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618
한자 風水地理
영어음역 pungsujiri
영어의미역 Pungsu / Feng Shui
이칭/별칭 풍수,감여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박철웅

[정의]

음양오행설을 바탕삼아 땅에 관한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

[개설]

진도는 울돌목이라고 불리는 명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육지부와 떨어진 섬이다. 이런 섬의 원격성이 진도의 고유한 문화적 속성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한때 진도는 10만이 넘는 인구를 부양할 정도로 농업 생산성이 높았으며, 섬이면서도 유난히 농경문화의 요소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풍수지리 역시 농경문화의 한 특성이다.

[종류]

풍수는 크게 양택풍수와 음택풍수로 나눌 수 있다. 양택풍수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삶의 무대가 되는 국가·도읍·촌락·가옥 등의 터를 잡는 논리이다. 따라서 양택풍수는 자연과학적·문화적 사고 체계이며, 공간 환경적 요소가 강하다. 음택풍수는 조상의 뼈를 묻는 매장문화와 관련되어 중시되는 터잡기 논리로, 신앙적 요소가 강하다.

읍성의 설읍(設邑) 과정, 전설, 설화, 지명 등에서 유추할 수 있는 진도의 풍수지리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설읍]

1. 진도 용장성(珍島 龍藏城)

1270년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곧바로 새 수도를 건설하였다. 삼별초가 건설한 궁궐과 성곽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유적지 조사보고에 의하면, 도성이었던 진도 용장성의 총 길이는 약 13㎞이며 성 안의 면적은 258만 평 정도로 추산된다.

진도 용장성은 기존 용장사(龍藏寺)를 중심으로 조성하였는데, 진도의 새 정부에서는 스스로에게 고려의 정통성이 있음을 자부하였다. 또한 당시 고려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풍수도참설을 내세워 삼별초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진도 용장성울돌목을 건너는 바닷길인 벽파진을 북쪽으로 마주하고 있다. 방향으로 보면 북향으로, 대부분의 도성이 북쪽에 산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여몽연합군의 침입을 한눈에 감지할 수 있는 수로를 감시하고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을 택한 때문이었다.

2. 진도읍성

진도고읍성은 남쪽으로는 해발 485m의 첨찰산 등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으로는 진도 용장성의 남벽이 지나가는 산줄기로 인해 좁은 골짜기에 들어서 있어 배산임수의 지형에 들어선 대부분의 읍성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진도고읍성은 좁은 계곡을 지나 동쪽 끝자락에서 바다와 만나게 된다. 당시 현재보다 하구역의 개간이 많지 않았으며, 인구 부양력도 적었고, 외부와의 연결 및 방어가 가능한 곳을 찾아 입지한 결과였다.

현재의 진도읍성은 1440년(세종 22) 진도고읍성에서 현재의 진도읍으로 진도군의 터전을 옮기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도읍성터는 풍수학설상 양류도수체(揚流倒水体)로 무궁히 발전할 지덕(地德)을 겸한 길지(吉地)이기 때문에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도읍성을 옮겨 세운 자연적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었다.

첫째, 진도고읍성은 진도군의 북동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진도군 전 지역을 관할하기에는 불편하였다. 또한 동쪽은 바닷가와 가깝기 때문에 왜구를 방어하는 데도 불리한 점이 많았다. 둘째, 현재 진도읍성의 배후에는 철마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가 있어 치소를 옮기는 데 유리하였다. 셋째, 진도읍성은 진도군의 중앙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진도군 전체를 관할하는 데 편리하였다. 또한 진도 전 지역과 연결되는 도로망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치소로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넷째, 우리나라 대부분의 읍성과 마찬가지로 진도읍성도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 잡아 방어하는 데 유리하였다. 진도읍성 남쪽으로는 북산으로부터 유입되는 하천이 흐르고 있어 자연해자(自然垓字) 역할을 하였다. 북쪽으로는 진도읍의 주산인 철마산이 위치하며, 진도읍 전 지역을 높고 낮은 여러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하였다.

이러한 조건을 배경으로 철마산과 북산을 진산으로 하여, 동외리로 흐르는 산줄기를 좌청룡으로 하고 교동리로 흐르는 산줄기를 우백호로 하여 그 혈의 중앙에 해당하는 곳인 산록면과 평지가 접지하는 곳에 진도읍성을 세웠다. 진도읍성이 자리한 곳은 앞의 남산을 조산으로 삼고 그 사이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진도천이 교통·배수·방어 기능을 하는 전형적인 명당도를 연상케 한다. 이처럼 진도읍성은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형국을 바탕으로 하여 계획적으로 설계된 읍성이었다.

[전설 1]

1931년 동경대학교 사회학자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쓴『조선의 풍수』라는 책이 있다.

묘지풍수의 소응(所應)의 전설에 귀신을 모시고 부자가 된 진도읍 남동리의 부자 곽씨는 그 선조가 귀신으로부터 받은 길지에 묘를 쓰고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묘는 현풍곽씨 곽흥손(郭興孫)의 묘다. 곽흥손은 수유리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읍장에 갔다가 해질 무렵에 산을 돌다가 술에 취한 귀신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간이 뚝 떨어졌다.

그 소리를 듣고 귀신들이 “사람이 죽어 있으니 정기 있는 곳에 묻어주자”면서 자신을 걸머지고 가서 군내면 수성리 뒷산 꼭대기에 묻으려 했다. 그 때 실신했던 곽씨가 깨서 크게 두려워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 뒤 그 자리를 찾아 귀신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하니 귀신들이 그 무덤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곽흥손은 그 일을 큰아들에게 말하며 자기가 죽으면 그 곳에 묻도록 일러두었다. 3년 후에 곽흥손이 죽자 큰아들은 곽흥손의 유언대로 그 자리에 아버지를 묻었다. 그 후 현풍곽씨 가문은 진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진도에서는 부자가 되려면 솔개를 기름에 튀긴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밤중에 산속에서 솔개를 태우면 그 냄새를 맡고 귀신이 나타나는데 그 때 솔개고기를 주면 귀신이 감사하여 그 사례로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고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전해오는 음택풍수 관련 이야기는 많다. 진도 현풍곽씨의 후손인 곽호례의 처는 진도 밀양박씨였다. 박씨는 미리 정해 놓은 친정아버지의 묘터인 읍내 정거름재 묘소에 밤에 몰래 가서 물을 채워 두었다. 박씨 집안은 무덤에 물이 가득 찬 곳이라 하여 묏자리를 해남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후에 박씨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 자리에 아버지를 묻도록 하였다. 훗날 박씨 부인의 후손들은 진도의 명문 집안이 되었다고 한다.

진도 경주김씨 집안 중 두계공파는 1583년 5세조 김익문(金益文)임회면 상만리에 자리 잡고 그의 무덤은 상만리 구서당골 장군바위 밑에 두었다. 그 묏자리는 8대 장상을 낼 장군대좌 형국에 있어 그 후손 중에서 김병삼 장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옛날 진도에 명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배로 굴포를 지나던 명지관이 여귀산을 바라보니 서남쪽에 명당혈이 뭉쳐 있으므로 배에서 내려 장군바위를 찾아왔다. 그런데 이미 묘가 써 있었으므로 탄식하며 돌아갔다는 말이 전해 온다. 50여 년 전 이 집안 후손 중에서 장군대좌 형국 옆에 그의 아버지를 몰래 묻었다가 집안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파묘(破墓)당했다고 한다.

[전설 2]

진도의 풍수설화는 전설적인 자료를 중심으로 풍수가 도선의 이야기와 해남 풍수쟁이 이의신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명당이야기는 앞에 말한 묘자리이야기와 같다. 의신면 중리에서 전해지는 구룡동 폐허는 산혈을 잘라 패가한 풍수설화이다. 의신면 중리 구룡목에 살던 밀양박씨 집안에서 스님을 학대하자, 학대받은 스님이 구룡목을 잘라 마을 안으로 물을 끌어들여 밀양박씨 집안이 망했다는 이야기다.

[지명]

지명에 나타난 풍수관으로 진도읍 사도진은 장사도강(長巳渡江) 형국이다. 진도읍 매향동은 매화낙지(梅花落地) 형국이다. 봉상리(鳳翔里)는 풍수설로 봉의 날개란 뜻의 봉상으로 불린다. 여귀산(女貴山)은 여자 산신령이 다스리는 산으로 귀한 여인이 나올 풍수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