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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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鄕賢社 |
영어음역 | Hyanghyeonsa Shrine |
이칭/별칭 | 향현사(鄕賢祠)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길 25-38[성내리 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장호,이옥희 |
[정의]
전라남도 진도의 설군(設郡), 설읍(設邑), 건교(建校)에 공을 세운 인물과 임진왜란 때 공이 있는 인물을 배향한 사우.
[개설]
향현사는 진도 복군(復郡) 후 읍치의 창설 및 향교 건립에 공을 세운 인물과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8현[참군 조복명, 참군 박연(朴衍), 참군 박근손, 참군 김석곤(金碩崑), 참판 박인복(朴麟福), 계공랑 박정(朴挺), 호군 김중연(金仲淵), 참군 조맹문(曺孟文)]을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우이다. 건립 당시에는 향현사(鄕賢祠)라고 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훼철된 후 1933년 재건한 후에는 향현사(鄕賢社)라고 부른다.
[건립경위와 변천]
진도 향현사의 건립 시기는 1824년(순조 24)으로 추정된다. 1949년에 발간된 『창녕조씨 파보』에 수록된 ‘조복명’ 항목에 “순조 갑신년[1824] 읍치를 창건한 여러 공로자를 위해 함께 사우를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고, 밀양박씨 박창림 족계 소장문서에도 1824년(순조 24) ‘향현사 편정금’의 명목으로 2냥 2전 2푼을 지출했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근거로 한다.
『중증진도읍지』[1923]에 따르면 “향현사는 읍성 동쪽 봉암원 아래 있는데 창군(創郡)의 조복명, 박연, 박근손, 김석곤을 배향하였으며 박인복, 박정, 김중연, 조맹문을 추가로 배향하였고 박영, 양진회(梁進淮) 두 분도 함께 공적이 있으나 배향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진도 향현사는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봉암서원과 함께 철거되었다. 1931년경 향현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군민들의 여론에 따라 복원기성회[조병수가 장재(掌財)를 담당]를 발족하고 건립을 추진해 1933년 5월에 준공하였다. 향현사 복건 과정에서 정만조가 적어 준 「진도향현팔선생추모비」에 이에 관한 경위가 담겨 있다.
「진도향현팔선생추모비」의 비문을 통해 이때부터 향현사(鄕賢社)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음과 향현사가 복건된 자리는 원래 향현사가 위치했던 곳이 아니라 ‘향교가 세워져 있었던 옛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복건된 향현사는 제사를 위한 건물인 향현사와 강당 격인 소현당(昭賢堂)의 2동으로 구분되어 있어 옛 향교나 서원처럼 제향(祭享)과 강학(講學)을 겸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향현사는 6.25전쟁 이후 진도초등학교의 교실이 부족할 때 강당을 교실로 활용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제향 시설로 사용되어 왔다.
향현사의 사장(祠長)은 창녕조씨, 밀양박씨, 무안박씨, 김해김씨 문중에서 순서로 돌아가며 맡았다. 헌관은 네 성씨 외에도 현풍곽씨, 경주박씨, 제주양씨 등이 참여한 바 있고, 1990년대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이후에는 선출직 공무원인 군수가 참여하기도 한다.
향현사는 제향의 비용 일부와 향현사 정비 비용을 진도군에서 일부 보조해 주고 있다. 2012년 2월 29일 진도군의 향토문화유산 유형유산 제1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관련 조례에 따라 진도군 향토유형유산으로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향현사는 진도의 설군(設郡)·설읍(設邑)에 공이 있는 인물들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로서 역사적·향토사적 가치가 큰 유산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군민과 함께 애향, 자주, 자치 정신을 기리며 진도군의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