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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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藝術 |
영어공식명칭 | Cultural Ar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나경수 |
[정의]
전라남도 진도 지역에서 행해지는 문화적 활동과 관계된 예술 활동.
[개설]
진도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와 같이 민속문화와 전통예술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2013년 8월 30일 전국 최초로 진도군을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예향이라거나 또는 민속문화의 고장으로 알려졌던 진도의 문화, 예술, 민속 등이 그간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추후 강한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2000년 진도군에서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관내외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전국 최초로 군단위 학술집단인 진도학회를 창립하고 매년 학술대회를 지속해 오고 있다. 2024년까지 국제학술대회 18회, 전국학술대회 32회 등 총 50회의 학술대회를 개최하면서 지역 현안은 물론, 진도의 역사와 문화, 예술과 민속 등에 대해 학술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발전 등을 위한 논의를 지속해 왔다. 이러한 성과는 진도가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진도학회는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진도 출신 문화예술인의 삶과 업적’이라는 대주제로 문학, 미술, 음악, 종교에 걸쳐 국내외적으로 명성을 떨친 진도 출신 문화예술인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김현의 문학비평과 문학교육’[2016년 8월 20일], ‘소치 허련의 생애와 작품세계’[2016년 12월 20일], ‘명인 박종기의 예술세계와 진도의 민속문화’[2017년 12월 22일, 국제학술대회], ‘소전 손재형 선생의 삶과 예술세계’[2018년 10월 24일], ‘무송 박병천 선생과 의재 허백련 선생의 삶과 업적’[2019년 10월 23일~24일], ‘철마 정경옥 선생의 삶과 신학세계’[2021년 12월 16일], ‘남농 허건 선생의 삶과 예술세계’[2021년 12월 17일] 등을 주제로 학술발표와 토론을 실시했으며, 2024년에는 진도학회 창립 4반세기를 기념하여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진도의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국내외 학자들의 그간의 연구 성과를 집성하고 앞으로의 발전 방안에 대해 집단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러한 진도학회의 성과는 진도의 문화예술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집성하는 한편, 평가와 제고를 위한 초석 마련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등 기초지방자치단체 유일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진도 출신으로 한국의 현대 서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는 소전 손재형(孫在馨)[1903~1981]과 의재 허백련(許百鍊)[1891~1977], 그리고 그 이전의 인물인 소치 허련(許鍊)[1808~1893]이 있다. 문화예술인으로는 대금산조를 창시한 박종기(朴鍾基)[1880~1947], 명고수로서 이름을 떨쳤던 김득수(金得洙)[1917~1990], 판소리와 창극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박옥진(朴玉珍)[1935~2004], 그리고 북춤과 구음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박병천(朴秉千)[1933~2007] 등이 있다. 한국 문학비평계의 거목 김현(金炫)[1942~1990]도 진도 출신이다. 이러한 토대에서 탄생한 송가인이라는 걸출한 트로트 가수가 현재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진도에는 국립남도국악원이 있어서 남도국악의 산실이자 그 맥을 잇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매주 정기 공연을 하고 있고, 진도군립민속예술단이 매주 토요민속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정기 공연을 진행하여 많은 외지인 관광객과 탐방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통적인 화맥을 잇는 전시를 비롯한 전수 활동과 매주 미술품 경매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한편 진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국가무형유산이 상대적으로 많이 지정되어 있는 바, 진도읍에 자리한 진도무형유산전수관에서는 전수 활동과 공연 활동 등이 연중무휴로 진행되고 있다.
[문화예술의 배경과 전경]
진도개는 너무나 명성이 자자하여 굳이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진도의 구기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두세 배 이상 비싼 값에 팔린다. 흑미(黑米)는 진도에서 생산되는 것만 향기가 난다. 우리나라에서 지리산 뱀이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진도의 뱀이 더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나라의 바다 중에서 진도의 연해안에서 가장 많은 어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또한 고기맛도 으뜸으로 친다. 지금이야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지만, 도시의 골목길을 누비며 미역을 팔러 다니던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는 항상 ‘진도각’이었다. 지금은 다른 지역에 그 명성을 내주었지만, 전국의 유자 중에서 가장 품질이 좋아 늘 진상품으로 바쳐야 했기에 진도 사람들이 유자나무를 일부러 다 베어 버렸다는 말도 전한다. 이러한 1차산업의 생산물은 절대적으로 자연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기후, 토질, 토양, 지형, 해류 등 자연적인 조건일 것이다. 물론 비교의 절대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지만, 진도의 이러한 자연적 환경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선택받은 조건을 구유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 조건만 아니라 인문지리적인 환경 역시 진도의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한 몫을 맡는다. 농산물과 해산물은 질과 양에서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천혜의 조건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전부터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과거 인구 감소 이전에도 농수산 생산물로는 곡창으로 알려진 호남 사람만 먹자면 2년을 먹고, 진도의 경우는 더 풍부해서 10만 명 이상의 사람이 3년을 먹는다고 했다. 세계 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든 특정 지역의 이러한 물적 토대는 문화예술의 번성과 직결된다.
군호인 옥주(沃州)는 비옥한 고장이라는 뜻이다. 군명인 진도(珍島)는 또 한자말을 풀어서 보배의 섬이라고도 한다. 지명은 희망과 기대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달리 지시적 의미를 가진 예도 많다. 비옥한 땅이라는 옥주나 보배의 섬이라는 진도의 군호와 군명은 지향 가치보다는 지시성이 강한 지명으로 보이는 예들이 많다. 진도에 유독 특산물이 많은 까닭은 자연적 조건이 좋아 누리는 특권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천혜의 자연적 조건과는 반대로 진도의 역사적 조건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사에 있어서는, 전면전이 일어났을 경우 진도는 항상 전장의 중심에 놓였다. 후삼국시대 나주 점령을 위해 왕건은 진도부터 공략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원나라가 내침하자 진도는 마지막까지 항몽 결전지가 되었다. 지금의 용장성, 왕무덤재, 궁녀둠벙, 떼무덤 등이 그 증거이다.
세계 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대승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1597]은 바로 진도 바다에서 벌어졌다. 최근 구한말 동학혁명의 마지막 격전지로 밝혀진 진도는 또다시 한국 전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고려의 용장산성 외에도 바닷가에 위치한 남도진성과 금갑진성 역시 군사적 목적의 방어진지로 만들어진 곳으로서 전쟁과 관련된다. 전쟁터라고 하는 것은 승패를 떠나서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는 물론 정신적인 피폐화를 가져온다. 진도는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서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는 수도권에서 먼 원격지임에 틀림없지만, 전쟁에서는 예외 없이 격전지가 되었다. 또 진도는 왜적의 침략에 의해 여러 차례 공도가 되었다.
진도는 이렇듯 자연적 조건과 역사적 조건이 이율배반적이다. 하늘로부터는 선택을 받고, 역사적으로는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의 땅인 것이다. 한편 진도에 관한 인상적 평가로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술의 고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자연과 역사의 이율배반에 못지않은 대극적 아이러니를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주 진도의 향토문화회관에서는 토요민속예술공연이 계속되고 있다. 공연 종목을 바꾸어 가면서 이렇게 매주 민속예술 공연을 할 수 있는 시군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될까? 아마 진도를 제외하고는 잠재적이든 현실적이든 그러한 능력을 가진 시군은 없을 것으로 단언해도 좋을 듯싶다. 예를 들면 안동 하회마을에서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정기 공연을 하지만, 하회별신굿탈놀이라는 단일 종목이며, 진주 촉석루에서도 공연이 있지만 레퍼토리는 단조로우며 지속성도 진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름난 국악인을 수없이 배출시킨 고장으로, 상설 기구인 진도군립민속예술단 중심으로 매주 공연 종목을 달리하면서 연중 상설 민속 공연을 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시군은 전국적으로 진도 말고는 없다 할 것이다.
전국적으로 축제가 많지만, 특히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에서는 매년 많은 민속공연단이 출연 신청을 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축제 담당자들이 당혹해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하나의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2005년도에는 진도에 국립남도국악원이 문을 열었다. 여러 가지 행정적·재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으나, 진도에 국립국악원이 설립된다는 것이 애초부터 명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명분은 다름 아닌 바로 진도 지역의 두터운 민속음악적 전통임에 틀림없다. 음악은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풍류적 기질을 바탕으로 하여 발전한다. 진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풍류적 기질은 바로 민속음악을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일과 함께하는 민속음악, 놀이와 함께 하는 민속음악, 그리고 의식과 함께하는 민속음악 등 다양한 동심원적 확장을 낳으면서 진도의 민속음악은 두터운 층위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진도는 민속음악과는 다른 또 하나의 예술적 양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앞에서 살폈던 것처럼 진도가 서화의 고장이라는 것이다. 소치 허련으로부터 비롯된 남종화의 거대한 화맥을 이룩한 곳이 바로 진도요, 소전 손재형으로 대표되는 현대 서예의 심원한 깊이를 보여 준 곳도 바로 진도이다. 이러한 진도의 서화는 민화와는 계통을 달리하는 선비화요, 선비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림이든 글씨든 그것은 민중과는 거리가 다소 있는 사회적 상층부의 문화요, 그런 점에서 진도의 한 예술적 양상으로 꼽을 수 있는 서화는 바로 양반문화와 예술의 일환이라는 데에 의미 집중이 필요한 부분이다. 최소한 한문을 터득한 수준의 특정인 사이에서만 가능한 예술적 창작이요 향유이기 때문이다.
민중음악과 양반 미술, 그것은 다시 하층 문화와 상층 문화라는 대립적 구조를 그리도록 해 준다. 예향으로서의 진도에 왜 음악은 하층민의 민속음악이 발전을 하고, 미술은 양반들이 즐기는 상층부의 서화가 발전했는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우리는 희미하나마 진도의 역사 속에서 찾아본다.
170여 명에 이르는 양반이 진도에 귀양을 왔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들로부터 받았을 일련의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태라 무엇이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민중문화 또는 민속문화가 두드러지는 도서 지역의 특성, 특히 민속음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편 역사적으로 이름난 유배지라는 확정적인 사실은 양반문화로 대표되는 서화가 왜 진도에서 크게 번성하였는지 그 이유를 막연하게나마 추론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진도는 자연이라는 씨실과 역사라는 날실이 상반된 성격을 지닌 채 직조된 까닭에, 그리고 민중문화로 대표되는 민속이 발전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양반문화로 대표되는 서화 예술이 역시 크게 돋보인다는 점에서 보자면,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특이한 문화적 현상들이 돌출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진도는 이렇듯 아주 특별한 문화예술적 배경[background] 덕분에 문화의 세기를 맞아 성장이 크게 기대되는 전경[foreground]을 가진 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진도 문화예술의 특성]
문화의 특수성은 속성의 유무로 평가되는 문제는 아니다. 일정한 문화를 일관하는 나름의 속성들 중에서 강약의 정도를 근거로 해서 찾아보는 임의적 평가일 뿐이다. 진도의 문화적 특성이라는 것도 따라서 다른 지역에는 전혀 없는 진도만의 어떤 특수하고 독창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문화적 특성은 어떤 단일한 속성만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가 체계적이듯 특성 역시 어떤 단일한 속성으로 구성되기보다는 여러 속성의 연합적 체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진도의 문화는 수많은 문화 요소의 복합적 총체이다. 진도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경우든 복합적이고 다층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관통하고 있을 저변의 특성을 발견해 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뭔가 인식 대상에 대한 특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까닭은 개별적이고 낱낱으로 존재하는 현상들을 묶어 낼 수 있는 나름대로의 틀, 즉 인식의 체계화를 희망하는 이유이다. 진도에는 진도인의 삶을 견인해 온 수많은 문화가 산재하나, 이들은 일률적인 어떤 속성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형성된 것은 아니다. 삶의 필요에 의해서 생성되고, 변화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전체를 구성해 왔다. 이를 아울러 진도의 문화예술적 특성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본다.
진도의 문화예술적 특성 중 하나는 보수성이다. 진도의 전승 문화 중에서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없어지거나 희미해져 버린 옛적의 문화들이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중심으로 하여 진도의 문화적 보수성을 살펴본다. 일찍이 일본의 다케다[竹田旦] 교수가 주목했던 것처럼, 진도는 다른 지역과는 내용을 달리하는 제사 상속권이 전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장자 상속이 일반화된 것에 반해 진도는 상속권 중 일부이기는 하지만 제사 상속권이 아직도 큰아들뿐 아니라 차남 이하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이다. 상속권이란 재산 상속권, 가독 상속권, 제사 상속권 등 다양하다. 물론 이들이 개별적인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계통적 질서를 지니고 있다. 재산 상속은 재산 상속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독권(家督權)과 제사권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 질서와 형식이 찾아진다. 그런데 이러한 상속권은 우리나라에서 18세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자녀 균분 상속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에 이르면 장자 상속으로 제도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18세기 이전의 제사 상속권, 즉 자녀 균분 상속에 준하는 상속제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점은 진도 문화의 보수적 속성을 알려 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국어학을 전공한 이돈주가 주목했던 것으로서, 다른 지역에서는 없어진 것으로 간주되는 고어 형태의 인칭형 접미사가 진도의 방언에서는 여전히 전하고 있다. 가령 장자는 예외지만, 진도에서는 둘째 아들은 ‘두바’, 셋째 아들은 ‘시바’로 부른다. 이때의 ‘바’는 먹보, 잠보 또는 흥부, 놀부 할 때와 같은 동일한 남성형 인칭 접미사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 있는 언어적 전승이다. 그뿐 아니라, 여성형 인칭 접미사에서도 역시 이러한 현상이 발견된다. 가령 큰딸은 ‘큰가’, 둘째 딸은 ‘장가’ 등으로 불리며, 셋째는 ‘시단이’, 넷째는 ‘니단이’ 등으로 부른다.
민속학자인 지춘상은 남도문화제의 심사 결과 때문에 고소를 당한 적이 있었다. 진도 지역에서는 상여가 나갈 때 사물이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느 해인가 진도의 상여놀이가 남도문화제의 민속경연에 참가하여 상위권의 상을 수상하였고, 유학적 이념에 철저한 어떤 분이, 사람이 죽은 슬픈 장송의 마당에서 놀이판에서나 즐기는 사물이 등장하였다는 것에 분개하여, 그러한 출품작에 상을 준 심사위원장을 용납할 수 없다며 고소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 사실이 어떻든 간에 일종의 특이성, 즉 다른 지역 사람들로서는 상식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특이한 민속이 진도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었다는 점이다(고소는 곧 취하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상여놀이뿐 아니라 다시래기 역시 같은 계통의 민속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가집에서 놀아지는 다시래기는 전통적 규범 논리로 보자면 야만적 문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다른 측면에서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풍속으로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춘 민속문화가 여전히 진도에서는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실례이다.
진도의 문화예술적 특성 중 다른 하나는 개방성이다. 이는 물론 진도만의 현상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도서 지역의 문화적 특성으로 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개방성이다. 특히 바다는 자유스러운 교통을 막는 자연적 장애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가장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할 수 있는 사면이 개방된 천혜의 조건이기도 하다. 특히 육로에 비해 해로가 보다 발달했던 전통적 교통 형편으로 보면 바다는 들고 나기가 용이하며, 그런 점에서 섬사람의 인성도 개방적이요, 문화도 개방적이다.
진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요 민속춤으로 꼽히는 진도북춤은 이러한 진도의 개방성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전국적으로 두 손에 북채를 들고 양북을 치는 곳은 흔치 않다. 그러나 이것은 진도 사람들의 독창적 발상이라기보다는 전문적인 유랑 연예 집단이었던 남사당패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농악은 크게 다섯 가지로 유형 분류가 되며, 그중 두 유형은 호남 지역에 분포한다. 좌도굿과 우도굿이 그것이다. 이는 호남 지역 문화의 개성적 발전과 예술적 성숙도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남사당패의 영향을 간과하기 어렵다. 특히 호남의 도서 해안 지역에 남사당패의 영향으로 간주되는 여러 가지 민속 예능이 현전하고 있지만, 진도의 경우는 그 예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강하지 않은가 싶다. 양북을 치면서 멋진 춤사위를 구사하는 진도북춤은 진도 고유의 창안이라기보다는 예능적 감수성이 예민한 진도인들의 수용적 능력과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예이기는 하지만, 진도에는 박첨지놀이라는 것이 전승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남사당놀이 속에 있는 전통 인형극과 유사한 놀이이다. 유랑 연예 집단이던 남사당패가 전국적으로 굿놀이를 하면서 공연을 다니는 가운데 그들이 가진 전문적 연예를 어느 곳에서든 선보였을 것이지만, 진도 사람들은 예민하게 그것들을 받아들여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 독특한 하나의 예능 민속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진도는 서화라는 미술 문화가 발전된 지역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멀리 소급되는 것 같지는 않다. 허련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허련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화풍을 공부하였으며,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를 사사하였다. 허련은 바로 외부의 예술 세계를 받아들여 진도에 미술 문화를 꽃피우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이다. 이는 허련 개인의 생애를 통해 보여 주는 그의 위대한 역할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허련 개인에 의해 그것이 시작되고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도 사람들의 개방적 성향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온 문화를 거역하고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경도하여 비옥하고 풍부한 문화적 토양을 건설하였다는 점에서 진도 문화의 개방적 특성을 돋보이게 하는 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
엉뚱한 예이기는 하지만, 동제의 형식으로 보면 전국적으로 진도만큼 거리제[路祭]의 구성이 발달한 곳도 찾기 어렵다. 동제에서 거리제라고 하는 것은 떠도는 잡귀나 잡신들에게 헌식을 하여 해악을 막자는 의도에서 치러진다. 진도의 거리제는 역사적인 요인도 없지 않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막힘이 없는 개방적인 자연적 형태로 말미암아 생성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소위 비보형 민간신앙이 대단히 발달한 편이다. 마을 단위에서 장치되는 비보의 경우, 특히 마을 앞쪽이 훤히 트여 있는 마을의 경우는 비보적 장치가 매우 발달해 있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우실, 솟대, 입석, 장승 등이 항상적이며, 물리적인 비보 장치라고 한다면, 거리제는 정기적이며 의례적인 비보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특수한 예이기는 하지만, 진도 지역에서 특기할 만한 민간신앙의 사례로서 진도의 여제(厲祭)가 나름대로의 개성적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도 한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양귀법에도 없는 감금형 양귀법으로 개성적 성격 전환을 이룩한 진도의 여제는 바로 진도 사람들이 느끼는 개방성에서 오는 불안에 대한 일종의 잠금 장치일 것이다. 진도는 이렇듯, 그들이 가져온 여러 문화예술적 요소들 중에서 특히 개방적 속성이 농후한 나름대로의 문화예술적 특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와는 반대적인 상황적 구성을 통해 개방성을 제한하는 폐쇄적 속성을 강화하기도 했다.
진도 문화예술의 특성 중 나머지 하나는 창조성이다. 앞에서 진도의 미술 문화인 서화를 개방성과 관련 지어 보기도 하였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문화와 예술의 창조성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겠다. 전승되는 예술과 창조되는 예술이 있다. 전승되는 예술은 민속예술이 그 대표 격일 것이며, 창조되는 예술은 개인의 예술혼이 담긴 신기원의 예술세계를 그려 내는 작품을 낳게 된다. 서화는 대표적인 창작 예술이다. 민중은 전승 예술을 즐기는 데 반해 양반층은 문화적 창조 능력을 기반으로 한 창작 예술을 즐기게 된다. 서화의 평가 자체가 예술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습작이나 모방이 아닌 창조의 세계를 펼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도의 서화적 전통은 진도의 문화와 예술이 내재하고 있는 창조적 역량으로부터 발현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한편 호남 지역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전통적 민요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진도아리랑이다. 진도아리랑은 앞에 붙은 ‘진도’라는 이름 때문에 진도 지역에 한정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진도아리랑은 진도의 민요가 아니라 호남의 민요인 셈이다.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지는 가운데 호남 지역에서는 유독 진도아리랑이 만들어졌다. 언제 그것이 만들어졌는지는 속단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고증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초 진도의 신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 특히 박종기를 중심으로 하는 진도의 예능인들에 의해서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진도아리랑의 선율적 구성은 이미 밝혀진 바처럼, 전통적인 호남의 일노래인 「산아지 타령」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일노래인 「산아지 타령」과는 달리 놀이노래인 진도아리랑은 다른 민요와 짝하기 어려울 정도로 흥겹기가 대단하다. 분석적으로 말해 보자면, 진도아리랑은 「산아지 타령」의 메김소리는 그대로 차용하면서 다만 후렴의 일부 소리를 변형시켜 조흥소로 만들어 놓고 있다. 최소의 노력을 통해서 최대의 효과를 거둔 경제적 예술 창조를 구현한 예인 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진도 지역의 3대 문화예술적 특성은 보수성, 개방성, 창조성을 꼽을 수 있겠다. 이들 낱낱의 의미로 보면 상호 공존하기 어려운 배타적 개념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전체로서 진도의 문화를 뒷받침하는 특성의 자격을 지니는 가운데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는 상황적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허용될 수 있는 요건들이다. 다시 말하면 진도의 문화예술을 관류하는 문화예술적 특성이라는 일정한 문맥 속에서 비로소 상호 배척적일 수 있는 개념들이 상호 견인력을 지니면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도의 문화예술적 특성으로서 꼽은 보수성은 개방성과 배척적인 개념일 수 있지만, 엄연히 같은 자리를 차지하며 공존하고 있으며, 또한 개방적이라는 성격은 창조성과 배척적일 수 있지만 상호 공생적 관계에서 병치하면서 균제적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다.
[문화예술 행사]
진도의 문화 축제는 2012년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된 진도의 문화예술적 가치를 고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전승·보전시키기 위해 개최해 오고 있다. 특히 2024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문화도시로 선정되면서 ‘K-민속문화 글로컬 도시축제’와 연계하여 ‘진도군 보배섬 문화예술제 및 K-민속문화 글로컬도시축제’를 개최하였다. 이는 진도의 3대 축제로 볼 수 있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 ‘진도 꽃게축제’, 그리고 ‘진도 아리랑축제’ 중 아리랑축제를 더욱 확대, 발전시킨 명실상부한 진도의 대표적인 축제이며, 문화예술제이다.
진도군 보배섬 문화예술제는 10월 25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 문화도시 민속문화의 섬, 진도’라는 주제를 내걸고 진도향토문화회관 일원과 진도읍 철마광장 일원에서 펼쳐졌다.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는 ‘진도군 보배섬 문화예술제’가 열렸고, 야외 공연장에서는 체험 행사로 떡메치기, 글짓기, 포토존, 어린이놀이터, 민속놀이경연대회 등이 운영되었으며, 진도군 곳곳에서 시·서·화 작품, 관광 사진, 서화 작품 등의 전시 행사도 함께 열렸다. 철마광장 일원에서는 진도군이 보유한 우수한 민속문화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K-민속문화 글로컬 도시축제’가 개최되었는데, 진도삼락거리예술제, 삼락장터 등 다양한 민속문화 공연과 체험·전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한편 좀 더 현대적이면 젊은 대중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었다.
[문화예술단체]
2024년 12월 기준 진도군 지역에는 38개의 문화예술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예총단체 6개, 예술단체 21개, 문화 단체 11개가 그것이다. 6개 예총단체는 각각 연간 문화예술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진도지회는 진도문화예술제 등 5종, 한국국악협회 진도지부는 남도민요 경창대회 등 3종, 한국문인협회 진도군지부는 명량문학상 개최 등 5종, 한국미술협회 진도지부는 소치미술대전 등 6종, 한국사진작가협회 진도지부는 진도문화예술 사진대회 등 2종, 한국연예협회 진도지부는 청소년 열린음악회 등 2종을 수행한다. 예술단체로는 진도여성합창단, 진도 논배미축제추진위원회, 진도학회, 진도사미회, 지산면민속전수관, 당산문학회, 진도서예협회, 당제추진위원회, 진도강강술래보존회, 진도북놀이보존회, 진도아리랑음악단, 진도한시협회, 쌍계사산사음악회추진위원회, 진도민속문화예술단, 진도한춤보존회, 남도민속놀이문화예술원, 진도문화원 등이다.
[문화예술 권역과 의의]
진도는 도서 지역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외지 사람들이 진도를 둘러본 뒤 소감을 말하면서 섬 같지 않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일단 섬 안으로 들어오면 섬의 모습보다는 우리나라의 일반 농촌 지역과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모습과는 달리 진도는 두 개의 뚜렷한 문화권으로 나뉜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부와 서부로 갈린다. 이를 역사적으로 보면 진도는 1018년(현종 9) 진도군으로 병합되기 이전에는 가흥현과 임회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흥현은 동부에 속하고, 임회현은 서부에 속하였다. 지금의 읍면 단위로 볼 때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임회현은 임회면, 지산면, 조도면이 속하고, 가흥현은 고군면, 군내면, 의신면, 진도읍이 해당한다.
두 지역 사이의 뚜렷한 문화적 차이는 우선 동부는 미술이 강하고, 서부는 음악이 세다는 것이다. 유명한 의신면의 운림산방은 진도의 미술을 대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산면의 인지리나 소포리는 민속음악으로 유명한 곳이다. 왜 진도에 이렇듯 두 가지의 예술적 문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지는 그 배후의 문화를 읽어야만 비로소 이해 가능하다. 동부는 비교적 육지 문화의 영향을 받기에 용이한 반면, 서부는 순수한 도서 지역의 문화를 간직할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예전에 서당이 있던 마을이나 장소를 보면 동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서부 지역은 이러한 유교적 또는 육지 문화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순수한 민속문화가 더 발전하였다.
전형적인 예 중의 하나로, 진도 동부 지역에서는 반촌과 민촌의 개념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흔히 동부 지역에서 노거수가 마을 숲을 이루고 있는 마을은 반촌으로 불린다. 반면에 서부 지역의 경우는 반촌, 민촌의 개념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사회계층적 분화가 명확하지 않았던 지역인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곧 동부는 미술권, 서부는 음악권으로 나뉘는 중요한 배경적 요소가 된다. 전통적인 미술은 흔히 서화(書畵)라고 부르는데,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한문을 기본적인 소양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서당과 같은 지적 기반을 닦을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서부 지역의 경우는 음악 중에서도 전통적인 민속음악이 발전한 곳이다. 남도들노래, 진도씻김굿, 진도다시래기, 진도만가 등 국가 지정 또는 도 지정 무형유산들이 진도의 서부 지역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이러한 문화권적 특수성은 역사적 비극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진도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피아간 살상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큰 피해는 진도의 동부 지역에서 일어났다. 반촌과 민촌 사이의 사회적 긴장과 대립이 상존해 있었지만, 막상 전쟁이 터진 특수 상황에 직면하자 평소에 잠재되었던 갈등이 증폭되면서 살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문화권적 차이는 다른 하나의 문화적 현상을 낳았다. 사회문화적 분위기로 볼 때 동부는 다소 보수적 경향이 강하고, 서부는 진보적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현재 전통문화의 중요한 한 현상으로 볼 수 있는 동제(洞祭)의 경우 동부 지역에 비해 서부 지역은 현저하게 전승 빈도가 낮다. 이 역시 하나의 문화권적 특수성을 보이는 전형적 사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