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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량포 왜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353
한자 達梁浦倭變
영어음역 Dallyangpo Waebyeon
영어의미역 Dallyangpo Battle
이칭/별칭 을묘왜변(乙卯倭變)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왜변
발생(시작)연도/일시 1555년 5월 1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55년 5월 2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남도 남해안
관련인물/단체 한온|이덕견|최린

[정의]

1555년(명종 10) 왜구들이 배 70여 척으로 강진·진도 등 전라남도 연안지방을 습격한 사건.

[개설]

을묘왜변(달량포왜변)은 삼포왜란(三浦倭亂) 이래 조선 정부의 세견선(歲遣船) 감축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왜인들이 1555년 5월 11일 달량포(達梁浦)[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와 이포(梨浦) 등을 침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조정은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元積) 등을 출전시켜 왜구와 싸우도록 했으나 패하였고, 오히려 왜구들은 어란포와 장흥·강진·진도까지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정부는 다시 중앙의 정예군사와 이윤경(李潤慶), 남치훈(南致勳) 등을 파견하여 토벌하도록 하였고, 마침내 5월 25일 적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왜구를 몰아낼 수 있었다.

[발단]

1510년 삼포왜란 이후 왜구들이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을 때마다 조선 조정은 일본에 대한 세견선을 감축하여 교역량을 줄이는 조치를 취해왔다. 조선에서 물자보급이 단절되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쓰시마 섬[對馬島] 등지의 왜인들은 제재 완화를 요구했으나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경과]

조선 조정의 제재에 대해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명종 10) 5월 11일 배 70여 척으로 전라남도 달량포와 이포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했다. 이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이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달량포로 출전했으나 오히려 왜구에게 포위되어 원적한온은 항복했다가 피살되고 이덕견만 탈출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군사가 붕괴하자 왜구는 5월 하순까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어란포·장흥·강진·진도를 거쳐 다시 영암으로 침입했다.

이에 정부는 금군(禁軍) 등 정예군사를 동원함과 아울러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을 좌·우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후원군이 도착하자 전주부윤 이윤경이 군사를 이끌고 영암으로 가서 남치훈 등과 힘을 합하여 5월 25일에 적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비로소 왜구를 몰아낼 수 있었다. 당시 진도군수인 최린(催璘)은 왜적이 달량포를 침략하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결과]

왜구가 물러간 후 쓰시마 도주(島主)는 달량포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요청하였다. 조선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세견선 5척을 허락하였고, 임진왜란 발생 전까지 세견선이 계속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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