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552
한자 朴鳳石
영어음역 Park Bongse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주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106 지도보기
성별
생년 1903년 8월 24일[음력]연표보기
몰년 1932년 4월 16일연표보기
본관 경주
대표경력 조선적화당 선두 연명발기자

[정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봉석은 1903년 8월 24일(음력)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서 아버지 박동술(朴東述)과 어머니 김죽심(金竹心)의 3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박봉갑·박봉위가 있고, 조카로 박기영이 있다.

[학력]

1919년 진도보통학교를 16세에 졸업하고, 1924년 21세로 광주숭일중학교를 졸업했다.

[활동사항]

박봉석은 25세인 1928년 5월 같은 마을에 사는 두 살 위 형 박종협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박종협은 당시 진도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였다. 일본에서의 그에 대한 구체적 활동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1930년 2월 19일 조선적화당이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검거된 기사가 국내 신문에 실리면서 박봉석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려졌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 20여 명이 1929년 11월경에 박봉석을 선두 연명 발기로 ‘조선적화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이들은 내외 동지를 규합하여 모 사건을 획책하던 일이 발각된 것이다. 취조 결과 그 사건의 관계자가 조선 경성·개성·인천 등지에 많이 잠재한 것을 발각하고, 오사카 특고과원 3명이 오사카에서 조선으로 급행해 조선 각지에 수배하려고 활동 중이다. 이들은 주의 강령을 만들어 그 실현에 노력하던 차에 오사카에서 1930년 2월 19일 검거, 11명이 기소되었으며, 그 강령 중에는 대단히 불온한 문구가 많다.”

이 사건으로 박종협은 2년 징역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신문에는 거명되지 않았다. 박봉석이 조직 대표로 보도되었던 것이다. 박봉석은 1930년 10월 26일 공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박봉석은 검거 2년 1개월 26일째 되는 1932년 4월 16일 일본 오사카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연락을 받은 아버지 박동술이 오사카 형무소에 가서 아들의 유골을 수습해왔다.

[상훈과 추모]

박봉석의 동생들인 고 박봉갑 진도중학교 이사장, 박봉위 전 옥주여객 대표, 외손자 신대을, 조카 박기영 진도중학교 교감 등 친인척의 노력으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