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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2036
한자 三一運動
영어음역 Samil Undong
영어의미역 March Firs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정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남도 진도군
관련인물/단체 정경옥(鄭景玉)|박종협(朴鍾浹)|박석현(朴錫炫)|김인수(金仁洙)

[정의]

1919년 3·1운동 당시 진도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확산·전개되었다.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 수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비록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낸 바가 되어,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정치를 펴는 한편, 민족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침탈의 강화로 전체 조선 민족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민족자본가 계급은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실시된 회사령(1910)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의 경우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조상 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 극히 일부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농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 자유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등으로 극악한 환경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처럼 식민통치 10년 동안 자본가·농민·노동자 등 모든 사회구성 계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입게 되자 정치·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져 갔고, 더욱이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처리를 위해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항일민족운동은 삽시간에 거족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경과]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적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마침 고종황제의 인산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 3월 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뿌리고 시위운동을 펴기로 했다. 또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고 「독립선언서」와 함께 운동의 방법·날짜 등을 전달해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대한 통고문, 미국 대통령·파리 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낼 의견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비용과 인쇄는 천도교측이 맡아, 2월27일 밤 보성인쇄소에서 2만 1천장을 인쇄, 은밀히 전국 주요도시에 배포했다. 손병희 이하 33명의 민족대표는 3월 1일 오후 2시 정각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당했다. 한편, 파고다공원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고, 만세운동은 삽시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오후 6시 진남포·선천·안주·의주·원산·함흥·대구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다음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도군에서는 3월 25일과 4월 1일 읍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며, 4월 16일에는 의신면·지산면·고군면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결과]

경성고보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귀향하여 한문서당에 다니던 정경옥(鄭景玉)·박종협(朴鍾浹)·박석현(朴錫炫)·김인수(金仁洙) 등이 주동이 되어 7,8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당생도들로 보향단(補鄕團)을 만들고, 1919년 12월 말경에 태극기를 비롯한 많은 선전물들을 준비하여 다음해 1월 1일을 기해 거사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日警)에 발각되어 아깝게 미수에 그치고 모두 체포되어 그중 앞에 든 4명은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3·1운동은 ‘전민족적’ ‘거족적’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에는 민족을 구성하는 각계각층의 모든 민족 성원들이 계급적 이익이 아니라 독립의 쟁취라는 민족적 권익과 민족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민족적으로 참가하였다. 진도 역시 한국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 독립시위운동에 동참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진도에서의 3·1운동 집회횟수, 집회 참여인원과 사망인수, 피상인수, 피수인수 등에 대한 통계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 집회상황이나 피해상황에 대하여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3·1운동이 ‘전민족적’ ‘거족적’ 독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진도에서의 3·1운동의 성격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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