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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797
한자 盧守愼
영어음역 No Susi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유배인
아버지 노홍(盧鴻)
아내 이연경(李延慶)의 딸
성별
생년 1515년연표보기
몰년 1590년연표보기
본관 광주
과회(寡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시호 문의(文懿)|문간(文簡)
제향 팔봉서원(八峰書院)|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봉암서원|화암서원(花巖書院)
대표관직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우의정|좌의정|영의정
주요활동/연도 1548년 진도에 유배됨연표보기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노숭(盧嵩)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노경장(盧敬長)이고, 할아버지는 노후(盧珝)이고,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홍(盧鴻)이다. 1531년 성리학자로 명망 높은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혼인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노준명(盧峻命)의 증조이다.

[생애]

1515년(중종 10)에 태어났다. 1543년(중종 38) 문과에 급제한 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정언, 이조좌랑,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 23)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1541년(중종 36)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중종 38)에 문과의 초시·회시·전시에 연달아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퇴계 이황과는 같이 독서당에 뽑혀 학문을 통해서 서로 친근한 사이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서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1547년(명종 즉위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에 능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뜻의 주서로 된 벽서가 발견된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었고, 진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1565년(명종 20)에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로 다시 옮겨졌다가, 1567년 선조 즉위 후에야 귀양에서 풀려났다.

1588년(선조 21)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학문과 사상]

진도에 유배된 기간에 이황·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교하고 명확하여 사림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또한『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노수신은 홍문관에 있으면서 경연에서『서경』을 강할 때는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의 설과 일치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진도로 유배되어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보고난 후에는 자신의 설을 변경해 도심(道心)은 미발(未發), 인심(人心)은 이발(已發)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大祥)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해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 때와 같이 하였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해 담제(禫祭)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저술]

주해서로「숙흥야매잠」, 『대학장구』, 『동몽수지』 등이 있다. 저서로는『소재집』13권 8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서원(鳳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의의와 평가]

노수신은 진도에 있는 19년 동안 진도의 풍속에 예속을 심어 ‘진도개화지조(珍島開化之祖)’로 불린다. 진도에 들어온 지 5년 만에 지산면 안치에 초옥삼간을 지어 ‘소재(蘇齋)’라 이름 짓고 정좌하여 경사를 연구하였다. 또한「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을 비롯한 1,023수에 이르는 시를 지었다.

노수신은 유배생활 중에 향교 뜰의 유배대(流配臺)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고, 지력산 동쪽 거제에 있는 지씨들의 정원을 시를 읊으며 거닐었다 한다. 진도에서 현지처[우씨]를 두어 노계래(盧戒來) 등 3형제를 낳는 등 진도와 인연이 깊은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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