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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362
한자 宗敎
영어의미역 religion
분야 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명철나경수

[정의]

전라남도 진도 지역에서 초월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을 성스러운 것으로 믿고 의지하는 일련의 신앙 체계.

[개설]

종교는 광의와 협의로 나누어진다. 먼저 협의의 종교는 그 종교를 창시한 교조가 있고, 그 교조의 가르침을 문서화한 소위 경서(經書)가 있으며, 그 교조의 가르침과 경서에 따라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체계적인 전도 조직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종교의 3대 요소를 어느 하나라도 결여하고 있으면 광의의 종교에 해당한다. 전자를 고등종교, 인위종교, 윤리종교, 내세종교 등으로 부르며, 후자는 자연종교, 현세종교, 민간신앙 등으로 부른다. 일반적으로 일컫는 종교는 협의의 종교를 지시하는 예가 많다.

이렇게 제도화된 종교는 오랜 옛날부터 여러 변화를 거치면서 인간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다. 첨단과학이 종교적 현상을 부정하는 오늘날에도 종교는 많은 사람들의 내적 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간은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힘을 빌려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불안, 죽음, 고민 등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한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도에도 유교, 불교,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통일교 등의 종교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현황]

1. 유교

유교를 대표하는 집회와 가르침의 장소는 향교이다. 향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시기는 717년(신라 성덕왕 16)이다. 진도에도 군내면 용장리 또는 월가리 고지(古址)에 향교터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 1437년(세종 20)에 현 향현사(鄕賢詞) 부근에 신읍의 향교를 건립, 봉향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1475년(성종 6) 오리정 부근으로 옮겨졌고,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소실되어 위패(位牌)만 철마산 바위굴에 모셔졌다. 1623년(인조 1)에 진도읍성의 남쪽에 대성전·동재·서재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다.

진도읍 교동리에 있는 진도향교는 1667년(현종 8)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689년(숙종 15)에 명륜당·동재·서재가 개수되었고, 제기고(祭器庫)·포재소·대문 등이 지어졌다. 현재의 진도향교는 1,000여 평의 대지 위에 돌담이 둘러져 있고 오성(五聖) 25현위(賢位)가 봉안되어 있다. 봄·가을에 대성전에서 석전(釋奠)을 지내고 있다. 진도향교는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으며,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에서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되었다.

2. 불교

현재의 유물·유적으로 보아 이미 고려시대 때는 불교가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임회면 탑립마을에 있던 죽림사를 해남으로 이건하여 대흥사를 창건했다고 하고, 지산면 지력산에는 말목장을 위한 동백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삼별초가 1270년(원종 11)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진도 용장성의 근거리에 용장사가 있다. 초석과 석물들만 남아 있던 것을 재건한 사찰이다. 1756년(영조 32) 진도인 김몽규(金夢奎)[1694~1775]가 편찬한 『옥주지(沃州誌)』에 따르면, 용장사는 고려 태조 때 또는 고려 고종(高宗) 때 초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초석 등의 형태로 보아 용장성보다는 오래전에 조성된 사찰로서 고려조 세력가였던 최씨 문중의 원찰이었다는 설도 있다.

발굴 과정에서 ‘태평십년경오사월..금사사..조인(太平十年庚午四月..金沙寺..造印)’으로 판독되는 명문 기와가 나온 바 있는데 태평(太平)은 중국 요나라 성종[1021~1030]의 연호로서 ‘태평십년경오(太平十年庚午)’는 1030년(현종 21)에 해당한다. 또한 실제 사찰명은 용장사가 아니라 금사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실제 1018년(현종 9)에 읍성[치소]을 고성에서 용장으로 옮긴 바 있는데 이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용장사에는 용장사 석조약사여래좌상(龍藏寺石造藥師如來坐像)[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이 모셔지고 있는데, 고려시대 석불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금골산마애여래좌상(金骨山磨崖如來坐像)[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 진도 금골산 오층석탑(珍島金骨山五層石塔)[보물], 구암사에 있는 진도상만리오층석탑(珍島上萬里五層石塔)[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등도 고려시대의 불교유산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진도의 대표적인 불교 사찰은 쌍계사(雙溪寺)이다.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 서쪽의 운림산방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사찰은 이 사찰은 조선 중기 1648년(인조 26) 의웅(義雄)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당시 시왕전(十王殿)도 차례로 건립되었다.

시왕전은 1694년(숙종 20)에 훼손되었다가 다음 해인 1695년(숙종 21)에 중건되었다. 대웅전은 1697년(숙종 23)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측면 3칸인 맞배지붕의 다포양식이다. 현재 대웅전 내에 안치된 동종은 1720년(숙종 46)에 쌍계사에서 주조한 것이다. 또한 시왕전이 1767(영조 43)에 중건(3창)되었다.

1928년에는 대흥사의 용허선사가 진도군수 남정학(南廷學)의 도움으로 쌍계사를 크게 중수하였다고 한다. 현재 쌍계사에는 대웅전·시왕전·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한편 쌍계사대웅전 본존불을 이안하는 과정에서 내벽에서 총 19점이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가로 3m, 세로 1.3m에서 가로 1m, 세로 0.6m 등 다양한 크기이다. 1910년(순종 4)에서 193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보고 있는 이들 벽화가 주목되는 까닭은 전통 불화 기법이 아니라 서양의 유화 기법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2016년 진도학회 학술대회에서 정병국 동국대학교 교수는 “쌍계사 벽화의 산수화는 우리 산수의 실경을 주제로 자유로운 회화적 구도와 기법으로 그려졌다.”고 하면서 “단색조의 색상이지만, 확실한 명암법과 투시법이 구사된 서양화법이 도입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보존과학적 연구 등에서는 진도 쌍계사대웅전 내부 벽화를 대상으로 현미경 조사, SEM-EDS, XRD, 입도 분석 등을 통한 과학적 조사를 실시하여 벽화의 구조 및 재질의 특성을 파악한 바 있는데, 현존하는 국내 사찰 벽화에서 유화 기법이 사용된 최초 사례로 보고 있다. 이들 벽화의 시주자는 진도에서 채종 사업을 크게 했던 이완용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진도읍 북산에 있는 청용사는 많은 불교 전적을 소장하고 있다. 대장경류(大藏經類) 3종 36축과 일반 불서(佛書) 25종 110책 등 모두 28종 146책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2002년에 주지로 부임한 도훈([정한종]이 여러 경로는 통해 수집, 소장하게 된 것을 사찰에 기탁한 것이다. 한편 많은 사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지력산동백사지, 여귀산 죽림사지(竹林寺址), 영흥사지(永興寺址), 한사리사지(寒寺里寺址) 등의 불교 유적이 있다.

3. 기독교

기독교가 진도에 전해진 시기는 1905년이다. 당시 진도에 온 프레스톤 목사와 오웬 목사, 다니엘(T. H. Daniel) 의사는 서울에서 유배 온 젊은 선비를 만나 전도했으며, 분토리(糞土里)교회에서 최초로 예배 모임을 가졌다.

이렇게 시작된 진도 선교의 결과로 1905년에 분토리교회, 1919년에 중앙교회, 1921년에 금갑교회, 1927년에 고군중앙교회, 1931년에 중굴교회, 1946년에 벽파교회, 1952년에 의신중앙교회 등이 세워졌다. 현재 진도에는 본섬에 75개의 교회가 있으며 인근 섬까지 포함하여 105개의 교회가 있다

천주교가 진도에 뿌리를 내린 것은 1870년경 제주도 선교를 담당했던 프랑스 신부가 작은 범선으로 목포에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상조도 동구리에 안착하여 설교와 함께 공소를 개설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후 1900년부터 1904년에 걸쳐 조도면 동구리 공소, 창유리 공소와 함께 지산면 인지리 공소가 개설되었다.

처음에는 민간 가옥을 사서 공소로 사용했으며, 목포 산정동 본당 드애(조유도) 초대 주임신부가 1909년까지 3개 공소를 관할하면서 세례 및 예비자 교리를 실시했다. 1922년 산정동 본당에 주재용 신부(바오로)가 부임하면서 동구리 공소를 내방하여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많은 선교 활동을 했고, 최덕홍 신부 때는 신동 공소에 첫 복음을 전파하고 첫 공소 예절을 거행했다.

1952년 9월에는 산정동 본당에서 고광민(베드로)을 진도 전교회장으로 파견했는데, 이 때 구입한 한옥이 현재 진도읍 남동리 586번지에 있는 광주대교구 천주교 진도성당으로 발전하였다. 1954년 11월17일 현 주교(해럴드 헨리)는 진도군 관내 모든 공소를 산정동 본당에서 분리하여 진도본당으로 승격시키고 초대 본당 신부로 장옥석 신부를 임명했다. 1956년 10월18일 현 본당 자리에 52평의 성전 신축을 완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천도교

천도교(동학)가 진도에 들어온 것은 1892년 1월, 나주접사 나치현(羅致炫)에 의해서였다. 그는 진도군 의신면 만길리 ‘자라머리마을’에 와서 포덕(布德)하였고, 나봉익(羅奉益)·양순달(梁順達)이 입도하면서 진도에 뿌리를 내렸다. 1894년에 조도면 남동리 김광윤(金光允)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입도했다고 한다.

천도교가 혁명 운동으로 맨 처음 진도에 들어온 것은 박중진에 의해서였다.「순무선봉진등록」에 “금년 7월에 본부 조도면 적괴 박중진이 영광과 무주 등지에서 무리를 모아 배를 타고 내침, 성을 공략하고 살해하고 재물을 노략질하였으며 군기도 약탈하고 마을에 계속 머물면서 불을 지르고 가산을 부수며 백성의 재물을 겁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박중진의 유골이 일본에서 발견되어 한국으로 봉안된 바 있다. 홋카이도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박맹수가 1995년 동학농민 지도자인 박중진의 두개골로 추정되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대학 내 강당 한쪽에서 발견된 이 유골을 조사해 온 대학 측은 중간 보고서에서 유골의 주인공이 남접의 수장이던 녹두장군 전봉준 휘하 장수 중 진도에서 세를 떨친 박중진으로 추정했다. “유골은 대학 전신의 농학부 출신인 사토 마사지로가 목포 권업모범장 기수로 근무하고 돌아오는 길에 진도에서 구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밝혔으며, 유골에는 명치 27년 동학당이 궐기했다는 내용과 함께 사토 마사지로가 쓴 명치 39년[1906년]이라는 기록이 첨부되어 있다.

이에 1996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협의회[공동대표 한승헌 변호사]가 학교 측과 협의하여 유골을 한국으로 봉환하기로 하였다. 진도에서는 동학기념관을 조성하여 한국으로 돌아온 유골을 봉안하고자 여러 차례 협의도 하고 학술대회 등을 통해 기념사업 등을 촉구한 바 있지만, 행정적 도움을 받지 못하고 표류하였으며, 유골은 현재 전주역사박물관에 임시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원불교

원불교 진도교당은 1986년 박혜순 원불교목포교구장의 염원과 신양화 교도의 1천만원 특별성금으로 설립되었다. 진도읍 성내리 22번지의 28평 기와집을 전세로 얻고 삼육일(6일, 16일, 26일) 법회를 진행하면서 진도 군민들에게 원불교 교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3년 뒤인 1989년 김연희 초대 교무가 정식으로 부임한 후 10년 동안 적극적인 교화가 이루어졌다. 2대 박상덕 교무, 3대 정창현 교무에 이어 현 김선명 4대 교무가 원불교 진도교당을 맡고 있다.

한편 원불교 진도교당은 지금까지 매년 독거노인, 조손가정, 한부모가정 등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쌀을 비롯한 생필품을 전달하는 등,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함께 나누기 위해 꾸준히 선행을 이어가고 있다.

6. 통일교

진도 통일교회는 1962년 12월 1일 유종회 목사가 진도에 와서 진도 교역의 개척 전도와 봉사 활동을 펴면서 시작되었다. 통일교회는 그로부터 10년 동안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1972년에야 비로소 진도읍 남동리 614-2번지에 성전을 짓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착했다. 유종회 목사로부터 7대 여순봉 목사까지 성전기금 마련 운동을 벌이고 본부의 지원에 힘입어 이용도 목사 때 준공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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