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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524
한자 民俗
영어음역 minsok
영어의미역 folk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지춘상박종오

[정의]

전라남도 진도 지역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습속.

[개설]

민속은 민중들의 삶속에 일상적, 집단적, 유형적으로 되풀이되어 누적된 지식, 기술, 행위 등의 총체적인 문화현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따라서 민속은 공간적, 역사적, 시간적 조건에 의해 형상화된 민(民)의 생활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징]

진도는 공간적으로 한국의 남해(南海)에 위치하고 있는 도서(島嶼)로서 천혜의 자연경관과 비옥한 농토가 많아 고려시대부터 ‘기름진 고을’이라는 의미의 ‘옥주(玉州)’라고 불렸다.

고려 명종 때 김극기(金克己)가 “멀고 아득한 신선(神仙) 사는 곳과 같은 이 땅은 서울로부터 얼마나 되는고. 하늘이 이 선경으로 하여금 청유(淸幽)를 점유(占有)케 하였구나. 고역(孤域)은 산등성을 삼키고 험준한 데에 걸친 것 같고, 즐비한 집들은 벼랑에 붙어서 물결을 베개한 것 같구나.”라고 읊고, 조선시대 효종 때의 사람 신규(申奎)는 “국중(國中)에서 뛰어난 경치 좋은 곳이다.”라고 노래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진도는 이러한 천혜의 공간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역사적으로는 많은 시련을 겪은 고난의 섬이기도 하다. 그것은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쟁(對蒙抗爭)으로 기록된 사실(史實)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무인정권의 전위부대요 몽고에 대한 항쟁세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것이 삼별초인데,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왕족(王族)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개경의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1270년 8월 항구적인 근거지로 개경과 거리가 먼 진도로 남하하여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이들이 진도를 본거지로 택한 것은 개경에서 원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서남도서 중에서 가장 크고 비옥한 농토가 많아서 경제적인 자생기반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라는 계략에서였다. 그러나 이듬해 5월 김방경(金方慶)이 몽고군과 함께 쳐들어옴으로써 삼별초는 그 중심인물을 거의 잃고, 그 나머지 무리가 김통정(金通精) 지휘 하에 탐라(耽羅)로 패퇴함으로써 진도는 전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진도는 한(恨)이 서린 유배지(流配地)와 임진왜란의 전승지라는 명암(明暗)의 이중성(二重性)을 지니게 된다. 진도에 유배자의 신분으로 처음 들어온 사람은 고려시대 인종 때의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연루된 이자겸의 부하 공의(公義)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란 때 의종(毅宗)의 태자(太子) 기(祈)가 귀양을 왔다.

조선시대에서는 선조(宣祖)의 제1자인 임해군(臨海君), 제7자인 인성군(仁城君) 등의 왕족들이 유배생활을 했고, 민·관으로는 광해군 때 전라병사 이광영(李光英)을 비롯해서 수많은 인사들이 귀향살이를 했다. 근세에는 진도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정만조(鄭萬朝)가 고종 33년에 유배되어 12년간 적거하면서 유교문화 창달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조건이 진도의 문화와 민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오늘날 진도만의 고유한 전승문화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진도의 민속문화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조선의 수도이면서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던 한양과 거리가 먼 외딴섬이라는 공간적인 조건 때문에 프랑스의 질리에롱(Gillieron)이 ‘방언주권설(方言周圈說)’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 문화의 중심지에서 먼 거리에 위치하는 곳에 고어(古語)가 많이 남아 있다거나, 일본의 와카모리 다로[和歌森太郞]가 “옛날의 중앙문화지대를 중심으로 보다 원방(遠方)과 외측(外側) 먼 지역에 고풍(古風)의 유습(遺習)이 많이 남아 있다.”는 말과 같이 옛 풍속이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역사적인 조건이 개입되어 이룩된 문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접변현상(接變現象)을 일으켜 오늘날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채 전승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세시풍속]

진도에 전하는 설 풍속 중 하나는 드는 환갑쇠기로, 드는 환갑[59세]이 된 사람은 방에서 설을 쇠지 못하고 마구간이나 외양간, 헛간 등에서 잠을 청한다. 진도에서만 볼 수 있는 대보름 세시풍속으로는 도깨비굿을 들 수 있으며, 마을에서 대보름을 기해 거릿제를 모시는 곳이 많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바닷가에 나가 해산물을 부르기를 행하기도 한다. 또한 정월 대보름에는 더위팔기나 보름밥 얻어 먹기를 통해 건강을 기원하였고, 바람이나 달을 통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정초에는 토정비결 보기 등을 통해 한 해의 운세를 알고 허수아비 버리기 등을 통해 액맥이를 하였다. 2월 하루달날[하리드리날] 및 영등, 3월 삼짇날, 4월 초파일, 5월 단오, 6월 유두 및 충제, 7월 백중, 8월 추석 및 콩밭고랑 기기, 9월 중구, 10월 시제, 11월 동지, 12월 섣달 그믐 등의 세시에도 그에 맞는 의례나 놀이 등을 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세시 의례들은 점차 사라졌고, 설과 대보름, 추석과 동지 등에서 남은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평생 의례]

진도 지역 평생 의례는 기자(祈子) 의례, 출산 의례(出産儀禮), 혼인(婚姻) 의례, 상례(喪禮)와 장례(葬禮), 제사(祭祀) 의례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기자 의례는 자식이 없는 집에서 자식,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해 행하는 치성이나 기자굿 등의 여러 가지 의례를 행한다. 특히 ‘진도씻김굿’에 있는 지앙굿은 기자 의례의 하나이기도 하다. 출산 의례는 아이가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행하는 일련의 의례 행위를 말한다. 이는 산전의례(産前儀禮)와 산후의례(産後儀禮)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해산(解産), 작명(作名) 등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서 행해지는 여러 가지 의례가 행해진다.

혼인 의례는 혼기에 이른 남녀가 부부로 결합하는 의례를 말한다. 혼전 의례(婚前儀禮)로 의혼(議婚), 사성(四星), 날받이, 댕기풀이 등이 있으며, 혼례식(婚禮式)에는 초행(初行), 함 받기, 탈선(奪扇), 소례(小禮) 및 대례(大禮)가 있다. 혼후 의례(婚後儀禮)로는 신행(新行), 구고례(舅姑禮), 재행(再行) 등을 들 수 있다.

상례는 사람이 운명하는 순간부터 시신에 수의를 입히고, 입관하고,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것은 물론 근친들이 일정 기간이 지난 후 평상 생활로 돌아갈 때까지의 각종 의례를 통틀어 말한다. 제례란 제사(祭祀)를 지내는 순서와 형식, 그리고 예절 등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진도에서의 평생 의례는 전통적인 모습보다는 점차 초음파 검사, 산후조리원, 예식장, 장례식장 등의 모습들로 변모해 가고 있다.

[가정신앙]

가정신앙은 집 안에서 부녀자들이 사제자가 되어 가족의 안위와 건강 등을 기원하며 올리는 정기적, 비정기적인 의례 행위를 말한다. 가정신앙에서 모시는 신은 성주, 조령, 삼신, 철륭, 칠성, 업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이 중 성주는 집을 지켜 주는 신이고, 조령은 조상의 영을 모시는 것이다. 조왕은 부엌에서 모시는 신이고, 삼신은 아이를 점지하고 관장해 주는 신이다. 철륭은 집터를 관장하는 신이며, 칠성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것이다. 업은 집안의 재산을 불려 주고 집을 지켜 주는 신을 말한다.

이러한 신들은 집 안 곳곳에 좌정하여 가족을 위한 신으로 대접받았으나 시대적 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인식 전환, 생활 향상에 따른 가옥 구조의 개선 등으로 점차 소멸되거나 변화하고 있다.

[마을신앙]

마을신앙은 마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마을을 수호해 주는 것으로 믿어지는 대상에게 올리는 의례를 말한다. 진도의 경우 신앙의 전체적인 양상이나 목적, 또는 역사에 따라서 동제, 충제, 기우제, 도깨비굿, 여제, 갯제 등으로 나뉘었다.

동제는 마을과 마을민 전체의 안녕, 그리고 농사의 풍년 등 포괄적 목적으로 위해 마을 주민이 중심이 되어 모시는 의례를 말한다. 충제는 병충해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모시는 마을 제사인데, 진도에서는 대개 6월에 제사를 지냈다. 기우제는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모시는 의례이다.

도깨비굿은 주로 진도에서 발견되는데, 잡귀를 마을 밖으로 방축한다는 의미를 지닌 주술적 행사이다. 여제(厲祭)는 관청에서 주재하는 제사였는데, 조선 후기 관제가 약화되면서 사라졌는데, 진도에서는 특수하게 민간에 수용되어 모셔지고 있다. 갯제는 일종의 풍어제로서 해안 및 도서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다.

진도의 마을신앙은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며, 현재 전승되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도 과거에 비해서 약화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속놀이]

진도 사람들이 많이 즐겼던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민속놀이에는 짱치기·줄다리기·씨름·낫굴림[낫치기]·윷놀이·장기두기·바둑두기·골패놀이·마장·투전놀이[살랭이놀이]·들독들기·상매맞기놀이·야락잔치놀이 등을 들 수 있다. 여성 놀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강강술래이다. 그런데 강강술래는 남녀가 함께하는 놀이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남생아 놀아라, 고사리 꺾기, 청어 엮고 풀기, 덕석몰기, 기와밟기, 문 열기, 쥔쥐새끼놀이, 꼬리따기 등 다양한 부대 놀이가 함께 이루어진다.

아동 중심의 놀이로는 짚공치기, 한다리만다리, 수건돌리기, 쌀보리, 닭싸움, 땅따먹기, 조새놀이, 고누, 비석치기, 고무줄놀이,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이 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고 공간도 사라지면서 점차 전통 민속놀이는 자발적 연행 장면을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생업 도구]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도 지역에서 사용하던 재래 농기구 또한 농기계의 보급과 경지정리 등 농사 여건의 변화, 농촌 인구의 노령화로 급속히 소멸되고 있다. 진도는 도서지방이라는 특성 때문에 내륙지방의 농기구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밭농사에 사용하였던 극젱이, 육지에서 사용하는 무자위 등은 사용하지 않는다.

진도군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지만 과거에는 조도군도뿐 아니라 체도(體島) 전체가 반농반어업을 생업으로 삼던 곳이었다. 즉 간척이 심화되기 이전에는 사실상 갯벌 어업과 연해 어업을 중심으로 생업 활동을 하였다. 갯벌을 중심으로 한 어구 어법 중에서는 맨손 채취 어구와 양식 어구류를 들 수 있고, 그 밖에 낚시와 주낙을 포함한 조(釣) 어구류가 있다. 지금은 양식 어업에 종사하는 어가가 많은데, 미역이나 다시마 등의 해조류, 전복이나 굴 등의 어패류 등을 주로 양식한다.

[사례로 살핀 독특한 진도 민속]

진도의 민속은 다른 지역과 달리 옛 풍속이 많이 전승되고 있다. 먼저 진도군 임회면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분할제사(分割祭祀)’가 있다. 분할제사는 진도와 제주도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제례 양식으로서 오랜 민속 전승의 하나이다. 역신(疫神)을 비롯한 돌림병이 창궐할 것이라는 해[年]의 정초에 마을의 여인네들이 월경이 묻은 속곳을 깃발 삼아 앞세우고 금속성 소리가 나는 물건들을 들고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는 액막이 ‘도깨비굿’도 있다.

또한 남도 세습 무속의 정체성과 굿성을 추론할 수 있는 ‘진도씻김굿’과 다른 곳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곽머리씻김굿’도 있으며, 출상 전야에 신청(神廳)의 단골들이 망자의 극락 환생을 축원하면서 상주들의 애상(哀傷)을 위무(慰撫)하는 ‘다시래기’도 있다. 진도의 장례 행렬은 다른 지역과 달리 상여 앞에 두 줄의 무명베를 늘어 메고 이를 마을의 여인네들이 잡고서 묘지까지 선도하고, 만가의 설소리[앞소리]도 꽹과리·북·장고·피리의 반주 속에 씻김굿의 가락과 거의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간다.

진도에서는 모내기나 논매기를 할 때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행위 전승, 즉 머리에 담쟁이넝쿨이나 칡넝쿨을 감는다. 이는 일본 오키나와 지방의 ‘오월(五月) 우마찌(ウマチ)’, 즉 도작의례(稻作儀禮) 때 신제무당(神祭巫堂)인 ‘노로’, 즉 신녀(神女)가 신을 맞이할 때 나뭇잎이나 넝쿨을 머리에 감는 것과 흡사하다.

[의의와 평가]

진도의 민속은 외래 민속과의 접점으로서 비교 민속학 연구에 많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진도는 한마디로 민속의 요람이요 보고로서, 우리 민속의 정체성을 밝혀 민족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규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고장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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