원은...
-
조선시대에 사설로 운영된 초등교육기관. 서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등교육기관이지만, 그 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에 부락 단위로 운영되는 ‘경당’이라는 학교가 있었는데,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에 이르는 동안 각처에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서당과 관련된 기록은 1124년(인종 2)에 고려에 왔던 송나라의 사신 서장관(書狀官) 서긍(徐兢)이 저술...
-
자연과 삶에 대한 풍부한 감성을 은율이 담긴 글로 나타낸 문학작품.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진도군의 진도씻김굿은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서사시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서정성을 내포한 시작품에 다름없다. 글자를 잘 몰랐던 우리 선조들은 진도아리랑이나 강강술래의 매김소리에 2행시의 형식을 불어넣어 창작을 해왔다. 시가 원시농경사회의 풍년을 비는 제례의식에서 읊었던 주문(呪文)...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원서(元瑞)·군서(君瑞), 호는 묵재(默齋)·묵치(默癡)·적안(適安). 첨정(僉正) 신목(申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신민일(申敏一)이고, 아버지는 부사 신상(申恦)이며, 어머니는 이흥인(李興仁)의 딸이다. 동생으로 신명륭(申命隆)이 있고, 아들에 신유, 신임, 신심, 손자에는 신사철(申思喆), 신사영(申思永), 신사건(申思建...
-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에 있는 행정리.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이 1547년 순천을 거쳐 안치리로 유배되어 기거하였으며, 1750년 경 그 후손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 뒤 1900년대 현풍곽씨와 김해김씨가 신안에서 살다가 안치리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본래 진도군 지산면의 지역으로서 소개 또는 소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안치리는 전라남도 진도군 지...
-
어떤 지역에 유배된 사람들이 유배생활 중에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형성된 중앙문화와 비교되는 지역문화. 유배문화란 어느 지역에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유배생활 중에 지역주민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훈육하면서 중앙의 수준 높은 문물을 전해주어 발전된 지역문화를 말한다. 반대로 유배인 스스로가 유배지역의 토착문화나 민속, 예술 등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학문이나 경륜, 예술적 자질들을 발전...
-
조선말기 진도로 유배된 학자.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경(大卿), 호는 무정(茂亭)이다. 서울 출신이고 아버지는 정기우(鄭基雨), 할아버지는 정윤용(鄭允容), 증조부는 정동일(鄭東逸)이다. 아들로 정인형(鄭寅衡)이 있다.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학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1858년(철종 9)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예조참의, 승지, 내부참의, 규장각부제학, 중...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 1378년 전라도도순문사로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1388년에는 요동(遼東) 정벌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공...
-
인쇄술을 이용하여 문서, 회화, 사진 등의 저작물을 복제하여 다수 독자에게 발매 또는 배포하는 일. 출판인쇄는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본질적인 기능으로 하며, 문화의 보호와 전승 및 발전과 새로운 문화의 창조과정에서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출판인쇄는 저작물의 복제가 대부분 인쇄술에 의하여 행해진다는 점에서 인쇄 미디어라고 한다. 진도는 출판시장이 형성되기 어려운 여건이다....
-
한자문화권에서 한자(漢字)로 창작된 시. 전라남도 진도군은 여러 전란을 겪었던 불운의 섬이기도 했으나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어 섬 자체가 문화유적지라고도 할 수 있다. 지리적 위치상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 조선시대까지 유배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진도 사람들의 문집과 한시작품은 많...
-
조선중기 진도군수를 지낸 문신. 1564년~1565년까지 제66대 진도군수로 재임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은 1547년 진도로 유배되어 19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이때 황인록(黃仁祿)이 진도군수로 있었는데 치정(治政)도 보잘 것이 없었으면서 노수신에게 심한 박대를 가하고 불손하고 무례(無禮)하기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후일 노수신이 해배되어 중앙 관직에 등용되자, 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