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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이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207
한자 金山移徙
영어음역 Geumsan Isa
영어의미역 Safe Haven Geums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350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437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남도 진도군
발생(시작)장소 전라남도 진도군 일원
관련인물/단체 진도군민

[정의]

여말선초에 왜구의 침략을 피해 전라남도 진도지역 주민이 해남 금산(金山)으로 이주한 사건.

[개설]

여말선초 왜구가 창궐했을 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도 또한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을 받았다. 이에 진도군민의 생존대책의 자구책을 찾고 후일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1350년경 진도군민 전체가 해남 금산으로 이사하면서 군치소도 함께 옮겼다가, 1437년 진도로 다시 돌아온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약 70년간에 걸쳐 우리나라 연안 각지에 왜구가 창궐하였다. 왜구 창궐의 배경은 대외적으로는 일본 정세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일본은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정중(正中)의 변, 원홍(元弘)의 난을 치르는 동안 정부는 무력해졌고, 중앙의 통치권력이 지방에까지 제대로 미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또 몽고의 침입을 막아낸 후 몰락한 무사와 영세민들이 해적집단을 이루게 되었고, 특히 서부 일본지방의 연해민들이 집단으로 해적단 또는 무력적 상인으로 변하여 인접지역이나 국가에 침입하여 약탈과 파괴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다.

한편 당시 고려는 오랫동안 원나라에 복속되어 있으면서 국내 정치세력이 분열되었고, 왕실의 내분도 심했다. 또한 자연재해와 기근 등으로 민심은 흉흉했으며 유망민이 늘어났다. 이처럼 계속되는 내란과 몽고 등의 외침으로 인한 국토는 황폐해지고, 두 차례의 일본 정벌에 따른 국력소모 등으로 14세기 전후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따라 고려의 국력이나 국방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왜구에 대비한 방비나 토벌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왜구는 1223(고종 10)년 금주(지금의 김해) 지방에 처음으로 쳐들어온 이후, 1350(충정왕 2)년 침략을 본격화했다. 특히 전라도 지역은 곡창지대이면서 해안을 끼고 있는데다가 많은 도서를 갖고 있는 까닭에 왜구 침략의 주요 대상이 되었고, 특히 진도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고 땅이 기름지며 해상교통의 중심지여서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목적]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침체된 진도군민의 사기와 정신을 되살리고 후일을 기약한다는 목적으로 진도군 본토에서 한 발짝이라도 가까운 지역으로 피난길을 선택했으며, 그곳이 금산이었다. 금산은 일면 토성(土城)이라고도 불렸는데,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사무소 소재지 부근으로서, 산수가 수려하고 군민들이 거처하기에 적합하였다.

[발단]

진도는 도서지역으로서 물산이 풍부하고 접근이 용이한 까닭에 왜구의 지속적인 침입을 받자, 생존의 자구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말선초의 정치적 격변기를 지나면서 중앙정부의 국방력에 의존할 수 없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단 군치소를 옮긴 다음 군민을 안집시키고 후일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진도에서 가까운 해남군 산이면 근처 금산으로 군치소를 옮기게 된 것이다.

[경과]

1350(충정왕 2)년 경상도의 고성·거제 등지를 노략질한 왜구들은 이 해 4월 순천부를 습격해 이곳을 지나 개성으로 향하던 세곡선을 털어갔다. 6월에는 장흥군 안양 지방을, 이듬해 8월에는 130여 척의 대규모로 경기 인천 앞바다와 수원 지방까지 노략질을 해가는 형편이었다.

결국 1350(충정왕 2)년 진도의 백성들을 모두 내지로 옮기는 조처가 취해졌는데, 진도 백성들이 처음 옮겨간 곳은 나주 임내인 월악(月岳)이란 곳이었다. 이후로도 왜구에 의한 피해가 그치지 않아 두 번째로 명산리(命山里)[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지역]로, 그리고 또 세 번째로 삼촌리(三寸里)[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원진리·창리 금산 일대로 추정]로 옮겼다. 이처럼 쇠잔해진 고려의 국력과 더불어 진도 백성들 또한 고난의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1350년 금산으로 군치소를 옮긴 뒤 87년이 지난 1437년 정국이 안정되고 왜구 침입이 잠잠해지자 진도 백성들은 다시 진도로 돌아왔다.

[결과]

고려 정부는 왜구 침략에 대항하여 당시 일본의 실력자인 실정막부(室町幕府)를 비롯하여 구주탐제(九州探題), 그리고 호족급인 대내씨(大內氏)나 대마도주 종씨(宗氏) 등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금왜교섭(禁倭交涉)을 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장의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왜구 토벌군을 강화하여 방어에 나섰다. 특히 1358년(공민왕 7) 대장군 최영(崔瑩)을 양광전라도왜구체찰사(楊廣全羅道倭寇體察使)에 임명하여 대대적으로 왜구를 소탕하게 했다. 또한 수군을 강화하고 화약과 화포도 제작하여 반격에 나섰는데, 우왕최무선(崔茂宣)의 공이 컸다. 한편 전남지방의 왜구 토벌에는 정지(鄭地) 장군의 역할이 막대하였다. 그 결과 공양왕대를 지나면서 왜구의 침략이 주춤해졌으며, 조선 건국 이후 약화되어 진도도 군치소를 다시 본도(本島)로 옮겨올 수 있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진도군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군치소를 인근 금산 지역으로 옮겨 군민을 안정시키고 후일을 도모한 것은 국력이 쇠잔한 격변기에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로 판단된다. 특히 여말선초의 중차대한 정치적 풍랑 속에서 군민을 안집시키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군치소의 이사밖에 없었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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