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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081
한자 珍島龍藏城
영어음역 Jindo Yongjangseong
영어의미역 Jindo Yongjangseong Fortress
이칭/별칭 용장산성,용장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지도보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영문조진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64년 6월 10일연표보기 - 진도 용장성 사적 제126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7월 28일 - 진도 용장산성에서 진도 용장성으로 사적 제126호 명칭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진도 용상성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성격 성곽
양식 석축
건립시기/연도 1270년연표보기
관련인물 배중손|김통정|노영희|왕온
구성 산성|행궁지[건물지]
높이 1m
길이 너비 320㎝ 내외
둘레 약 12.85㎞[현]|문헌둘레 38,741척[18.1㎞]
면적 472,909㎡
소재지 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
소유자 진도군
관리자 진도군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개설]

1270년 (원종 11) 배중손노영희 등이 몽고에 굴복한 고려 정부에 반발하여 삼별초와 그 지지자들을 이끌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와 이곳에서 부서(部署)를 정하고 관부(官府)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 침략자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어 승화후 온(承和侯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정권을 세웠다. 진도 용장성은 이 때 도성으로 사용되었던 성이다.

진도 용장성은 크게 사찰 단계와 왕궁 단계로 구분된다. 1270년 삼별초군이 진도에 입거하면서 용장성은 도성 공간으로 변모한다. 왕궁지는 나말여초 무렵 창건되어 13세기 중엽까지 운영된 산지 가람을 기반으로 조성되었으며, 사찰과 왕궁 단계 사이에 용장산성이 축조되어 해도입보(海島入保)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왕궁으로의 변화는 삼별초군이 진도에 입거하기 2~3년 전으로 추정된다. 기존의 산지 가람을 증개축하여 왕궁을 비롯한 시설들을 조성하고 18단의 대지에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그래서 진도 용장성은 1270년 삼별초가 입거하면서 외성[용장산성]과 궁성[궁성+왕궁]이 결합된 이중 구조의 도성 체제를 갖추게 된다.

원종 12년(1271) 5월 고려 정부는 김방경 등을 내세워 몽고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진도 용장성을 공격하였고,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갔다. 제주도에서는 1273년(원종 14) 4월까지 지탱하다가 정부군의 공격으로 소멸하였다.

삼별초군이 진도 용장성에 주둔한 기간은 8개월간이었고, 진도 남도진성과 함께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항몽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또한 진도 용장성은 축성연대가 확실하다는 점, 고려 왕실과 대립되는 궁전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위치]

진도 용장성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고군면 벽파리·오류리 일대에 걸쳐 있다. 이 일대는 한반도 서남부의 결절지로 서남해안을 잇는 해상교통로이자 조운로였던 명량해협 및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과 인접한 지리적 요충지이다. 진도 용장성의 북벽과 서벽 및 동벽의 일부는 바다와 접하고 나머지 구간은 산 능선을 통과하고 있다. 북쪽은 우리나라에서 유속이 가장 빠른 곳으로 잘 알려진 명량해협과 접해 있고, 3개의 만과 곶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성벽은 곶 지형에만 남아 있다.

[발굴조사경위]

진도 용장성에 대한 학술조사는 유적의 정비·보존 방안과 복원 계획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고 학술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루어졌다. 1989년 목포대학교박물관의 행궁지[건물지] 발굴조 사를 시작으로 2021년까지 왕궁지 발굴 조사와 용장산성에 대한 시굴 조사가 10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형태]

진도 용장성은 왕궁을 포함하는 고려 도성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용장성은 13㎞에 이르는 대규모 석축성인 용장산성과 왕궁을 포함한 궁성으로 이루어진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내부 공간은 852만 8925㎡[258만 평] 정도이다. 산성과 궁성 사이에는 제사유적을 비롯한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외성에 해당하는 용장산성은 내벽·외벽을 돌로 쌓는 협축법으로 축조된 석축성이다. 성벽의 규모는 평균 너비 3.2~3.5m이며, 높이는 문헌 기록을 참고하면 2.3m 정도이다. 용장산성의 축조 시기는 ‘계묘삼월대장혜인(癸卯三月大匠惠印)’ 명의 기와로 보아 1234년(고종 21)이 유력해서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오기 27년 전에 이미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성은 왕궁지 외각을 두른 석심 토루(石心土壘)로 평면은 장방형이며, 규모는 둘레 약 419m, 잔존 높이 1.5~2m이다. 왕궁지는 용장산성 남쪽 능선에 인접한 계곡부로 동쪽·서쪽·남쪽은 막혀 있고 북쪽만 개방되어 있다. 궁성까지 범위를 고려하면 남북 길이 204m, 동서 너비 90.2~123m이며, 내부 면적은 약 2만 2947㎡이다. 남고북저(南高北低)의 곡간지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정지하여 18단으로 구획된 대지 위에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조사를 통해 확인된 건물은 54동이다. 북쪽에 중심 건물을 두고 나머지 공간에 부속 건물을 적절히 배치하여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건물은 왕의 거주 공간과 회랑, 의례 공간, 숙소 공간 등으로 구분된다. 왕궁은 지세가 높은 남쪽에 의지해서 기와지붕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하여 건축적 위용을 드러냈으며, 일부 건물은 처마 끝에 막새를 장식하여 품격을 높였다. 배수는 계곡이 있는 동쪽으로 주로 처리되었는데, 배수로와 수구로 이루어진 배수 체계를 잘 갖추고 있다. 이러한 왕궁지는 지형 활용 방식, 건물의 구조와 배치 양식 등이 개경(開京)과 강도(江都)의 계보를 잇고 있으며, 제주 항파두리 내성 건물지와도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볼 수 있다. 왕궁지에서는 ‘사(寺)’ 명 명문 기와와 불두(佛頭) 편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별초가 들어오기 전에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찰은 용장사(龍藏寺)로 알려져 있지만, 왕궁지에서 출토된 명문 와로 보아 금사사(金沙寺)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제사 건물지는 성황산 정상부의 해발 219m에 있다. 장축 방향은 남-북이며, 규모는 19m×14.4m이다. 기단부는 경사가 낮은 동쪽과 남쪽 부분에만 4단의 계단식으로 축조하였고 기단부를 포함하여 3단으로 이루어진 중앙부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제단의 내부에는 토제 전(塼)이 깔려 있다. 추정 장대 건물지는 해발 230m 지점의 성황산 최정상부에 있다. 기단부는 경사가 낮은 부분에만 축조되었다.

[출토유물]

왕궁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가 가장 많다. 막새는 암막새와 수막새로 구분되며 연화문, 일휘문, 당초문, 무문이 확인된다. 평기와는 어골문의 비중이 높다. 도자기로는 고려청자, 흑유, 도기 등이 확인된다. 청자는 11~13세기에 생산된 다양한 기종이 출토되는데, 일상 용기인 발, 완, 접시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청동 유물로는 의식구, 공양구, 생활 용구, 동전 등이 있다. 의식구로는 불교에서 불성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하는 청동 경자가 있다. 공양구는 청동 광명대 부속품, 청동 주전자, 청동 향로다리 등이 있으며 생활 용구로는 청동 숟가락, 청동 젓가락, 청동 접시, 청동 발, 청동 거울, 청동 다리미 등이 확인된다.

동전은 33종 119점이 출토되었는데, 한(漢)의 오수전(五銖錢)과 당(唐)의 개원통보(開元通寶), 건원중보(乾元重寶)를 제외하면 대부분 송(宋)나라의 것이다. 철기류로는 철정(鐵鐤)과 철솥을 비롯한 취사 용구류, 철 가위와 철 칼을 비롯한 생활 용구류, 철살포와 철 낫을 비롯한 농구류와 건축자재류 등이 출토되었다.

제사 건물지에서는 동전류, 토제·철제 마, 청자 잔과 받침, 철화 장고 편을 비롯한 각종 청자 및 분청사기, 백자 등 자기류, 청동거울 및 청동숟가락, 벼루 편 등 고려 전기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제사 관련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동전은 11세기 중반~12세기 초반에 발행된 중국 북송 대의 황송통보(皇宋通寶)·원부통보(元符通寶)·정화통보(政和通寶) 3점과 우리나라의 조선통보(朝鮮通寶)가 출토되었다.

추정 장대 건물지에서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철제 솥 편을 비롯한 각종 철기류, 청동 개, 대형 옹 등 도기류, 다량의 기와 등 주로 생활 용기가 출토되었다.

[현황]

용장성은 궁성과 왕궁, 약 13㎞에 이르는 용장산성[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26호 진도 용장산성으로 지정되었고, 2011년 7월 28일 지정명칭이 사적 제126호 진도 용장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진도 용장성의 지정 면적은 53만 5833㎡이며, 일부 필지를 제외한 왕궁지와 용장산성의 성벽 구간이 지정 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의의 및 평가]

진도 용장성은 단기간에 사용되었음에도 도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왕궁과 궁성, 외성[용장산성]이 결합된 이중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여러 개의 성문과 적대, 치 등 다양한 부속시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사유적도 확인되었다. 명문 기와류와 동전류, 청자 등 축조 시기와 사용 시기를 밝힐 수 있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의미가 크다.

진도 용장성에는 삼별초군이 8개월간 주둔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진도 남도진성과 함께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항몽 유적지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축성 연대가 확실하고, 고려 왕실과 대립되는 궁전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5.04.08 항목명 수정 용장산성을 진도 용장성으로 수정(20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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