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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022
한자 人文地理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현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청 영천시청 - 경상북도 영천시 문외동 24번지 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 지리적 요소.

[개설]

영천시는 경상북도의 남동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은 경주시와 포항시, 서쪽은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 북쪽은 청송군이 접하고 있다. 또한 중앙선대구선 철도가 동서로 뻗쳐 있고, 경부고속도로익산포항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국도와 지방도 등이 통과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1933년 영천면이 되었으며, 1937년 7월 1일에 영천읍으로 승격되었고, 이후 1981년 7월 1일에 영천시로 승격되었다. 2011년 현재 1개 읍[금호읍], 10개 면[청통면·신녕면·화산면·화북면·화남면·자양면·임고면·고경면·북안면·대창면], 5개 동[동부동·중앙동·서부동·완산동·남부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천시의 경위도상 위치는 동경 128°42′~129°09′, 북위 35°49′~36°11′이며, 면적은 920.29㎢, 인구는 2011년 말 현재 10만 4513명이다.

[역사]

1. 고대

금호강(琴湖江) 원류 지대인 영천시에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화산면 연계리금호읍 어은리에서 발견된 각종 청동 제품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들이며, 임고면 양평리대창면 조곡리, 자양면 용산리의 지석묘를 통해서 청동기 사회의 발전에 따라 사회가 분화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삼한 시대 무렵에 골벌소국(骨伐小國)이란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으며, 504년(신라 지증왕 5)에는 이곳에 골화성(骨火城)이 축조되기도 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절야화군(切也火郡)사정화현(史丁火縣)이 각각 임고군(臨皐郡)신녕현(新寧縣)으로 개명되어 양주(良州)에 속하였다.

2. 고려 시대

고려 통일 이후 임고군·임천현·도동현이 통합되어 영주(永州)가 되었는데 고울군(高鬱郡)이라고도 하였다. 995년(성종 14) 자사(刺史)가 파견되기도 했으나, 1018년(현종 9) 신녕현과 함께 동경유수관의 속현이 되었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영주관내의 이지은소(梨旨銀所)가 현으로 승격했고, 속현이던 신녕현에도 1390년(공양왕 2) 감무(監務)가 임명되었다.

3. 조선 시대

조선 초에는 고려에 이어 영주군·신녕현으로 나뉘었다가 1413년(태종 13) 영주군은 영천군으로 개명되었고, 신녕현은 1497년(연산군 3) 현의 향리들이 현감의 악정 때문에 도망가자 현이 한때 해체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정세아(鄭世雅)·조희익(趙希益)·권응수(權應銖)·정대임(鄭大任) 등이 의병을 크게 일으켜 이 지역 일대의 적을 격파해 적이 경주로 후퇴하도록 했고, 경주성 탈환에도 큰 공을 세웠다.

4. 근대

1895년(고종 32) 영천·신녕이 모두 군이 되어 대구부에 속했고, 1896년에는 경상북도 영천군·신녕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시 신녕군영천군에 흡수되었으며, 1933년부터 연차적으로 내동·내서·예곡·완산·명산 등 5개 면이 통합되어 영천면이 되었다. 1934년 화북면고경면이 설치되었고, 1937년 7월 1일 영천면이 영천읍으로 승격되었다.

5. 현대

1981년 7월 1일에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2월 15일에 금호읍 도남동, 청통면 오수동·쌍계동, 화산면 매산동이 시로 편입되었다. 1984년 8월 30일 완산동 1056-3번지에 있던 영천시청문외동 24번지로 이전하였고, 1995년 1월 1일 영천시와 영천군을 통합하여 영천시로 승격하였다. 1989년 1월 1일에는 청통면 서산리가 영천시 대전동에 편입되었다.

1998년 10월 20일에 「영천시조례」 제211호[1998. 10. 2. 공포]로 교동과 대전동의 대전 및 서산을 통합하여 서부동으로 하고, 명산동과 대전동의 오미를 중앙동으로 편입하였으며, 주남동과 봉작동, 영도동을 통합하여 남부동으로 조정하여 1개 읍, 10개 면, 5개 동의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인구]

2011년 말 현재 영천의 인구는 10만 4513명로서, 2009년도의 영천 인구 10만 4916명보다 403명 감소하였다. 1971년에 총 인구수가 189,570명에서 1973년에 191,519명으로 증가한 이후로는 점점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세대당 인구는 1990년 3.6명에서 1.2명이 감소하여 2009년에는 2.4명이 되었다.

[산업]

임야 면적이 넓고 경지는 18.9%에 불과하다. 강우량은 전국 평균과 비교할 때 소우 지역으로 가뭄의 피해가 컸으나, 자호천(紫湖川)에 축조된 영천댐으로 인해 댐 하류의 영천평야 및 금호평야는 전천후 농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주곡 외에 사과·복숭아·포도 등의 과실류와 잠견·담배·고추·마늘 등의 특용 작물 생산이 많다. 2009년 영천에 소재한 사업체의 수는 7,313개이며, 종사자 수는 3만 2444명이다.

[교통·관광]

대구선중앙선이 영천 관내를 통과하면서 도동에서 교차한다. 경부고속도로는 영천시의 남단부를 통과하며 익산포항고속도로는 대구~영천~포항을 잇는 산업의 발전을 가속시키고 있다. 또 군산~경주, 의성~포항 간의 국도와 영천~안동 간의 지방도, 기타 수많은 군도로 전국 각지에 연결된다.

팔공산(八公山) 동사면의 은해사 일대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보현산천문대, 보현산천문과학관, 오리장림, 운주산 승마 자연 휴양림, 치산폭포, 영천댐 등의 유명한 관광 명소들이 있다.

[민속]

1. 민속놀이

영천의 전통적인 민속놀이로 ‘영천곳나무 싸움’이 있다. 영천곳나무 싸움은 줄당기기에 이어서 벌어지는 대동놀이로서, 영천 고을의 읍치였던 영천읍과 그 주변 지역에서 대보름 명절에 벌어졌다.

영천곳나무 싸움은 1930년대까지 전승되다가 일제 탄압으로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 뒤 1987년 복원이 이루어졌고, 1999년 이후 영천시청년연합회와 영천전자고등학교가 보존 단체로 지정되어 전승해 오고 있다.

2. 동제

동제는 수령이 많은 큰 나무, 혹은 당우를 지어 제단을 만들고 일 년 동안 동네의 태평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제사 시간은 보통 축시[새벽 1시~3시 사이]에 올리는데, 새 그릇에 통음식을 진설하여 헌작(獻酌)과 축관(祝官)의 독축 순서로 거행되며, 제사가 끝나면 동네의 각 세대주 이름이 적힌 소지(燒紙)를 올린다.

산간의 마을에서는 산마루에 산당을 만들어 놓고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낸다. 또한 농가에서는 장례식이나 묘사 때 별도로 제사나 묘사와 함께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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