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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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珍島金甲鎭城 |
영어음역 | Jindo Geumgapjinseong |
영어의미역 | Geumgapjinseong Fortress in Jindo |
이칭/별칭 | 금갑도진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길 75-2[금갑리 639-8]![]()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승필,조진선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5년 7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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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진도 금갑진성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
성격 | 수군진성 |
양식 | 석성 |
건립시기/연도 | 1485년(성종 16)~1499년(연산군 5)[추정]![]() |
구성 | 성곽, 치성, 해자, 동·서 2개의 성문, 성 내부에 객사, 아사(衙舍), 내아(內衙), 한문루(閑門樓), 운고(運庫), 장청(將廳), 사령청(使令廳), 군기화약고(軍器火藥庫), 진무청(鎭務廳)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성 밖에 인접하여 선창(船倉)이 있었음 |
높이 | 약 11자 |
길이 | 약 1,050자 |
둘레 | 약 1,050자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길 75-2[금갑리 639-8]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남도 기념물 |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에 있는 조선시대 전라우수영 소속 수군진성.
[개설]
진도 금갑진성은 남해와 서해를 잇는 주요 해상교통로에 있다. 왜구를 막는 전략상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수군만호가 지휘하는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은 돌로 쌓은 석성이며, 축조된 시기는 1485년에서 1499년 사이로 추정된다. 진도 금갑진성은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234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건립경위]
금갑진이 위치한 진도는 남해와 서해를 잇는 해상교통로에 위치하여 한반도의 연안항로와 중국 및 일본을 연결하는 군사 및 교역로의 주요한 길목이다. 고려 후기에 들어와 여러 차례 왜구의 침략을 받으면서 진도에 수군진이 설치되었고, 세종 28년 무렵에는 금갑도진에 수군만호가 상주하였다. 세조 때에는 방어 거점으로서 금갑도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군비를 강화하는 조처가 취해져 금갑진의 선군은 130명에서 291명으로 증원되었다. 금갑진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485년(성종 16)부터 1499년(연산군 5) 사이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갑진은 다른 수군진에 비하면 크지 않았지만 보유 병선의 수는 12척으로 다른 수군진보다 많았다.
수군 편제는 여러 차례 변동되었는데 전국적으로 통일된 것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완성되어 『건국대전(經國大典)』에 등재되어 법제화되었다. 이에 의하면 전라도 수군은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의 2개 주진으로 편재되었으며, 좌도의 거진(巨鎭)은 사도에, 우도의 거진은 임치도에 두었다. 금갑진은 우수영에 속하였으며 거진인 임치진의 속진으로 수군만호가 지휘하였다. 전라도의 수군 편제는 1522년(중종 17)에 왜구가 추자도에 침입한 것을 전후하여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완도에 가리포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배치하면서 변화를 겪었다. 이때 금갑진은 임치진의 속진에서 가리포진의 속진이 되었다. 이후 금갑진은 1894년 갑오개혁 때 다른 수군진들과 함께 폐진되었다.
[위치]
전라남도 진도의 남동쪽 끝에 있는 의신면 금갑리 해안에 위치하며 접도와의 사이에 수로가 발달하여 있다. 진도군 진도읍에서 의신면 소재지가 있는 돈지리까지 와서 18번 일반국도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가면 금갑리 해안도로의 입구에 다다른다.
[형태]
진도 금갑진성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으로 둘레 1,153척, 높이 8척, 샘 1이다.”라고 하였는데, 전라도에 축성된 다른 수군진성과 비교해 보면 가장 작은 규모이다.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진도 금갑진성의 크기는 대략 둘레 1,050척, 높이 11척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굴 조사 시 확인된 성벽의 추정 길이가 496m[약 1,061척] 정도여서 성 둘레에는 큰 오차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석루(石壘)가 약 5칸이 되는 곳에 깊이 4자 내지 10자, 폭 약 3칸의 해자로 생각되는 것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해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72년(고종 9)에 간행된 『전라우도진도부금갑진지도(全羅右道珍島府金甲鎭地圖)』에는 동·서 2개의 성문이 표시되어 있으며 성 내부에 객사, 아사(衙舍), 내아(內衙), 한문루(閑門樓), 운고(運庫), 장청(將廳), 사령청(使令廳), 군기화약고(軍器火藥庫), 진무청(鎭務廳) 등의 건물이 있고 성 밖에 인접하여 선창(船倉)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만호 1명과 군관 13명, 이(吏) 11명, 지인 3명, 사령 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현황]
진도 금갑진성은 접도와 금갑리 해안 사이에 형성된 수로를 마주하는 낮은 산지에 있으며,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 해안에 설치한 해안성이자 평산성이다. 그래서 자연 지형의 험준함을 살리고 은폐하기 좋은 지형을 활용해 축조해서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바로 앞에 있는 접도는 금갑리와 연결되어 있고, 주변이 청정수역인 데다 천연 수림과 쪽빛 바다가 어우러져 수려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2003년 지표조사 당시 진도 금갑진성은 대부분 훼철된 상태였으며, 북측 성벽과 서측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었다. 가장 양호하게 보전된 북측 성벽은 길이 약 25m, 높이 3.5m 정도로 마을 주민의 집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1872년 간행된 『전라우도진도부금갑진지도』에 나타나 있는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며, 4기의 만호비만 있다.
2008년 시굴 조사 결과 진도 금갑진성은 잔돌끼움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은 내탁에 의한 편축법으로 축성하였다. 치는 3개소에서 확인되었다. 『전라우도진도부금갑진지도』에는 동문과 서문만 표현되어 있으나, 북문과 함께 옹성이 조사되어 성문이 3개였음을 확인하였다. 마을 안길에는 군사 500명을 먹인 샘이라고 전하는 통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