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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399
한자 地名
영어음역 jimyeong
영어의미역 geographical name
이칭/별칭 땅이름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김정호

[정의]

땅에 붙여진 이름.

[개설]

우리 조상은 우리 땅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어디에나 알맞은 지명을 정하고 이를 일상생활에 써왔으며, 그러는 동안에 오늘날과 같이 많은 지명이 축적되었다.

그러므로 지명 속에는 우리 조상의 사고와 의지가 담겨진 것도 있고, 생활 모습을 나타내는 지명도 있어서, 우리 문화 발전의 역사와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가 된다.

역사 기록이 적은 향토사에서 지명은 역사 기록이나 다름없다. 오늘날 가장 낯익은 지명은 행정구역의 이름들이다. 행정구역 이름은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필요에 의하여 만든 법제 지명이다. 이로 인해 예부터 전해 내려오던 마을 이름들은 다 잊혀지고 합해져서 오늘날과 같은 지명으로 전해오고 있다.

족보를 뒤지고 동네를 돌며 산과 내와 들에서 그곳 지명을 들으면 그곳에 역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명에는 사람들이 정한 이름이 있는데 그것을 한문으로 바꾸어 쓰면서 그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엉뚱한 이름으로 변한 것도 있다.

여기서는 진도와 인진도, 사월포와 사월곶이, 사구미연대, 고증해야 할 지명들로 나누어 진도군의 지명에 대해 살펴보았다.

[진도와 인진도]

“진도의 백제 때 이름은 진도군(珍島郡)이었다.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가 된 뒤 진도는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나 군 시절의 이름을 따라 진도라 했다(珍島縣 本百濟因珍島郡).”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서 진도현의 연혁을 이렇게 쓴 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서도 똑같이 옮겨 썼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해진군(海珍郡)」항목에서 ‘진도군은 본래 백제 때 인진도군(因珍島郡)이라 신라 때 진도(珍島)로 바꿔 무안의 영현을 삼았다.’라고 잘못 옮겨 적은 뒤로 그것이 오늘날 진도 연혁에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개명금인지(改名今因之) 아니면 개금명(改今名)을 인진도(因珍島)의 진도(珍島) 개명(改名)으로 볼 것인가 또는 진도군(珍島郡)이었으므로 진도현(珍島縣)으로 개명했다고 볼 것인가의 견해차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같은 시기의 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인진도(因珍島)의 진도 개명으로 보고 군 이름의 이칭란에 인진도(因珍島)와 옥주(沃州)를 적어 놓고 있다. 그 뒤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본백제인진도군(本百濟因珍島郡)을 신라 때 무안군의 영현으로 바꾸었다.’고 써서 진도(珍島) 앞자리의 인(因)자를 없애고 군명에도 진도와 옥주로 고쳐 쓰고 있다.

[사월포와 사월곶이]

진도 지명에서 현재 견해차로 인해 문제가 되고 있는 지명은 사월포(沙月浦), 사월곶이[沙月串], 사구미(沙口味)이다. 지명에서 곶이는 용머리처럼 뾰족 불거진 땅을 이르고 구미[口味, 仇米, 味]는 굽이[水曲]로 내만을 이른다. 그러므로 사월포나 사구미는 사월곶이와 전혀 다른 곳이다.

곽충로가 사월곶이를 ‘고군면 지막리에서 원포 가는 왼쪽’이라 한 뒤 많은 사람이 이 설에 따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이곳은 살구미가 될망정 살곶이의 지형이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임성포와 살곶이가 다같이 동쪽 30리에 있다고 하였다. 벽파정도 동쪽 30리에 위치하고 있다. 방위상 동 30리는 고군면이므로 굳이 이곳에서 비정하자면 원포의 금날섬목 정도라 하겠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동여도(東輿圖)』에 사월포의신면 초평리의 오른쪽에 있다고 쓰여 있다는 점이다. 사월곶이와 사월포를 같이 보고 있는 듯하다. 사월포의 고증이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1457년 이곳에 배치했던 군대를 금갑만호진의 본진에 합했다는 기록 때문이다. 현재의 지형으로 보면 의신면 송군리라고 추측된다. 다만 원포 일대의 고증이 필요하다.

[사구미연대]

사구미연대(沙口味烟臺)는 꼭 찾아야 할 지명 중의 하나이다. 1759년 『여지도서』 금갑진 선창 곁에 사구미, 상당곶이, 굴포 남도진 순서로 3개의 연대가 그려져 있다. 이를 참고했음인지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진도군의 문화유적』에 금갑진성 곁에 있는 연대봉[85m] 봉수터를 사구미연대로 비정한 뒤 많은 사람들이 이 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정은 다시 검토해야 할 여지가 많이 있다.

『여지도서』에서는 굴포와 상당은 각각 군에서 30리라 했고, 사구미는 남쪽 40리라 했다. 다만 이후의 향토지인 1871년과 1893년의 『부읍지(府邑誌)』에서는 다 같이 서쪽 40리라 했다.

1872년의 「진도부지도(珍島府地圖)」에는 연대 대신 3개의 요망대가 그려져 있다. 요망대는 여귀산 봉수와 금갑진 사이에 2개가 그려져 있고 하나는 남도진 곁의 백야산에 그려져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금갑진 곁에 여귀산 봉수를 그려 놓고 굴포 연대는 남도포 옆에 그려 놓은 뒤 상당곶 연대는 임회면 중앙지산맥에 그려 놓았다.

금갑만호진 옆의 연대를 사구미연대라 한다면 남도포 앞산에 있는 연대 명칭은 묘연해진다. 모든 군진 근처에는 관아와 연락하던 요망대형 연대가 있었다. 본래 임회현(臨淮縣)봉상리에 있었고 봉상리 앞산은 희여산[白也山][270m]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희여산을 작은 봉화산이라 한다. 오늘날 이곳에는 봉화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봉화가 있어야 할 위치이고 『부읍지』에 기록된 서쪽 40리의 거리와도 일치한다. 이곳은 목장면과 임회면 사이에 있는 산이고 산맥 아래에 남도진이 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고증해야 할 지명들]

진도의 옛 기록에 나오는 지명 중 우리가 고증해야 할 지명이 몇 개 있다. 그것은 최영 장군이 제주목호난을 평정하려 가던 길에 머물렀다는 벽파진의 검산곶(劒山串), 고군면의 입석리(立石里), 일락구미(日落仇味), 염수리(廉水里), 군내면의 성조동(聖助洞), 천유리(川遊里), 진부리(津夫里), 임회면의 천태동(天台洞), 어부리(漁夫里), 만세리(萬世里) 등이다.

이밖에 기록에 나와 있지 않은 구전 지명 중 불당골과 점등 등 역사 유적과 관련한 지명들도 앞으로 고증해야 할 지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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