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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664
한자 佛敎
영어음역 Bulgyo
영어의미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정명철나경수

[정의]

전라남도 진도 지역에서 석가모니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개설]

진도의 불교는 오래전부터 이 지역민들의 신앙이 되어 왔으나 오래된 사찰은 대부분 폐찰되었다. 해방 이전에 건립된 사찰로는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 있는 쌍계사(雙溪寺)가 유일하고, 폐사지에 재건한 용장사, 구암사 등 몇 개의 사찰이 있으며, 그 외에는 폐사지에 남아 있는 유구(遺構)와 석조로 이루어진 불탑, 불상을 통해서 흔적만이 확인되고 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진도와 불교의 인연은 고려 전기인 현종 때 재상을 지낸 최사위(崔士威)의 다음 묘지명에 처음 보인다.

“왕명을 귀하게 받들어 홀로 시의(時宜)를 판단하여 삼보(三寶)와 궁실(宮室)을 세운 것이 세 곳이다. 여기에서 그 이름을 살펴보면, 현화사(玄化寺)·봉은사(奉恩寺)·태묘(大廟)이다. 게다가 또 스스로 아뢰는 글[奏牘]을 올리자 곧 ‘임금’이 승낙한 것을 받들어 절[寺舍]과 궁(宮)을 창립, 수영(修營)한 것이 15곳이다. 보제사(普濟寺)의 금당(金堂)과 나한전(羅漢殿), 의왕사(醫王寺), 가원(家院), 서경(西京) 사천왕사(四天王寺), 서경[其京] 장락궁(長樂宮) 태조진전(大祖眞殿), 연주(延州) 경내 진북(鎭北) 영화사(靈化寺), 선주(宣州) 신중사(神衆寺), 진도현(珍島縣) 점찰원(占察院), 시진현(市津縣) 경내 포천(布川) 미륵원(彌勒院), 낭천군(狼川郡) 개통사(開通寺)·계성사(啓星寺), 개차근산(皆次斤山) 정양사(正陽寺), 수주 자복사(資福寺), 송림현 경내 보현관(普賢館) 등이다.”

여기에 나오는 진도현의 점찰원은 불교 사원으로서 소위 점찰법회를 목적으로 하는 건축물을 의미한다. 점찰법회는 소의경전인 『점찰경(占察經)』[원명은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이며, 『지장보살업보경(地藏菩薩業報經)』 또는 『대승실의경(大乘實義經)』이라고도 함]을 모본으로 삼아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방편을 교시하고자 하는 불교 의식이다. 신라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처음으로 이 법회를 창도하였고, 삼국통일 후 진표선사(眞表禪師)에 의해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종이 현재 용장성용장사가 있는 용장마을을 중시하여 이곳으로 치소를 옮기기도 했던 것으로. 당시 진도의 점찰사는 일종의 왕족이 경영했던 원찰이 아닐까 싶다.

한편 진도는 고려시대 무인 정권과 관련되기도 하는데,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최씨 정권 3대 권력자인 최항(崔沆)은 승려 시절 진도의 사찰을 거점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무인 정권 말기에는 국사(國史)를 진도로 옮겨 봉안하기도 하였다. 삼별초가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진도를 선택한 것도 고려시대 왕실과 최씨 정권의 원찰을 두었던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찰과 유물]

1.쌍계사

쌍계사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尖察山) 서쪽의 평지의 운림산방 옆에 있는 사찰이며 현재는 대흥사 말사이다. 전설에는 857년(문성왕 19)에 도선대사가 창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범우고(梵宇攷)』, 『여지도서(輿地圖書)』, 『옥주지(沃州誌)』 등의 사서에는 쌍계사가 진도 유일의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중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불우조」에 죽림사(竹林寺), 봉성암(鳳城庵), 사나사(舍那寺) 등이 기재되어 있으나 조선 말기의 「지리지류(地理誌類)」에는 모두 폐사지로 기록되어 있다. 쌍계사는 1648년(인조 26년)에 석의웅(釋義雄)이 창건하였으며, 시왕전(十王殿)도 이때에 차례로 건립되었다. 시왕전은 1694년(숙종 20년))에 훼손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1695년(숙종 21년)에 중건되었다. 대웅전은 강희 36년 정축년, 즉 1697년(숙종 23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측면 3칸인 맞배지붕의 다포양식이다. 현재 대웅전 내에 안치된 동종은 1720년(숙종 46년)에 쌍계사에서 주조된 것이다. 또한 시왕전이 1767년(영조 43년)에 중건(3창)되었다.

시왕전 중창으로부터 42년이 지난 1808년(순조 8년)에는 비바람으로 시왕전이 낡아져 전복되고 만다. 보림사에서 머리를 깍은 승려인 비구 경(敬)은 이것을 슬프게 여겨 진도에 살면서 쌍계사 정전을 중수하였다. 그는 단월가(檀越家)를 돌아다니면서 시주를 받아 시왕전을 새롭게 고치고,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안치하였다. 시왕상은 백성들로 하여금 악업을 짓지 못하게 만들고, 선업에 귀의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웠다. 또한 시왕에게 경건하게 기도하면 반드시 재앙을 물리쳐주고 복을 준다는 세속적인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시왕전이 중수된 것으로 여겨진다.

「쌍계사 시왕전중수기(雙溪寺 十王殿重修記)」(1808)는 갑도(甲島)에 귀향 온 호은노인(壺隱老人)에게 비구 정어(正語)가 청하여 중수 전말을 기록하게 하였다. 「쌍계사 시왕전중수기」는 향동 박인효(朴仁孝)가 지었으며 각수(刻手)는 비구 도인(道仁)이 맡았다.

1863년(철종 14년)에는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三尊佛]을 개금하였으며 이 무렵에 쌍계사의 중수가 또 한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초의(草衣) 의순(意恂)[1786~1866]의 「진도 쌍계사 대웅전불상개금소(珍島雙溪寺大雄殿佛像改金疏)」(1863)와 그의 제자 범해(梵海) 각안(覺岸)[1820~1896]이 쓴 「옥주쌍계사중수기(沃州雙溪寺重修記)」의 불사기록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1868년(고종 5년) 8월에는 처사 이침산(李枕山)이 쌍계사에 들어왔는데, 범해 각안이 이침산을 가리켜 ‘유마거사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기에 주목이 된다. 범해 각안이 지은 『동사열전』은 198명의 치적을 적은 책이었는데, 그 가운데 196명이 승려였고 나머지 두 명은 속인이었다. 이 두 명은 김대성(金大城)과 이침산(李枕山)으로 범해 각안은 대단히 비중 있는 불교인으로 이침산을 서술하고 있다.

1928년에는 대흥사의 용허선사가 군수 남정학(南廷學)의 도움으로 쌍계사를 크게 중수하였다고 하며, 현재는 대웅전, 시왕전,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근래에 쌍계사대웅전 본존불을 이안하는 과정에서 내벽에서 총 19점의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가로 3m, 세로 1.3m에서 가로 1m, 세로 0.6m 등 다양한 크기이다. 1910년(순종 4)에서 193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보고 있는 이들 벽화가 주목되는 까닭은 전통 불화기법이 아니라 서양화의 구도와 유화 기법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진도학회 학술대회에서 정병국 동국대학교 교수는 “쌍계사 벽화의 산수화는 우리 산수의 실경을 주제로 자유로운 회화적 구도와 기법으로 그려졌다.”고 하면서 “단색조의 색상이지만, 확실한 명암법과 투시법이 구사된 서양화법이 도입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보존과학적 연구 등에서는 진도 쌍계사대웅전 내부 벽화를 대상으로 현미경 조사, SEM-EDS, XRD, 입도 분석 등을 통한 과학적 조사를 실시하여 벽화의 구조 및 재질의 특성을 파악한 바 있는데, 현존하는 국내 사찰 벽화에서 유화 기법이 사용된 최초 사례로 보고 있다. 현지 향토사학자들은 이들 벽화의 시주자는 진도에서 채종업을 크게 했던 이완용이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하기도 한다.

2. 해원사터(海院寺-)

해원사터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94-1번지 일대로 현재의 금성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진도 금골산 오층석탑[보물] 부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3년 학교 주변을 정리했을 때 많은 석재와 초석·와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해원사터는 해언사(海堰寺)·해안사(海岸寺)·해월사(海月寺) 등으로도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가장 오래된 기록인 이주(李胄)의 「금골산록(金骨山錄)」에는 해원사(海院寺)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합리적일 듯하다. 「금골산록」은 1498년(연산군 4년)에 진도로 유배 왔던 이주가 쓴 것으로, 『속동문선(續東文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금골산진도읍에서 서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이 산 아래에 해원사가 있고 9층석탑이 있다. 산 위에 삼굴이 있는데 맨 밑의 서굴은 창건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일행(一行)이란 스님이 향나무로 16나한을 조성하여 굴에 안치하고, 굴의 곁에 별도로 고찰 6~7칸 있어 스님들이 거처하고 있다. 또한 동굴의 주사(廚舍)는 모두 비바람에 퇴락되었으나 굴 북쪽 비탈을 깎아서 미륵불을 만들었는데 옛날 군수 유호지(柳好池)[1469~1472, 진도군수 재임]가 만들었다.”

이와 같은 해원사의 기록은 「금골산록」에만 있고, 당시 고기(古記)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원사는 이때까지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금골산록」이 기록된 후인 16세기 이후에 폐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골산록」에 미륵불로 기록되어 있는 금골산마애여래좌상(金骨山 磨崖如來坐像)은 해발 200여 m의 금골산 정상 암벽에 새겨져 있다. 암벽의 높이는 약 10m이고 가로 너비는 22m쯤 된다. 여기에 감실을 파고(약 5~7m 안으로 굴을 팜) 그 안에 마애불을 조각하였는데 전체 높이는 3.8m이다. 머리에 두광을 새긴 이 불은 좌상으로서 비교적 조각기법이 세련됐다.

소발을 한 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고 둥글넓적한 얼굴에 눈·코·입·귀 등을 표현하였는데, 입은 일자형이고 눈은 지그시 감은 듯 명상에 잠겨 있다. 또 코는 넓적하고 상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 마애불의 전체적인 기법이 졸렬하게 보인다. 목은 아주 짧으며 삼도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인데, 특이한 것은 오른편 어깨에 조식한 의문이다. 두 가닥이 겹쳐서 밑으로 내려오다가 오른팔에 걸친 의문과 연결되고 있다. 역시 왼쪽 팔에서도 의문이 있는데 균형미를 잃어 조잡한 감이 있다. 무릎은 오른발이 밖으로 나오고 왼발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상좌를 하였으며 군의자락이 무릎을 덮어 그 끝이 무릎 밑으로 겹쳐져 있다. 수인은 아미타수인 가운데 중품하생인을 결하고 있다. 두광은 두정을 중심으로 두 줄의 음각 원대를 둘렀을 뿐 다른 조식은 보이지 않는다. 가슴 중앙에 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는데 처음 조성할 때 간단한 복장물을 넣으려고 만들어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높이 304㎝, 상호 높이 88㎝, 무릎 너비 285㎝, 무릎 높이 76㎝이다.

3. 죽림사지(竹林寺址)

죽림사지진도군 임회면 죽림리 마을 뒤 북서쪽으로 500m 지점의 여귀산(女貴山) 동쪽 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터에서 죽림사라고 단정할 만한 유물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구전과 죽림(竹林)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보아 이곳의 절터를 죽림사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부근에는 탑립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의 이름 역시 죽림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죽림사는 고려시대 때 창건했다고 전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지만 연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탔다고 하며, 1656년경에 간행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기록되어 있으나 1780년대에 간행된 『범우고(梵宇攷)』에 “죽림사금폐(竹林寺今廢)”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범우고』 간행 이전에 죽림사가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에는 3단으로 된 석축이 남아 있다. 3~5m 높이의 석축이 양쪽으로 30m의 거리를 두고 서 있고 가운데는 김해김씨의 묘 2기가 있다. 석축은 1m 크기 가량의 정사각형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주변에 자기편과 많은 기와편이 흩어져 있고 석축 위쪽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절터의 전체 넓이는 남북 40m, 동서 30m의 크기로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4. 영흥사지(永興寺址)

진도군 임회면 죽림사지에서 북쪽으로 50m 떨어진 지점에 영흥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영흥사는 1930년경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절터 앞에 1962년에 세운 영흥사창건주김남옥대선사비(永興寺創建主金南玉大禪師碑: 높이 90㎝, 너비 30㎝)만 남아 있다. 비의 뒷면에는 시주자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절터는 높이 1.2~1.5m의 석축 위에 동서 25m, 남북 15m의 평지가 있다. 이곳이 절터였다면 작은 암자였을 것이다.

5. 용장사(龍藏寺)

용장사지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52번지에 위치하며 현재 사찰이 복원되어 있다. 용장사가 처음 세워진 때는 고려 전기 고왕(高王) 때라 전하는데, 『진도군지』에서는 고왕을 고려 태조 때의 후진국(後晋國) 고왕[936~943]이라고 여기고 있어, 고려 전기에 창건된 절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용장사라는 지칭은 하지 않았으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최우(崔瑀)의 서자인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이 무뢰배를 승려로 만들어 고리대금업을 시작하고 백성을 착취하였다. (중략) 만전이 일찍이 진도의 한 절[珍島一寺]에서 통지(通知)란 부하와 함께 심한 횡포를 부렸는데 안찰사 김지대(金之垈)가 그 절에 이르자 만전이 여러 가지 청탁을 했다.” 여기서 진도의 한 절이란 구절이 보이는데, 이 구절을 통해 이곳을 용장사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옥주지』에 나온 고왕(高王)은 고려 고종(高宗)[1213~1259] 대를 가리킨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1985년에 나온 「진도용장성지표조사보고서(珍島龍藏城地表調査報告書)」에 따르면 용장성지는 258만 평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조사되었다. 이곳에서 조사된 건물지 유구 가운데 초석의 형식 등으로 보아 삼별초군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법당은 최근에 지은 것이며, 진도 용장성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삼존석불이 있으며, 일명 용정사(龍井寺)라 부르고 있다.

한편 발굴 과정에서 ‘태평십년경오사월..금사사..조인(太平十年庚午四月..金沙寺..造印)’으로 판독되는 명문 기와가 용장사지에서 나온 바 있는데 태평(太平)은 중국 요나라 성종[1021~1030]의 연호로서 ‘태평십년경오(太平十年庚午)’는 1030년(현종 21)에 해당한다. 또한 실제 사찰명은 용장사가 아니라 금사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실제 1018년(현종 9)에 읍성[치소]을 고성에서 용장으로 옮긴 바 있는데 이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6. 한사리사지(寒寺里寺址)

한사리사지진도군 군내면 한사리 190번지, 즉 한사리 마을 뒤 북쪽의 마령산 아래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한산사(寒山寺)’ 또는 ‘한사’로 이름이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기록에는 없다. 이곳에서는 삼층석탑으로 보이는 석재, 삼각형의 판석에 양각한 불상, 와편 등이 확인되었다. 주민들도 이곳을 ‘절고랑창’, 또는 ‘절골’이라 부르고 있다.

한사리사지 석불좌상은 이 마을에 사는 정순홍 씨의 밭에서 발견되었는데, 원추형의 판석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전체 높이 177㎝, 좌상 높이 152㎝이며, 무릎 너비는 122㎝이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높게 솟아 있고 상호는 둥근 원만상이나 턱이 좁아지는 형이다. 눈은 지그시 감은 듯하나 마모가 심한 상태이며 코는 길게 내려오다 하단에서 퍼지는 벌렁코를 하고 있다. 입은 위아래 입술이 튀어나와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다. 귀는 형식적으로 작게 처리하였다.

목에 삼도가 희미하게 보이며 법의는 통견이나 의문이 선명치 않아 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 수인의 경우 오른손은 무릎에 내린 항마촉지인인 듯하나 어색하고 왼손은 팔을 구부려 무릎 위에 놓았으나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무릎은 상체에 비해 너무 넓게 벌려 상하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7. 구암사(鳩岩寺)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는 있는 이 절터의 절은 상만사(上萬寺)였다고 구전되고 있으나 전하는 기록은 없다. 1974년에 복원되었으며, 복원 당시 지하층에서 다수의 고려자기 파편 등을 출토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절 이름은 한동안 만흥사(萬興寺)였다가 지금은 구암사(鳩岩寺)가 되었으며, 태고종에 등록되어 있다.

진도상만리오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이 있으며, 구암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은 높이 102㎝, 광배 너비 98㎝, 광배 두께 11㎝인데 광배 일부가 파손되고 마모가 심하여 불상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는 넓고 높게 솟아 있다. 상호는 눈, 입, 코 등이 양각되었으나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귀는 길게 내려뜨렸고 목에 삼도가 희미하게 음각되었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팔과 앞가슴에 음각으로 된 의문이 표시되어 있으나 지극히 형식적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앞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손바닥을 편 채 대고 있어서 아미타구품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무릎은 형태만 갖추었을 뿐이다. 전체적인 조각기법으로 보아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8. 향동리마애불(香洞里磨崖佛)

진도군 고군면 향동리에서 남쪽으로 약 1.5㎞ 내려가면 해발 291m인 가련봉이 나타난다. 향동리 마애불은 가련봉 정상 바로 밑의 암벽에 조각된 것인데, 약 3m 높이에 정동남향을 하고 있다. 불상의 높이는 약 2.5m로 큰 편이며, 불상이 조각된 암석의 질이 좋지 않아 불상의 형태를 거의 파악할 수 없다.

전체 모습은 좌상으로 보이며 얼굴은 형상만 갖추었을 뿐 자세한 윤곽이 나타나지 않는다. 수인은 오른손을 앞가슴에 대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며 왼손은 전혀 형태를 알 수 없다. 무릎은 결가부좌를 한 듯하나 윤곽만 드러날 뿐 의문이나 무릎의 형태 등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범바위’라 일컫고 있으며 암벽의 전체 높이는 약 25m쯤 된다.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9. 동백사지(冬栢寺址)

지산면 와우리에는 지력산이 솟아 있는데, 이곳에 동백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며 절터로 보이는 곳이 발견되기도 했다. 조성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경영하는 말 목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말의 건강 등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론이 현지 향토사학자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 현재의 지산면은 과거 목장면이었으며, 멀지 않은 지역에 국립 목장을 맡은 관청이 소재했던 관마리(官馬里)라는 지명이 있다. 동백사는 진도의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섬들 중에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많아 관심을 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 지명과 관련하여 한편의 전설이 전해 온다. 해 질 녘 학을 잡기 위해 지력산에 올랐던 한 스님이 바다 위를 나는 학을 잡지 위해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스님이 입고 있던 가사는 떨어져 가사도가 되고, 장삼은 장삼도가 되었으며, 상의가 떨어진 곳은 상의도, 하의가 떨어진 곳은 하의도, 발가락이 떨어진 곳은 발가락섬, 손가락이 떨어진 곳은 손가락섬이 되고, 심장이 떨어진 곳은 불도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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