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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287
한자 政治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오승용

[정의]

국가의 권력을 획득·유지하고 국민들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고 이해갈등을 조정하는 모든 활동.

[고대]

진도지방에서는 신석기 때의 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지만 인근의 서남해 도서지방인 신안군의 대흑산도, 소흑산도, 우이도, 하태도, 완도군의 고금도, 여천군의 돌산도 등과 내륙에 가까운 지역인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두모마을 등에서 발견된 조개더미(패총)로 보아 진도지방에서도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생활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한시대의 진도에 관한 기록은 1761년(영조 37)에 김몽규[1694~1775]가 지은 『옥주지(沃州誌)』에 ‘삼한 말엽에 항로가 드디어 개통되면서 육지생활에 싫증을 느낀 사람이 조금씩 들어와 거주하게 되었다.’란 기록이 있으나, 이 소략한 기록으로서는 당시의 진도지역에 대한 실상은 알 수 없다.

백제 때 진도지역의 사회체제나 주민 구성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가 없다. 다만 세 개의 군현이 기록상 처음으로 드러난다. 즉 현재의 고군면 고성리 일대에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분토리 일대에 도산현(추산현), 임회면 일대에 매구리현 등이 있었다. 이 들 세 현은 반독립적인 상태로 유지되었다. 시대와 사회체제 등은 달랐을지라도 선대의 토착적인 기반이 그대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백제 때 군현 간의 소속 관계는 밝힐 수 없지만 진도지역에서는 고성을 중심으로 살던 부족집단이 가장 강력해 진도군이 되었고, 임회현도산현을 거느렸던 것으로 보인다. 진도군의 설군 연대는 밝힐 수 없지만 현재의 군명이 이때부터 기록상에 드러난다. 그러나 당시는 지금처럼 보배 진의 진도라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섬’ 또는 ‘돌섬’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때의 땅 이름은 대부분 지형의 생김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완도 해역에서 바라보는 진도는 ‘긴 섬’으로 보였을 수도 있고 울돌목으로 물길이 돌아가는 뜻의 ‘돌섬’으로 불렸을 수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대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진다. 이때 대부분의 토박이 말이 한자식으로 표기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진도의 경우, 진도군은 현으로 격이 낮춰지면서 무안군에 소속되는 변화를 보였으며, 추산현은 뇌산군으로 승격하여 같은 섬 안의 첨탐현(백제 때 매구리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진도의 중심이 백제 때 고성리 중심의 진도군에서 통일신라 중기에 이르러서는 군내면 월가리 일대의 뇌산군으로 그 중심이 바뀜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까? 지금까지 이 같은 점을 해결할 만한 자료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고군면 고성리 일대의 진도군과 신의면 일대의 부족집단은 신라통일전쟁 때 친백적 백제부족계 집단답게 강력하게 반항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통일신라 정부는 고성리의 진도군 지역을 황무지화시켜 두었다가 현으로 강등시키고 친신라계 집단인 무안호족(무안군)들에게 관할토록 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무안박씨가 오늘날 진도에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진도현은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1018년(현종 9년)에 무안군에서 나주목으로 귀속된다. 이것은 후삼국시대 견훤·왕건의 진도 공방전과도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진도는 후백제지역의 전진 전략기지였던 나주의 외곽으로서 다시 한번 그 지리적·군사적 중요성을 인정받게 된 셈이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서남해안지역의 한 거점이었던 무안군이 현으로 낮춰지면서 소속 영현은 모두 새롭게 부상한 영광군에 넘겨주지만 무안현만은 나주목에 속하게 되는 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여겨진다. 고려시대에 진도를 역사상에 부각시킨 사건이 삼별초의 입거이다. 1270년 8월 진도에 들어 온 삼별초군은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들어가 몽고에 항복하자 개경정부는 괴뢰정부라 주장하면서 자신들만이 정통정부라는 자부심을 주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영호를 ‘오랑(五狼)’이라 하였다. 삼별초군이 어째서 진도로 들어왔을까도 흥미있는 점의 하나이다. 그 이유로 첫째, 강화도에 버금가는 섬으로 울돌목이 있어서 몽고군이 범하기 어렵게 생긴 지정학적 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둘째, 진도 주민들이 백제 때나 고려개국 때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었듯이 해양성이 강해 선박경영에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삼별초 장수들의 일부가 진도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고려 말기에 진도 사람들은 왜구에 쫓겨 영암의 월아기리[月岳]와 명산을 전전하다가 다시금 삼촌면(현재의 해남군 삼산면 원진리·창리 금산 일대)으로 옮겨 온다. 이 시기(1396년)에 진도에는 만호가 파견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주민들은 내지에 있었지만 이미 군사적인 면에서는 사람이 파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진도 사람들은 1437년에 이르러서야 87년 동안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진도로 돌아왔다. 진도 사람들 대부분이 다시 진도로 돌아왔으나 일부가 해남에서 30여 년간 타향살이를 하는 동안 자리를 잡아 눌러 앉았으므로 정부는 진도 사람들의 자손이 살던 땅은 진도가 독립한 뒤로도 진도군에 속하게 하는 삼촌면을 만들어 주었다. 조정에서 진도 사람들의 입도를 허가한 것은 진도를 지키기 위해 1431년(세종13년) 금갑진(의신면 금갑리)과 남도포에 수군을 배치했고 그것만으로 안심이 안되어 함평군 학교면 대곡리 강변에 주둔해 있던 전라도 수군사령부인 수영을 목포를 거쳐 울돌목 근처인 현재의 우수영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뒤의 일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진도는 또 다시 왜군의 침략목표가 되었다. 남해의 목덜미로 알려져 온 진도의 공략이 남해안 장악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순신장군의 부대는 적은 수효였지만 장군의 전략과 울돌목을 이용하여 일본 배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진도가 받은 피해는 매우 컸다.

1895년(고종 30년)에는 지방제도를 개혁하여 읍내면을 부내면으로, 군내면을 군일·군이로, 목장면을 지산면으로 변경하였으며, 가사도면과 조도면을 각각 신설하였다. 영암의 명산면, 해남의 삼촌면, 무안의 5개 면을 합쳐 전체 17개면이 나주부의 소속군이 되었다가 1906년(광무 10년)에는 육지부의 명산면, 삼촌면을 영암, 해남군에 각각 귀속시켰다.

[일제강점기]

진도는 목포·해남에 인접한 다도해의 요충지로서 풍부한 농·수산물의 생산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일본의 경제적 침략이 시작된 지역이다. 이러한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진도민들의 저항도 거셌는데, 1909년에 일본 경찰서와 농사경영자들을 습격하는 봉기가 발생한다. 1919년에는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도에서는 경성고보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귀향하여 한문서당에 다니던 정경옥(鄭景玉)·박종협(朴鍾浹)·박석현(朴錫炫)·김인수(金仁洙) 등이 주동이 되어 7~8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당생도들로 보향단(補鄕團)을 만들고, 그해 12월 말경에 태극기를 비롯한 많은 선전물들을 준비하여 다음해 1월 1일을 기해 거사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日警)에 발각되어 아깝게 미수에 그치고 모두 체포되어 주동자들은 옥고를 치렀다.

1924년 7월에는 진도에 소작인회가 조직되어 1여 년 만에 회원 수가 5천명으로 늘어났다. 이 소작인회는 창립총회에서 소작료 납입은 4할에 준하여 실행할 것을 주창하고, 이 조건을 따르지 않을 경우 소작료를 납입하지 않겠다는 ‘소작료불납동맹’을 결의했다. 지주 측도 이에 맞서기 위해 ‘지주인회’를 열어 대응방안을 모색하였고, 이에 따라 1924~25년에 걸쳐 소작료 인하 등을 요구하는 소작쟁의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소작쟁의는 몇 사람의 주동자가 경찰에 구금되고, 또 지주 측의 회유와 설득 등에 의해 지주와 소작인 어느 쪽도 일방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타협에 의해 마무리되었는데 ‘소작료는 5할로 하되 다만 관습 또는 사정에 의해 그 이하로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이 소작쟁의를 주도한 인물로는 소진호(蘇鎭浩)·박종협·박순직(朴淳稷) 등이었다. 1934년 4월에 결성된 진도적색농민조합은 결성 4개월만인 1934년 8월에 해체되어 진도지방의 민중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진도적색농민조합운동은 곽재술(郭在述)·조규선(曺圭先)·곽재필(郭在必)·박종협·박종춘(朴鍾春)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다. 행동강령을 보면 농민들의 현실적 문제에 깊이 개입하여 소작농민들의 일상적인 이익을 옹호하였으나 다른 지역의 농민조합운동에서 보이는 정치적 성격의 강령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현대]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진도지역에서는 일제에 충성을 다해 공출·징발 등에 앞장서온 면장이나 밀정행위를 한 자 등을 징치(懲治)하는 활동이 일어난다. 1945년 10월이 되면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진도군 지부가 결성되자마자 곧 바로 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는 바로 인민위원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진주한 미군사령부가 군정을 포고하면서 이를 불법단체로 간주하여 해산명령을 내리면서 주된 활동인사들은 지하로 잠적하였다.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한국민주당 진도군지부 등이 결성되면서 진도도 해방 후의 어느 공간이나 마찬가지로 좌·우익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수립되어 가던 중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쟁의 참화를 진도군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1950년 8월 31일 해남의 우수영으로부터 약 1개 소대 병력의 북한군이 상륙하여 진도를 접수하였다. 이후 10월 5일 철수했던 경찰병력이 다시 진군해와 진도를 접수하였고 북한군 및 그의 협조세력들은 많은 수가 섬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약 50여 일 동안 진도군내에서는 좌·우익 양 세력이 서로를 해치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유혈극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진도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 경제개발에의 참여, 교육 및 사회시설 등의 확충, 문화의 전승 및 육성 등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진도군과 관련된 행정구역 조정이다.

1963년 1월 1일에는 진도군 조도면 마진도리가 무안군 장산면에 편입되었다(법률 제1175호, 1962. 11.21 반포). 1964년 7월 31일에는 조도면 가사도에 가사출장소를 설치하여 7면 1출장소 체제가 구축되었다(군조례 제87호, 1964. 7. 31 반포). 1966년 4월 4일에는 조도면 서거차도에 서거차출장소를 설치하여 7면 2출장소 체제가 구축되었다(군조례 제122호, 1966. 4. 4 반포). 1973년 7월 1일에는 군내면 일부를 진도면에 편입하고(대통령령 제6542호, 1973. 3. 12 반포), 동년 11월 20일에는 군내면 죽전을 분리했다(군조례 제397호, 1974. 11. 20 반포). 1975년 군내면 녹진리 대야부락을 분할했고, 1979년 5월 1일에는 진도면을 읍으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1읍 6면 2출장소 체제가 완비되었다(법률 제9409호, 1979. 4. 7 반포).

1980년 2월 2일에는 진도읍내산월, 고군면용호리, 의신면수품리, 지산면의 상봉암을 분리했다(군조례 제657호, 1980. 2. 2 반포). 1982년 1월 1일에는 의신면의 구자(拘子)리의 구(狗)자를 구(九)자로 바꾸고, 의신면의 침계(枕溪)리, 수용소(收用所)리를 진설(陣設)리로 이름을 바꿨다(군조례 제744. 745호, 1981. 12. 18, 12.28 반포). 1983년 2월 15일에는 조도면 만재도리와 가사도리 일부를 무안군 신의(新衣)면에 편입시켰다(대통령령 제11027호, 1983. 1. 10 반포). 1986년에는 진도읍 사정리, 전두리, 임회면 석교리, 지산면 수마리, 조도면 창리를 각각 2~3의 리로 나눴고, 1987년 1월 1일에는 임회면 염장리진도읍에 편입시켰다(대통령령 제12027호, 1986. 12. 23 반포). 199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안군에서 저도 외 5개 섬이 진도읍으로 편입되었고, 1992년 의신면 도목리, 접도리, 임회면 죽림리, 지산면 소앵무, 심동리 등이 분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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