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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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 때에는 바닷물로 덮여 있으나 썰물 때에는 육지로 드러나는 바닷가의 평평한 땅. 갯벌은 밀물과 썰물에 의해 바다로도 되고 육지로도 되는 지역이다. 갯벌을 구성하는 모래와 진흙은 육지에서 운반되어 퇴적된 것이다. 이러한 갯벌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간다. 또한 생산성이 풍부하고 오염 물질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등의 기능이 있다. 흔히 조간대, 간석지, 개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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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진도군수를 역임한 인물.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율헌(栗軒)이다. 1921년 7월 12일 진도군 고군면 석현리에서 아버지 김창우(金昌瑀)[1887~1950, 고군면장]과 박금실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양천허씨 금심(昑心)이며 5남 1녀를 두었다. 큰아들 김순철(金橓澈)[1947~ ]은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 학예실장이다. 1960년 4·19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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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불리는 일노래. 「남도 들노래」는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논일노래이다. 따라서 벼농사와 관련한 노래가 중심을 이룬다. 전라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일노래로서,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진도군에는 「남도 들노래」뿐만 아니라, 의신면을 중심으로 한 의신대동두레놀이가 있다. 의신대동두레놀이는 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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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조직화된 집단. 진도는 섬이면서 섬이 아닌 독특한 곳이다. 하지만 진도 문화의 형성 기저는 ‘바다’이다. 진도에 독특한 노래와 춤, 그리고 민속 문화가 형성되고 전승된 것은 섬이기에 가능했고, 지금 현재화되는 것도 섬때문에 가능하다. 전자의 섬이 육지로 가고 싶었던 섬이라면, 후자의 섬은 육지 사람들이 찾는 섬이라는 차이가 있다. 진도가 섬스럽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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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에 있는 행정 자치부 지정 정보화 마을. 정보화 마을 사업은 농어촌이나 산촌과 같이 정보화에 소외된 지역에 초고속 인터넷 이용 환경 조성과 전자 상거래와 정보 콘텐츠를 구축하여 지역 주민의 정보 생활화를 유도하고 실질적인 수익을 창출함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다. 2016년 7월 현재 행정 자치부 지정 정보화 마을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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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와 진도읍 산월리 사이에 있는 방조제. 지산면 소포리 주민들은 소포리와 진도읍 산월리 사이를 나룻배로 건너다녔다. 그러나 소포방조제 축조 이후 소포리는 진도읍 교통권이 되었다. 바다는 간척지로 바뀌었고 간척지 근처에 백연동이라는 마을이 새로 생겼다. 소포만 연안의 염전은 매립되었다. 정기시장이었던 십일시는 임회면 장구포리와 지산면 앵무리 사이에 육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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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를 잡거나 기르는 데 사용하는 도구. 현재 전라남도 진도군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지만 과거에는 조도군도뿐 아니라 체도(體島) 전체가 반농반어업을 생업으로 삼던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진도가 농업 중심으로 비춰지는 것은 수많은 간척이 있고 난 이후이다. 옛날에는 복잡하게 얽힌 리아스식 해안과 천혜의 자원이었던 갯벌 때문에 소만 어업과 갯벌 어업이 생업의 중심이었다. 즉, 간척이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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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을 만들기 위해 논처럼 만들어놓은 곳. 염전을 다른 말로 소금밭, 염밭이라고도 하며, 특히 햇볕과 바람을 이용해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는 곳을 천일염전이라고 한다. 천일염전을 조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갯벌이다. 갯벌이 발달한 경기만, 곰소만 및 영광·무안·신안지역에 염전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염전은 크게 저수지, 난치, 누테, 결정지로 구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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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출신의 정치인.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송암(松巖). 1918년에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서 아버지 이기표(李基表)와 어머니 임옥심(林玉心)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4년 4월 26일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5년에 일본 메이지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제6대, 제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국회의원 재임 시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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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시마을의 전체 경지면적은 논이 22.2㏊, 밭이 23.4㏊로 총 45.6㏊이다. 그리고 임야가 222.2㏊이다. 십일시마을 내에 포함된 경지면적은 적으나 농업종사자가 많은 이유는 소포만 간척지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실제로 십일시마을 거주자의 다수가 소포만 간척지에 농지를 소유하고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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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이루어진 조사에 의하면, 십일시마을의 취업자는 총 275명이었다. 취업자 가운데 남자는 131명, 여자는 144명이었다. 농업,임업,수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27명으로 남자가 50명, 여자가 77명이었다. 전기,가스,수도,위생시설 서비스업 종사자는 53명으로, 남자가 30명, 여자가 23명이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79명으로, 남자가 36명, 여자가 4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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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십일시마을에 형성된 장시는 10일에 한 번씩 열렸으나 장시가 번성하면서 4일에도 장이 열린다. 장이 번성한 이유는 임회면과 지산면, 조도면 사람들이 주로 이 시장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곳 주변 사람들에게 진도읍시장은 거리가 멀뿐더러 교통도 불편했다. 따라서 외부에서 상인들이 많이 들어왔고, 우시장도 크게 번성하여 시장의 발전을 촉진했다. 그러나 농업의 기계화로 우시장이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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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현재의 시장터는 1962~1963년경 지산면과 임회면 사람들이 부역으로 제방을 쌓아 만들었다. 그전의 시장터는 현재 상가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시장터의 면적을 넓히기 위해 제방을 쌓은 것이다. 새롭게 장터가 마련되면서 시장이 크게 번성했는데, 마을에 텔레비전이 보급될 무렵인 1970년대 중반에는 시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많아 걸어다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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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이 발달하면서 진도 역시 광주, 목포 등 도시와의 연결이 편리해졌다. 이와 함께 농수산물은 대도시로 직접 출하되고, 유통업자들이 자가용을 이용해 생활필수품을 소비자의 가정으로 직접 배달하면서 장시의 기능이 현저히 쇠퇴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군 단위의 농수산물집하장은 소량 다품목 생산에 의존하는 영세한 소농의 생산물을 공동 출하하고, 규격 상품화를 촉진하며, 생산자의 조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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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장구포리에 위치했던 나루. 1975년 소포방조제가 축조되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임회면 십일시리까지 드나들었다. 썰물 때도 지금의 조류지 정도의 개용이 임회면과 지산면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장구포 원둑 끝머리에서 앵무리까지 나룻배가 다녔다. 소포만을 막기 전에는 길이가 긴 포구였기 때문에 장구포(長久浦)라 하였다는 설과, 마을 뒷산이 장고와 같이 생겨 장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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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에 있는 행정리. 장구포를 처음에는 ‘새터’라고 하다가 그 뒤에 하늘의 덕이 있다는 의미로 ‘천덕리’라고 하였으며, 소포만을 막기 전 긴 포구를 이루었다 하여 ‘장구포’라 하였다는 설과, 마을 뒷산이 장고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장고포’라 불리다가 와전되어 ‘장구포’라고도 한다. 1850년경 진도군 군내면에서 김해김씨가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그 뒤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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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에 속하는 행정리. 1744년 경 능주구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이후 연안차씨·밀양박씨·김해김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포산리로 병합되었다. 1973년 진도읍 서부의 소포만이 간척되어 염전이 사라지고 건내양섬과 딴양섬 주변은 농경지가 되었다. 큰공지(149m)의 서쪽 완경사면에 입지한다. 지도리 북쪽으로는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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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도로가 발달하기 전에는 진도읍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고뱅이 잔등[고백리] - 칠전부락 - 꿀재를 지나야 읍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 길은 30여㎞에 이른다. 소포만이 막히기 전에 진도읍으로 가는 길은 앵무까지 걸어가서 나룻배를 타고 장구포를 거쳐 진도읍으로 들어가는 길과, 소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해창으로 들어가 진도읍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이렇게 진도읍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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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가 인지마을의 경제적 발전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섣불리 대답하기 곤란하다. 다만 문화적인 영향면에서 본다면, 진도의 민속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마을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점과, 많은 명인들을 배출한 마을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인지마을의 문화적 위상을 무형문화재가 높였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지리에 있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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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면 인지리는 지산면의 소재지 마을이다. 진도의 7개 무형문화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무형문화재의 본산이라고 할만하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는 남도들노래, 진도씻김굿을 비롯해,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인 진도만가가 해당되고, 간접적으로는 강강술래, 다시래기 등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진도북놀이 등의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가 해당된다. 직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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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들노래는 특히 지산면 인지마을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던 노래를 중심으로 하여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즉, 남도들노래는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논일노래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벼농사에 관련된 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들노래는 1972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진도에는 남도들노래 뿐만 아니라, 의신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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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만가는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연행되는 상여소리를 말한다. 진도만가(珍島輓歌)라는 이름은 1975년 남도문화제에서 입상하는 시기를 전후해서 이를 연구하거나 관여했던 학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원래 진도에서는 상여소리라고 했는데, ‘상여소리를 한다.’ ‘상여운구를 한다’, ‘생애(喪輿) 나간다’ 등의 동사(動詞)적 개념으로 사용해 오던 말이다. 대체로 진도만가는 두 가지 유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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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도북놀이가 인지마을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못북기원설’의 측면에서 보면, 남도들노래가 못북의 배경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북놀이와 들노래의 친연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따라서 북춤으로 지정된 인간문화재가 인지마을에 없다는 것을 빼고는 인지마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북춤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박병천을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