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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804
한자 姓氏世居地
영어음역 seongssi segeoji
영어의미역 single-clan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김정호

[정의]

전라남도 진도지역에서 성씨가 대대로 세거한 지역.

[개설]

고려조는 940년(태조 23)에 지방 구역과 명칭을 새로 정하고 그 지역 공무를 맡을 토성(土姓)을 정했다. 당시 정부는 지방 토호 중에서 가장 세력이 있는 토호를 호장(戶長) 또는 상대등(上大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지방 업무를 관할하게 했다. 이들은 그 지역의 토박이 성인 토성을 썼다. 조선조 초엽까지도 고을마다 토박이 성씨들이 있었고 시조와 관계없이 신라의 옛 성씨나 중국의 명문 성자를 딴 성(姓)자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점차 바뀌었고, 진도에서도 진도를 본관으로 토박이 성씨도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사라져갔다.

[변천]

1454년에 간행된『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해진군조」에 적힌 진도군의 성씨는 망성, 속성까지 포함하여 15개로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조선조 개국 후 사정도 적어 놓고 있지만 삼국시대 이후의 연혁과 더불어 고려 때 각 고을의 토성을 적고 있다. 1530년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세종실록지리지』와는 달리 고려 때 진도현(縣)을 진도군(郡)이라 하고 다른 세 고을은 현이나 향(鄕)의 지칭 없이 지역 토성을 실록 때와 같은 성씨만을 적어 놓고, 의신편에 김씨와 이씨의 두 성을 추가하고 있다. 이는 실제 거주 주민 성씨 자료와 다른 토착 성씨만을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도 토착 성씨들은 그 고을 이름을 본관(本貫)으로 썼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명문 거족의 본관 성씨들에 합보하는 것이 유행하였고, 1759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진도군 내 토박이 본관 성씨가 자취를 감추었다. 거의 같은 무렵인 1761년에 진도군 고군면 향동 출신인 김몽규(金夢奎)가 지은 『옥주지(沃州誌)』에도 22개 성씨가 나오지만 진도 본관 성씨는 찾아 볼 수 없다. 1923년에 편찬된 『진도군지』에는 옛 성씨로 임(任)·김(金)·이(李)·한(韓)·정(鄭)의 5개 성씨를 싣고 지금 성씨라 하여 39개 성씨를 쓰고 있다. 1902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진도 본관 성씨가 24개가 나온다. 『증보문헌비고』가 한말 이전의 여러 기록에서 모은 진도 본관 성씨로는 진도김씨·진도임(任)씨·진도이씨·진도한씨·진도정(鄭)씨·가흥조(曺)씨·가흥정(丁)씨·가흥김씨·가흥여씨·가흥평(平)씨·가흥유(兪)씨·임회배(裴)씨·임회박씨·의신임(任)씨·의신김씨·의신이씨·의신나씨·진도최씨·진도조(趙)씨·진도장씨·진도임(林)씨·가흥임(任)씨·가흥소(蘇)씨·임회최씨 등이다. 이 성씨들이 소멸된 진도 본관 성씨의 대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85년 인구 조사 때 성씨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진도군내 성은 82개 성이고, 본관 수는 664본(本)에 달하고 있었다. 인구 조사를 하면 다시 통계가 나오겠지만, 앞으로 성은 줄고 본관은 늘어날 가능성이 많다. 외국 여성들의 국제결혼에 의한 국적 취득 때문이다.

[현황]

한 성씨가 300년 이상 정착한 곳을 중심으로 역대 진도지역의 성씨별 세거지를 성씨, 세거지역, 입향연대, 입촌조로 나누어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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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진도지역의 성씨별 세거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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